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에서 조회를 한다.

“이번 십장생도 세화는 총 4좌를 제작할 것입니다. 초본은 진경산수화를 가장 잘 그리는 종 7품인 선회(善繪)가 주도해 주시오.
종 9품인 회사(繪史) 1명, 정화원 5명이 참여할 것이오. 특별히 경험이 많은 체아직 화원 2명이 함께 할 것이오.”

종 6품인 선화(線畵)는 도화서의 수장인 별제이므로, 선회는 별제 다음의 서열이다.

선회 화원이 묻는다.

“별제께서 특별히 부탁할 것은 없습니까?”

“조선이 꿈꾸고 만백성이 좋아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태평성대를 표현해야 합니다.
뭇 생명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풍경은 아름다워야 할 것입니다.”

[도화서]는 경비가 느슨한 궁궐 밖에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변수가 많고 여러 사람의 협업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게 드나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비노(差備奴, 그림업무에 필요한 재료의 준비와 관리 따위를 보조하는 관노)들은 창고에서 종이와 물감, 붓을 가져다 놓고 하나씩 점검했다.
배첩장은 차비노와 함께 그림틀을 짜기 시작했다. 10폭 병풍용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최소 대형 그림틀 3개가 필요하다.
튼튼한 오동나무 그림틀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맞춤으로 만든다. 그림틀 옆면에는 작은 못을 촘촘히 박았다.
그림틀 위에 비단을 놓고 힘껏 당겨 못에 고정한다. 비단이 퉁퉁 소리가 날만큼 팽팽하게 당겨야 한다.

3명의 평화원은 물감을 준비한다.
그림에 들어갈 물감의 종류와 양이 결정되면 꼼꼼하게 계량을 하고 기록한다.
청색이나 붉은 색 물감은 대부분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고가품이다.
자칫 오류가 생기면 문책을 당한다.

선회는 종이에 가는 숯으로 대략적인 초벌그림을 그린다.
이 밑그림은 몇 번에 걸쳐 수정과 보완하여 최종 초본으로 완성될 것이다.

숙종 재임기간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십장생도]를 재창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십장생도이다. 양식화가 일어나기 전의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렸으며 진채를 사용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숙종 재임기간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십장생도]를 재창작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십장생도이다. 양식화가 일어나기 전의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렸으며 진채를 사용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1차 초본이 완성되어 별제와 화원들이 모였다.
십장생도 창작 책임자인 선회가 초본을 설명한다.

“화면은 크게 2등분하여 우측은 육지를, 좌측은 호수를 그렸습니다.”

“호수 중앙 상단에 커다란 붉은 해를 그려 넣었는데, 호수에서 해가 뜬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큰 호수 위로 뜨는 아침 해를 그렸다. 영원성을 뜻하는 아침 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큰 호수는 점차 작은 호수로, 다시 개울로 축소되는데, 세계관이 좁아진 탓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큰 호수 위로 뜨는 아침 해를 그렸다. 영원성을 뜻하는 아침 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큰 호수는 점차 작은 호수로, 다시 개울로 축소되는데, 세계관이 좁아진 탓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좋은 지적입니다. 요지연도의 도상에 따르면 큰 호수가 틀림없습니다.
거대한 호수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파도를 넣었습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되는 것이지요.
아침 해는 태평성대의 영원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거대한 호수 위에 해를 그린 것은 아침 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산 위로 해가 보이면 아침이 아니라 오전 해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호수는 육지에 포함된 공간입니다. 바다처럼 미지의 세계, 두려움이 있는 공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조선은 대륙입니다. 굳이 바다를 그릴 이유는 없습니다.”

“호수에 비해 육지의 사물을 너무 크게 그린 것은 아닙니까?”

“의도한 것입니다.
호수는 넓고 멀리 보여야 합니다. 육지는 호수에 비해 가깝게 느껴져야 합니다. 육지에서 보는 사람의 눈과 맞추는 것이지요. 이를 진경화법이라고 합니다.”

“학을 숫자를 세어보니 10마리입니다. 사슴은 9마리, 거북은 2마리이네요. 이렇게 그린 이유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화면구성에 필요한 만큼 넣었습니다.”

“3이나 9같은 숫자를 맞추면 도교적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만약 화면구성에 맞게 그리다보니 9라는 숫자가 되면 어찌합니까?”

“의도한 것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암수가 있는데, 이를 구분해야 합니까?”

“생명은 잉태와 양육에 의해 풍성해집니다.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암수가 필요하지요.
학이나 거북은 암수를 구분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습니다만, 사슴은 뿔의 유무로 구분이 가능하니 암수를 적절하게 배분하여 그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꽃이 있으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보일 텐데, 넣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꽃을 그리면 더욱 수려할 것입니다. 하지만 꽃은 계절이라는 시간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 시간대가 형성되어 영원성이 훼손됩니다.”

“제법 넓은 공간을 구름과 안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까?”

“구름과 안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십장생도의 세상을 신비하게 만들고, 여백을 두어 집중력을 높입니다.
앞과 뒤를 구분하여 원근을 만들고, 사물이 서로 맞붙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구름으로 수평선을 숨기는 일은 조형적으로 중요합니다.
수평선이 나타나면 모든 사물을 여기에 맞추어야 하는데, 활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수평선은 개인에 따라 높낮이가 다릅니다. 수평선을 숨겨야 모든 사람의 세상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초본에 대한 평가는 마치고 본격적인 선묘작업과 채색에 들어가도록 하시오.”

