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독도는 우산국의 영역이다

현재의 울릉도에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울릉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늦어도 청동기시대였던 것 같다. 고인돌로 보아 옛 우산국인들은 한반도에서 해류를 타고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섬 국가의 공통성은 해양국가라는 점이다. 우산국(于山國)은 해양국가이므로 울릉도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우산국인(于山國人)들도 어로(漁撈)를 중요시하였고, 어로를 위한 선박도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보이는 가장 가까운 섬 독도는 당연히 우산국의 영역이었다. 해양 동물의 서식지 독도가 우산국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거나 친일파일 것이다. 우산국인들이 계절에 따라 독도에 일시 거주하며 어로 활동을 하였을 것이라는 관점은 당연하다.

2. 독도에서 우산국의 흔적을 찾자

『독도』, 네이버 지도에서 갈무리한 사진. [사진 제공 - 이양재]
『독도』, 네이버 지도에서 갈무리한 사진. [사진 제공 - 이양재]

얼마 전 어느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독도 해역(海域)에 부속된 한 바위에 용도 미상의 구멍이 여럿 뚫린 동영상을 보았다. 분명 인위적으로 뻥 뚫린 구멍이다. 지난 여러 달간 나는 그 구멍이 잊혀지지 않았고, 최근 그 구멍은 원시적인 어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페이스북에서 그 동영상을 찾았으나 쉬 찾을 수가 없다.

나는 독도박물관과 울릉군청이 주도하여 빠른 시일 내에 독도에서 우산국시대의 선사유적과 유물에 대한 종합적인 탐사를 하여야 한다고 본다. 독도에도 선사유적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독도의 구석구석을 종합적으로 탐색하여야 한다. 어로 활동을 위하여 우산국인들이 들렸다가 남긴 유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암각화나 석각, 석기, 원시적인 어로 흔적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고대인의 어로 흔적은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원시적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찾아야 한다. 독도의 지표 위는 상당히 훼손되었을 것이다. 독도의 해수면 10m까지는 살펴보아야 한다. 탐색 성과가 없더라도 이 탐사는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독도에서 우산국의 흔적을 찾는 탐색은 당연히 고려와 조선의 흔적을 찾는 탐색이기도 하다. 해양국가 우산국이나 해양에 둘러싸인 울릉군의 생활 기반은 그 인근 해역이다. 즉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의 앞마당과 같은 해역이다.

3. 초대 독도박물관장 사운 이종학 선생을 회상한다

1982년도에 한국고서동우회를 창립하여 첫 기획간사를 맡게 되었고, 그 해 늦가을에 당시 KBS의 자회사였던 ‘한국방송사업단’의 역사자료전 ‘풍운 – 한말유물자료전’을 기획, 섭외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사운(史芸) 이종학(李鍾學) 선생의 수원 자택을 방문하여 서광범 등 8인이 쓴 병풍 한 틀을 빌려오게 되었다.

이후 2002년 11월 25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서운동가로서 20년간을 교유하였다. 사운 이종학 선생은 1927년생이니, 나의 부친보다 9세가 더 많았고 나보다는 28세가 위였다. 그러나 수백 년 전 고문헌 앞에서 28세의 연령차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운 선생은 1997년에 기증자료 500여 점으로 울릉도에 ‘독도박물관’을 개관했다. 내가 알기에는 건물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지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사운 선생은 2001년 3월 북한에서 `일제의 조선강점 비법성에 대한 공동자료전시회'와 토론회를 열어 일본규탄 공동성명을 남북학계 최초로 발표한 주역이 됐다. 북을 다녀온 후에 종로구 낙원동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나를 인근의 고깃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노동신문」 기사를 자랑하며, 북에 “『평양지』 초판본을 영구 기탁”하고 오셨다고 한다. 그것이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4. 여적(餘滴)

『왜국왕통보의 형성』, 고관민, 2001년, 웅산각 발행. 일본 조선대학의 고관민 교수는 어느 재일본 조선인 미술가를 통하여 이 책을 내게 보내 주었다. 호의에 매우 감사드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왜국왕통보의 형성』, 고관민, 2001년, 웅산각 발행. 일본 조선대학의 고관민 교수는 어느 재일본 조선인 미술가를 통하여 이 책을 내게 보내 주었다. 호의에 매우 감사드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운 이종학 선생은 타계하신 이듬해(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으셨다. 나는 사운 선생이 일본 총련계 조선대학의 고관민(高寬敏, 1940~?) 교수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운 선생은 ‘진보다, 수구다’를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을 찾아 역사를 우리 민족의 규명하는 일에는 보수파적 기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흔히 나대는 꼴통 수구는 보수파가 절대 아니다. 진짜 보수파는 사운 선생처럼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올해는 사운 선생이 돌아가신 지 꼭 20주기이다. 그리고 사운 선생 타계 20년 후에 나는 화봉 여승구 선생을 잃었다. 사운 선생은 살아서 자신의 애장품이 갈 곳을 정하여 떠나보냈다. 존경스럽다. 그러나 함께 교유하였던 탁월한 애서운동가 화봉 선생은 그러지를 못하였다.

나는 이런 면에서 사후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고심스럽다. 20주기가 되기 전에 나 혼자라도 한라산 한 병을 들고 ‘독도박물관’엘 가야겠다. 요즘 사운 선생이 유난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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