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람의 정신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 분의 변하지 아니하고 굴하지 않는 그 ‘매움(烈)’의 끼쳐 줌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뒤에 남아 있는 우리는 그 끼침으로 하여금 아무쪼록 더 빛나게, 더 장엄하게 할 책임이 있다.”(178쪽)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음력으로 올해 나와야 할 마지막 책이 출간됐다. 『임오교변 - 대종교 탄압과 박해』(선인 출판사)가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2년 임오년(壬午年)에 발생한 일제의 대종교 탄압 사건이다. 이때 혹독한 고문과 수감생활로 사망한 열 분, 임오십현(壬午十賢)이 있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은 “1942년 11월 19일 일제가 대종교를 중국동북지역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으로 25명이 체포돼 10명이 순교했고, 7명이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임오교변으로 순교한 임오십현.명단.(169쪽)  [자료사진 - 통일뉴스]
임오교변으로 순교한 임오십현.명단.(169쪽)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던 백산 안희제는 대종교 총본사가 자리잡은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을 운영하다 체포돼 병보석으로 출옥한 다음날 숨졌고,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의 장남 나정련은 액하감옥에서, 차남 나정문은 역시 병보석 출옥 다음날 귀천했다.

1942년이면 일제 말기로 많은 이들이 일제에 투항하던 시기지만 일제가 마지막까지 발본색원하고자 했던 만주지역의 대종교와 국내의 조선어학회가 탄압의 대상이 됐다. 두 사건은 “한글어학회 사건이 곧 대교 교변이오, 대교 임오교변이 곧 독립운동실기”(317쪽)라고 할만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은 다루지 않았다.

일제는 기소장에서 대종교를 “조선독립의 소지를 만들어 궁극에서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 통치권의 지배를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하고, 또 그 독립형태를 이상국가인 배달국의 지상에 재건을 목적으로 한 단체”(283쪽)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김동환 외, 『임오교변 - 대종교 탄압과 박해』, 선인.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동환 외, 『임오교변 - 대종교 탄압과 박해』, 선인.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 책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이 1장 「대종교와 한민족의 정체성」을,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이 2장 「1942년 일제의 대종교 탄압과 치안유지법」을,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이 3장 「임오교변 전말」을, 최윤수 국학연구소 연구원이 4장 「고문과정에서 완성된 윤세복 종사의 삼법(三法)수행」을, 정영훈 한국중앙학연구원 명예교수가 5장 「대종교와 임오교변」을 각각 맡아 집필했다.

부록으로 단애 윤세복의 「삼법회통」, 근재 이현익의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과 같은 귀중한 자료와 성재 이시영의 「임오십현순교실록서」, 천봉 강성모의 「기소역문」, 단암 이용태의 「구금고황」과 같은 대종교와 임오교변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들이 실렸다.

특히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본산으로만 보지 않고 “신도를 국교로 했던 일제로서는, 신도의 뿌리를 주장하는 조선의 신교(대종교)를 용납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체성의 충돌이었다. 대종교와 신도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85쪽)라고 파악한 김동환의 논지는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근대정체성의 핵심 가치인 국시(홍익인간), 국전(개천절), 그리고 국기(단군기원) 등이 대종교에서 파생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국교(國敎) 관념이나 한글 정착, 그리고 중화사관과 일제관학에 맞서 우리의 역사학을 개척한 집단도 대종교”(30쪽)라는 평가이다.

최윤수가 대종교 3세 교주인 단애 윤세복이 액하감옥에서 저술한 「삼법회통」을 집중 조명한 점도 이채롭다. 지금은 사실상 명맥이 끊긴 대종교의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삼법수행(三法修行)을 다루고 있다. 고문과 학대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에서도 삼법수행에 매진해 저술을 남긴 것이다.

“종교적 신앙심으로 수행하는 가운데 동지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옥살이를 견뎠다. 특히, 동지인 이현익이 50일 동안 자기 밥을 주어서 윤세복은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197쪽)

이 책 곳곳에는 피와 뼈가 튀고 녹아내리는 일제의 만행이 드러나 있고, 애국지사들의 굳은 절개와 신념이 도드라져 있다. 다만, 단애 윤세복의 합법화 노선에 대한 평가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다.

길림성장 장작림은 일제와 1925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맺고 1926년 중국동북지역에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렸고, 밀산에 엎드려 있던 대종교 총본사는 교주 윤세복의 대종교 합법화 노력으로 1934년 다시 발해 고도 동경성에 둥지를 틀고 본격적인 교세 확장과 독립운동에 나서다 임오교변을 당한 것.

“윤세복을 위시한 대종교 지도자들은 대종교 포교 의지가 앞선 나머지 이러한 일제의 교활하고 잔인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대종교에 대한 내사와 감사를 강화하고, 대종교총본사에 교인을 가장한 일제의 밀정을 잠입시켜 대종교 동향과 간부들의 언행마저도 일일이 정탐하였다.”(153쪽)

장세윤은 만주국이 1932년 제정한 ‘잠행징치반도법’과 ‘잠행징치도비법’이 ‘임진격살’과 ‘재량조치’ 조항으로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만주국 군경에 의해 무려 6만 6천여 명에 달하는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토벌’ 당시 비적(匪賊)이나 ‘도비’로 규정되어 무참히 살육되고 말았다”고 적시했다.(115쪽).

또한 1925년 일제가 조선과 대만, 사할린 등에 ‘치안유지법’을 공포 실시했고, 1941년 개정 치안유지법이 시행돼 “조선인들은 일제의 각종 수탈과 전쟁동원에 저항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이후에 미전향 사상범과 위험시되는 인물들이 전국 주요 사상범 보호관찰소나 감옥에 강제구금되었다.”(124쪽)

특히 “만주국에서는 조선보다 더욱 엄혹하게 적용된 것으로 파악된다”(125쪽), “만주국에서 1941년 말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이후 1945년 8월까지 치안유지법으로 처벌된 사람은 1만 수천명에 이르고, 사형선고와 집행은 2천명 가량으로 추정된다”(130쪽)고 적고 있다. 일제의 대종교 탄압, 즉 임오교변 역시 이 치안유지법을 적용한 것이다.

더구나 “이 법은 일제강점기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현재도 남아있는 ‘국가보안법’의 원조격이라고 평가된다”(119쪽)는 평가는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과 생소한 대종교지만 대종교의 군사조직인 북로군정서가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고, 일제가 마지막까지 탄압한 대상 역시 대종교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우리의 관심과 눈길이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고,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살아있을 뿐이다. 아니, 대종교와 일본 신도와의 전쟁에서 아직도 일본 신도가 승리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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