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일까, 흥부의 박일까? 어쨌든 이제 오랜 세월 묵혀둔 봉인을 떼고 내용물을 확인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뜨거운 감자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다.

“내가 무엇 한가지 쓸 만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세월을 살다가 어둔 밤길에 작은 반디불을 맞난(만난) 것처럼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본 것이 있으니 곧 『환단고기』라는 책이다. 이것을 관학에서는 위서(僞書)라 해서 거들떠 보지도 않디만(않지만), 나는 그 책에서 어느 달은(다른) 력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뚜렷한 주체사관을 발견하고 ‘여기에 우리 민족의 갈길이 있구나’ 하고 홀로 기쁨에 잠겼다.”(강희남, 293쪽)

강희남‧박순경 외, 『환단고기에서 희망을 보다』, 도서출판 말, 2022. 8. 25. [자료사진 - 통일뉴스]
강희남‧박순경 외, 『환단고기에서 희망을 보다』, 도서출판 말, 2022. 8. 25.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최진섭 ‘도서출판 말’ 대표가 실마리삼은 것은 뜻밖에도 지금은 고인이 된 통일원로 강희남 목사와 박순경 교수의 글이다. 진보 중의 극진보로 분류해야 할 기독교 목사와 신학자가 『환단고기』에 눈길을 돌린 것은 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11년 계연수가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다룬「삼성기(三聖紀)」(상‧하),「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를 엮어 편찬했지만 망실됐고, 이유립이 1979년에 다시 세상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서(僞書) 시비가 끊이지 않고, [나무위키]의 경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조작된 위서”라고 단언하고 있다.

‘단군, 환단고기, 그리고 주체사관’을 부제로 단『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는 고 강희남, 박순경의 오래 전 글들이 계기를 마련했다면, 이덕일, 김종성, 이매림 등이 현재적 시점에서 환단고기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1장「환단고기에 담긴 주체적 역사관과 독립운동가」에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들을 논박하고 환단고기가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과 거기에 담긴 사관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김종성 역사저술가는 2장「기자조선 정통성 주장한 조선 왕실의 단군 사료 파기」에서 “고조선과 신선교에 관한 서적들이 조선시대에 탄압을 받고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은 우리가 갖고 있는 한국 상고사 지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며 “기존에 공인되는 사료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문제의식을 던졌다.

이매림(이완영)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 공동대표는 3장「대일항쟁기 독립운동가, 한국사 국통을 바로 세우다」에서 『환단고기』의 편찬자 계연수를 첫 번째로 소개하며, “최근 단학회의 실체가 밝혀지고, 계연수는 출중한 독립운동가였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가 공개되었다”고 소개하고 안창호, 신채호, 정인보, 김교헌, 조소앙 등의 단군 관련 역사관을 논했다.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하는 6장「환단고기 전수자 이유립과 민족의 주체사관」과「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편집자 전형배와의 인터뷰는 최진섭 ‘도서출판 말’ 대표가 직접 맡았다.

『환단고기』를 운초 계연수가 편찬했지만 유실됐고, 실제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책은 한암당 이유립이 1979년에 세상에 내놓았다는 점에서 이유립에 대한 판단에 따라 이 책의 위서 여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진섭은 이유립의 일대기를 요약하면서 ‘민족의 주체사관’을 내세웠다. 김부식의 ‘신라중심주의’ 사관을 비판하고 신채호의 맥을 이은 ‘북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로 이어지는 ‘고구려정통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편찬에 참여한 이유립의 제자 전형배 전 창해출판사 사장은 가까이서 지켜본 이유립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고,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락통일설’에 주목했다.

전형배는 ‘영락통일설’에 대해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 백제와도 실제적인 통일을 이룩한 군주라 보았다.... 바로 우리 민족 전래의 3한관경 개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존속시켰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이유립 사학 중 가장 비등점이 높은 체계를 꼽자면 이 영락대통일설이 아닐까 한다”며 “앞으로 50년이 지나기 전에 학계의 화두로 떠오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233-234쪽)

그는 이유립의 업적을 묻는 질문에 “우리 민족의 최대 병폐인 사대주의에 맞설 수 있는 역사적 무기를 남겨준 것”이라며 “해학 이기와 운초 계연수의 협업 아래 진행된 『환단고기』 집성을 후대에 전해주는 결정적 역할도 했다”고 답했다.

이 외에도 김명옥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의 4장 「남북한 중‧고등 역사 교과서의 단군 및 고조선 서울사 연구」나 북녘을 오간 최재영 목사의 「평양 단군릉과 기자를 파묘 현장 답사기」 등 평소 접하기 쉽지 않은 주제의 글들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북한 『력사과학』2021년 4호에 실린 림광철의 글, 10장 「단군관계 비사 《환단고기》에 반영된 력사관」 전문이 실린 점도 이 책의 큰 기여랄 수 있다. 『환단고기』에 대한 북측 입장을 소략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림광철은 “단군조선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건국하여 중국을 비롯한 주변나라들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기풍이 고구려-발해-고려까지 이어져왔다는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라는 점과 “실제로 력사적내용들을 지나치게 과장확대시켜 주관적인 우월감에서 서술된 것”이라는 점을 나란히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단군 및 고조선력사와 고구려력사를 사료적으로 풍부히 하는데 이바지해나가야 할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한 차례 위서 논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주류 강단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치부하고 더 이상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박석재 전 한국천문연구원 원장 등 천문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등 간헐적인 반론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참고로,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완역본이 출간된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임채우 역, 인월담)은 맨 앞에 ‘단군 천부경’을 싣고 “이 천부경은 지난 정사년(1917)에 처음으로 한국의 서쪽 영변군 백산에서 출현했는데, 계연수(桂延壽)라는 도인이 백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산속까지 들어갔다가, 석벽에서 이 글자를 발견하고 베꼈다고 한다”고 기록, 계연수의 존재를 확인해주고 있다.

‘국뽕’, ‘환빠’, ‘유사사학’ 등 모욕적 규정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당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특정 종교의 경전처럼 여겨지고 있을 뿐 아직 진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치거나 대중적 공론의 장에 나서지 못했다. 모처럼 진보진영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에서 희망을 보다』가 마침내 공론화의 첫걸음을 떼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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