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세상은 밤을 새워 가며 미칠 듯이 좋아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웬셈인지 우리나라 사람들(한국 교포들)은 나와 같은 맘인지 다들 멍하여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 발표되는 방송을 들으며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245쪽)

1945년 8월 10일 중국 사천성 중경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며 타향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전해진 기적과도 같은 소식. 하지만 왜 정작 글쓴이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멍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우리나비 펴냄, 2019년 2월.[자료 사진 - 통일뉴스]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우리나비 펴냄, 2019년 2월.[자료 사진 - 통일뉴스]

『제시의 일기』는 독립운동가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육아일기이자, 당시 중국 대륙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임시정부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1938년 7월부터 1946년 4월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추천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양우조, 최선화 부부는 임시정부 내에서도 보기 드문 지식인들이었다. 양우조는 손문의 「삼민주의」를 국내에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 이로, 우리 조선인들이 더 이상 헐벗지 않도록 방직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 청년이었다. 이후 1930년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 정부 내의 각종 영문서를 비롯하여 문서작성을 맡았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넘어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 문제까지 고민했던 정치적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부인 최선화 역시 이화여전 출신의 신여성으로서, 결혼을 약속한 양우조를 찾아 홀로 중국 대륙으로 넘어가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한 후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8년 7월 큰딸 제시를 얻은 이후 일기는 시작된다. 당연히 일기의 주인공은 큰딸 제시였다. 언제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될지 모르는 불안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변변히 제대로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딸 제시는 임시정부 가족들의, 조선인 교포들의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주로 양우조가 일기를 써내려갔고, 최선화의 글이 중간 중간 포함된 형식의 일기는 딸의 성장을 대견하게, 또한 안쓰럽게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 망명생활이었지만, 제시 가족은 임시정부 식구들과 교포들의 따뜻한 정을 바탕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일기의 곳곳에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간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고민도 일기 곳곳에 담겨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한 길을 가면서도 정치적 지향점과 성향이 달라 분열을 거듭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광복 후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요즘 임정은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 그리고 ‘조선혁명당’ 등 임시 정부 주변의 민족진영이 뿔뿔이 갈라져 있고, 한국 광복운동 단체 연합회 등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는 있지만, 진전이 뚜렷하지 않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움직임이 발전되면 좋으련만.”
- 1939년 1월 25일, 유주 (양우조, 63쪽)

“자신의 의지가 꺾어지면 그렇게도 아이들이 화를 내고 울어 대듯이 각자 자기 주장이 다른 중국의 우리 교포들 모임은 제각기 자기의 목소리만 목청 높이 질러대고 있다. 함께 어울려 노는 사이좋은 동무들과 같이 하나로 뭉쳐 우리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모두 순간의 욕심을 위해 더 길고 큰 목표를 바라보지 못하고, 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용서와 화해를 잊은 채, 당파니 사상이니 하는 서로 간의 차이에 대한 옹졸함과 자존심, 그리고 이기주의에 휩싸여 불평하고 질투하기에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 함께 고생하는 동포들이 겨우 세상에 눈을 뜬 제시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우는 제시의 목소리와 함께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힌다.”
-1939년 3월 26일, 유주 (최선화, 68쪽)

꿈에서도 바라마지않던 광복이 찾아온 뒤, 제시의 가족들은 희망과 불안을 함께 안고 그토록 그리웠던 조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조선은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광복을 맞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혼란 그 자체였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조국이 다시 분단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이들은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김훈의 『하얼빈』을 함께 읽었다.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총으로, 말로, 글로 세상에 외친 후 군더더기 없이 생을 마감했다. 만약 그가 이토를 쏘지 않았다면, 해방의 순간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는 무슨 말을 세상에 던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부질없는 상상이고, 무참한 생각이다.

망국의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살아냈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이도 있었고, 밀정이 되어, 친일파가 되어 목숨을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여전히 친일파의 후손들이, 그리고 그 이후 독재정권에 빌붙었던 이들의 후손들이 부귀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의라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은 삶은 이어진다는 것이다.

역사는 허투루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부귀가 자손대대로 이어진다고 해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가 존속하는 한 불변할 것이다. 그리고 남아있는, 살아있는 이들은 이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남겨야 할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도, 바뀌지 않는 것도 세상에는 없다. 정의는 기한이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일제에 의한 간도대지진 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기를 맞는 해이다. 이를 계기로 늦었지만 남북이 함께 100년 전 비극을 함께 기리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지만, 통일의 결정과 실행은 바로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책의 저자들과 주인공인 제시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제시의 동생인 제니와 일기를 책으로 엮은 제시의 딸 김현주 씨가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시의 일기』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그 기록으로, 남겨진 우리는 다시 정의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이미 그들은 큰 선물을 남겼다. 아주 찬찬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전쟁 전에는 중국 기관에서 혹은 나름의 직업을 갖고 살던 교포들이 전쟁으로 삶의 기반을 잃고 어렵게 살았을망정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중국인들과 어울려 살아 나갔다. 그러면서 같은 민족끼리 정을 나누는 따뜻함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있었던 반면, 아편장사를 하거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첩자 노릇을 하고, 비록 재산은 많이 모았을망정 중국인을 박해하면서 중국인들에게 한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심어 주었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이제 모두 고향에서, 아니면 이 중국 땅에서, 아니면 또 다른 제3국에서 달라진 삶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이들 모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인 중국에서 조국을 잃고 타향살이를 해 나가던 사람들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 1946년 2월 11일, 월요일, 한구 (최선화,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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