‘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본문 47쪽)

따져보면, 이른 바 글로벌 시대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 바로 접니다. 주머니사정이 그리 여의치 않은 까닭도 있겠거니와, 당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내재화된 놈이라 국내는 물론 국외 여행을 많이 가지 못했다.

일을 위해 중국을 제일 많이 다녀온 것 같고, 신혼여행으로 태국 한 번, 그 이후 일본 여행을 몇 번 다녀온 것이 전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많이 다녀왔지만, 여행이라기보다는 업무를 위함이었고, 그것을 국외여행이라고 굳이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아, 금강산과 개성을 온전히 관광 목적으로 다녀온 적은 있다. 돌이켜보면 꿈만 같은 기억들이다.

그렇다고 여행 그 자체의 매력을 모른다거나 로망이 아예 없는 녀석은 아닙니다. 재미나게 쓴 여행기를 읽고나면, 당장이라도 배낭 하나 둘러메고 떠나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역시나 거대한 마시멜로 인형이 들러붙어 발목을 잡은 것처럼, 무기력하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역시 이번엔 힘들겠어. 내년엔 꼭!’을 다짐하며 세월을 무사통과시켜왔다. 그냥 게으르다고 해, 이 녀석아.

잘 쓴 여행기, 여행 에세이의 미덕은 우선 글을 읽고 당장이라도 그 장소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일 게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 아름다운 풍광, 맛있는 음식, 고풍스러운 건물과 유적들, 그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다양한 유무형의 흔적들까지. 마치 독자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독자가 직접 기동(!)하게 만드는 것이 잘 쓴 여행기의 내공이겠다.

하지만, 거기에서 글의 목적을 다한다면, 저는 솔직히 많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그 어떤 위대한 작가의 글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내가 기함(!)까진 하겠지만 직접 기동까지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함을 알기 때문이다. 역시 거대 마시멜로 인형은 막강하다.

때문에 훌륭한, 잘 쓴 여행 에세이는 글을 통해 여행지뿐만 아니라 바로 여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너를 넘어, 더 큰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나아가 모든 지구인이 친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책이 최고의 여행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6.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6.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은 그 기준에 맹렬히 부합하는 아주 사랑스러운 책이다. SF작가의 기발함이나 재기발랄도 좋았지만, 진중히 세상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특히 따뜻해서 좋았다.

이 미쳐가는 세상 속에, 비정하다 못해 초현실적으로 보일만큼, 대략 누구와도 함께 살기 싫게 만드는 세상에서 작가의 글은 한껏 사람다운 따스함을 전해준다. 무엇보다 참 글을 아기자기하게 잘 쓴다. 열혈 팬들이 많을 수밖에 없겠다.

작가가 여행한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 미국 뉴욕, 독일 아헨, 일본 오사카, 타이완 타이베이 그리고 영국 런던까지. 우연과 필연이 겹쳐 다녀온 곳들에 대한 이야기를, 팬데믹으로 국내는 물론 국외여행이 매우 쉽지 않았던 시기에 쓰고 펴냈다. 때문에 글에는 진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묻어 있을 수밖에.

하지만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언젠가 다시 시작될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이들도 그 마음을 함께 해주길 바란다. 그것은 최소한의 발자국만을 남기는 여행, 자신의 여행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이곳을 찾고자 할 다른 이들의 기회를 빼앗지 않는, 그런 소박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관광객은 사랑스럽지만, 관광산업은 사랑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코로나 이전 전 세계가 비대한 관광산업으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한 인류의 이동이 멈춘 이후, 주요 관광지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들의 자연이 회복되어가는, 역설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제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지켜야 할 것들을 망가지지 않게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서면 어떨까.

때로 조용한 분노를, 적지 않은 반성을, 미처 몰랐던 새로움을 전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겁나 큰 쥐들이 범람할(!) 정도로 더러운 것은 기본이고,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등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뉴욕의 지하철을 보며 저자는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을 통해 2001년에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우리의 지하철을 떠올린다. 장애인들의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왜 뉴욕 지하철이 이 따위인지 궁금했는데, 결국 모든 것이 돈 때문임을 알게 된다. 너무 오래 전에 역을 만들었기에 개선의 난항이 많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비용보다 지상 층에 엘리베이터를 위한 부동산을 구매하는 비용이 더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닥쳐올 미래일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장애인을 비롯해 약자들을 위한 충분한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이외에도 작가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조롱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구의 대형 박물관에는 빠짐없이 동양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문 이유가 씁쓸하다. 몇 년 이나 함께 일하면서도 아시아인의 이름을 끝끝내 외우지 못하는(않는) 서구인들의 마음이 얄밉고, 월가시위가 한창일 때 생각보다 작기만 한 월스트리트를 바라보며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까지 활기의 원천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괴물이 되는 걸까? 그 지점을 어떻게 간파하고 제동을 거는지가 이 시대의 과제’라고 느낀다.

독일 아헨 체류 시 버스를 통해 인근 국가를 마치 옆 동네 가듯(옆 동네가 맞긴 하다) 자유롭게 이동하는 모습에서, 국경이라는 개념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리고 저자의 시각에서,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다. 역시 더럽게 부러울 수밖에. 우린 아직도 외국 여행이 해외여행이니까.

발랄하고 톡톡 튀는 문장 속에 담긴 깊은 사색이, 결코 허투른 작가가 아님을 느낀다. 비록 글 참 못 짓는 저이지만, 적어도 타인의 멋진 글 정도는 알아볼 수 있거든요. 이 정도의 멋진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지고, 다시 또 배우려 노력했을지 짐작된다. 한 문장을 위해 몇 시간을 손과 안구와 필기도구를 괴롭힌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비록 코로나 이전과 똑같진 않지만, 이제 어느 정도 여행의 자유가 넉넉해진 지금이다. 이럴 때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는 분단민의 설움이 더해진다. 하다못해 제3국에서의 만남도 요원하다. 중국도 여전히 불편부당하고, 다른 국가들도 쉽지 않다. 참으려 해도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인간들은 도대체 제정신인 것일까. 국민의 자유를 한껏 억누르며, 무슨 복지를 운운하고, 무슨 국민행복을 떠드는가.

서로 오가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우린 더더욱 상대를 모르게 되고, 오해와 오판의 가능성은 한껏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쟁 운운하고, 독자적 핵무장을 떠드는 인간들은 단언컨대 금강산 관광 한 번 가보지 않은 이들일 것이다. 아, 갑자기 또 욕이 튀어나오려….

책은 다양한 여정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구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이야기한다. 너와 나로 나누지 않고,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하지 않고, 적과 우리 편으로 가르지 않고 그저 이 기적과도 같은 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친구로서 서로를 바라보자고 이야기한다.

따뜻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깊은 사유가 담겨있는 책이다. 이제 다시 여행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아울러 하루라도 빨리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우리 좀 제대로 살아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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