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평화 네트워크 자문위원)


슬픈 두 죽음의 초상

온 나라가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광하는 동안 우리는 커다란 두 죽음의 소식을 들었다. 그 하나는 의정부 2사단 장갑차에 무참하게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비보다. 또 하나는 서해에서 북한 경비정과 교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5명의 해군 장병에 대한 소식이다. 이 두 죽음의 소식을 동시에 접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에 우리는 너무도 혼란스럽고 망연자실하다.
  
이 두 죽음의 본질은 분단 현실이라는 데서는 같다. 그러나 그 의미와 여파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각기 다른 극단으로 발전되며, 월드컵으로 하나된 국민정서까지도 제각기 갈라놓고 있다. 서해교전으로 초래된 정서는 반북의식과 애국주의, 국가주의, 냉전주의이며 우리 사회 보수의 견인층이라 할 수 있는 50대가 그 중심에 있다. 반면 미군의 여중생 살해사건은 민주주의와 인권, 자주의식에 대한 갈증을 불러 일으켜 중고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고 있다. 올해초 반미열풍을 20대가 견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젊은 층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친다.
  
그런 만큼 두 죽음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편가르기는 국가주의 가치와 인권의 가치의 대결, 50대와 20세간 세대대결의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두 사건과 관련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그러한 성향이 희미하지만, 그러나 일관되고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근대화의 좌절과 분단 현실이라는 지난 역사에서 비롯된 한국민 특유의 복잡한 의식구조, 이중성이 자리잡고 있다.

전환시대, 상징과 개념의 재검토

그러나 이 극한 대립을 넘어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냉전시대때 고수해왔던 각종 상징과 개념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다. 태극기는 50대에게는 반공의 상징이다. 30대에게는 반독재 민주화의 상징이다. 20대에게는 월드컵의 상징이다. 이처럼 의미가 다르니까 이 상징을 활용하는 목적도 다르다.
  
국가안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냉전의 전사들에게는 이것이 마치 지고지선의 절대가치요, 군사력에 의한 절대안보라는 개념이 아직도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층에게는 안보란 국가의 여러 가지 서어비스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국민이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게 하는 국가의 책무일 뿐이지, 그것은 목적이 될 수도 없으며 인권을 제한하는 명분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안보가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안보주의, 그것이 더 정치화된 안보 상업주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막상 국가안보를 말하더라도 그 숨은 의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성의 용광로 속에서 냉전시대 상징과 개념을 낱낱이 해부해 보면, 전쟁과 폭력,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절대안보와 같은 허상의 껍데기들이 더 이상 현실적 근거와 타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국가안보라는 명분의 이면에는 그 덕분에 특권을 누린 기득권층이 존재하고, 그 기득권층은 원정출산, 이중 국적, 병역기피, 학벌주의와 같이 낯뜨거운 면면이 숨어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득권 논리가 오히려 안보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당 일각의 강경 보수주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햇볕정책 시비와 논란도 마찬가지다. `퍼주기론`을 앞세워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 DJ`라는 정서에 충실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도 않는다. 퍼주기의 실체는 현대라는 재벌 그룹이다. 현대의 대북 투자를 장려한 김 대통령은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하면서도 그 재벌 총수였으며, 북한 소를 몇만 마리 선물한 정주영 회장의 사상에 대해 시비하는 것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똑같은 정책이라도 김 대통령이기 때문에 더 비판받는 것이다.
  
그 뿐인가. 냉전시대 안보의 희생자들 면면을 보자. 국군 포로, 북파 공작원, 고엽제 피해자들 등등. 지금 국가안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은폐한 세력들 아니던가. 97년까지 정부 정책에 국군포로라는 용어, 북파 공작원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한 사실이 없다. 오직 한국전쟁 실종자, 대북 정보부대 요원이라는 이름만 있었고 그나마도 비밀이었다. 이러한 안보의 희생자들을 복권시킨 것은 안보주의자들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힘입은 때문이다. 오히려 국군의 수뇌부들은 전우를 배신하고 그 사실을 은폐해왔다.
  
그러므로 안보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모순에 봉착했다. `국가보안법 개정논의 철회하고 국군 포로 송환하라`. 이것은 지난해 현충일 날에 재향군인회의 표어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 국군 포로 송환의 호조건이언정 악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같은 모순된 어법을 아무 생각없이 구사한다. 국군 포로가 과거에 한국전쟁 실종자로 불리던 시절, 국방부 대간첩정보과라는 부서가 국군 포로를 북한이 대남 공작에 활용할지 모른다는 구실로 그 가족까지 감시하고 연좌제로 묶어 버렸다. 사정이 이러한데 국군 포로 가족들이 국가보안법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신주 보물단지같이 모신단 말인가. 그것은 과거 국군 수뇌부의 착각이자, 전우를 배신한 원죄의식에서 비롯된 왜곡된 관념이다.
  
이제는 냉전시대와 민주화 투쟁의 시대라는 역사의 격동기에 부채의식을 전혀 갖지 아니한 20대를 주목해야 한다. 태극기를 꺼릴 것 없이 두르고 다니는 저들이 우리의 미래다. 어떤 이데올로기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걸칠 것이 아니라 `살인자를 처벌하라`는 순수한 요구에 충실해야 하며, 같은 이치로 해군 장병에 대한 희생에 대해 끝까지 북한에게는 응분의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이 원칙에 충실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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