별제가 조회를 마무리 한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너는 차비노 소청이 아니냐? 그래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

얼마 전 도화서로 배속 받은 18세의 여자 관노이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소청은 수 차례 도화서 차비노를 청원했다.
별제는 소청이 그린 참새그림을 보고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예조판서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도화서에 소속시킨 것이다.
소청은 총명하고 붙임성이 좋아 화원들과 두루 친했다.

십장생도에 등장한 학, 사슴, 거북은 거의 멸종당했다. 십장생도의 요소를 도교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불로장생을 위해 잡아먹은 결과이다. 약성도 없는 영지버섯이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이유도 같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십장생도에 등장한 학, 사슴, 거북은 거의 멸종당했다. 십장생도의 요소를 도교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불로장생을 위해 잡아먹은 결과이다. 약성도 없는 영지버섯이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이유도 같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사슴이 영지를 먹거나 간절히 쳐다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슴이나 학, 거북이를 불로장생하는 동물로 여기며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지는 군자의 향기를 뜻하지만, 사슴이 영지를 먹는 모습으로 인해 불로초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별제가 대답한다.

“음, 좋은 질문이다.
대부분의 백성은 십장생도의 사물을 영물로 여겨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다.
가끔 미신이나 도교에 빠진 사람들이 사슴의 뿔을 잘라 피를 마시고, 학을 잡아 약재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랑이를 잡아먹으면 호랑이처럼 용맹해지고, 거북이를 잡아먹으면 아들을 낳고 정력이 강해진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기망에 빠진 것이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에서 정한다. 그런 것을 먹는다고 불로장생할 까닭이 있겠느냐?”

“선회는 무슨 까닭으로 사슴이 영지를 먹는 장면을 그린 것인지 설명해 주시오.”

“그림 속의 영지(靈芝)는 이파리가 있고 구름을 닮았다하여 운지(雲芝)라 하옵고 현실의 버섯이 아닙니다.
사슴은 딱딱한 영지를 먹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사슴이 영지를 먹는 모습을 그린 것은 편안함을 주고 긴장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일종의 미술적 해학이지요.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은 관심을 끌고 궁금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꼼꼼하면서 즐겁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 화원들이 말한다.

“그렇습니다. 학이 서로 어르는 모습, 거북이 마주 보는 모습, 사슴이 앉아 졸거나 영지를 탐하는 모습은 마치 평화로운 일상처럼 느껴집니다.”

“답이 되었느냐? 소청아.”

“태평성대는 현실과 다른 특별한 세상이 아니군요. 저 같은 노비도 십장생도의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하하하, 태평성대의 세상에는 남녀노소, 귀천의 차이는 없다.”

사슴이 영지를 먹고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장면을 통해 그림에 집중시키고 평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태평성대는 특별한 세상이 아니라 평온하고 활기가 넘치는 현실이다. 성리학에는 천당, 천국, 지옥의 개념이 없다.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이 땅 위에 구현하는 세상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사슴이 영지를 먹고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장면을 통해 그림에 집중시키고 평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태평성대는 특별한 세상이 아니라 평온하고 활기가 넘치는 현실이다. 성리학에는 천당, 천국, 지옥의 개념이 없다.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이 땅 위에 구현하는 세상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선회가 초본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비단이 씌워진 그림틀을 놓았다.
비단 아래 비치는 초본을 보며 먹으로 사물을 그렸다.

선묘작업이 끝나자 선회는 초본을 바탕으로 작은 초본을 만들고 채색을 했다.
채색 본을 놓고 여러 차례 협의가 이루어졌다.

도화서는 ‘조직창작’을 한다.
작품의 기획과 철학적 내용은 예조와 홍문관에서 결정하고 국가의 예산을 사용하며, 국가조직으로 유통된다.
창작품의 최종 책임은 예조판서가 진다.
도화서에서 창작한 작품에는 개인의 서명이나 낙관을 넣지 않는다. 국가의 그림이고 소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름과 낙관이 들어간 그림은 개인 화실에서 그린 것으로 도화서와는 관련이 없다.

도화서는 기획, 선묘, 채색, 배첩 따위로 역할을 배분하고 협업을 하여 창작을 한다.
초본이나 채색 본은 조직창작을 위한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초본은 보관하고 채색 본은 폐기한다.

화원들은 밤낮으로 그렸다.
그렇게 4개월 만에 십장생도 10폭 병풍 4좌가 완성되었다.
4좌의 작품은 같은 어머니에 나온 쌍둥이처럼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별제는 겸재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십장생도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적은 장계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겸재 정선, 홍문관 응교의 감수라는 글과 낙관이 들어있었다.

이를 본 임금은 웃으며 말한다.

“드디어 십장생도가 완전해 졌소.
참으로 좋소. 평온하면서도 활기찹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세상은 참으로 살만하다는 마음이 생기오.
이를 많이 창작하여 조선의 꿈을 널리 알리도록 하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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