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자는 역관 출신의 중인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무역을 하여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
소금과 인삼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하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를 수입해 막대한 중개료를 챙겼다는 소문도 있다.

강부자는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여서 강부자라고 불렸다.
재물만 많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통역 일을 하면서 중국이나 조선 정부의 관료들과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강부자의 위세는 대단했다.
강부자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뒷말을 하던 사람 중에는 왈짜패에게 몰매를 맞아 병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리 오너라. 광통교의 신윤복이라고 전하시오.”

“아, 혜원 선생이시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어르신께 알리겠습니다.”

신윤복은 태어나서 이런 호화로운 집을 처음 보았다.
거대한 솟을대문이 있고 족히 50여 칸 이상 규모를 가진 집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20여 칸의 행랑채들이 있고 마구간, 외양간과 가마가 놓인 창고들 사이로 머슴들이 분주히 오고 간다.
정원에는 연못이 있고, 못 주변에는 파초, 해당화, 모란 따위의 유려한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조선 후기 부자의 대부분은 중인이었다. 전통 가옥의 수명은 100년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후기 99칸 기와집의 정확한 모습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전통 기와집은 대부분 1800년대 말 이후에 개축과 보수를 거친 모습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조선 후기 부자의 대부분은 중인이었다. 전통 가옥의 수명은 100년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후기 99칸 기와집의 정확한 모습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전통 기와집은 대부분 1800년대 말 이후에 개축과 보수를 거친 모습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그 위로 중국풍의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돈 주고도 못 산다는 태호석이 기이한 자태를 뽐내고, 건물을 가르는 벽면에는 붉은 벽돌을 깎아 만든 부조 형태의 [해학반도도]가 장식되어 있다.

연못이 한눈에 보이는 정자에 마주 앉은 강부자는 생각보다 왜소한 체격이었다.
흔히 대감 모자라고 부르는 3단 정자관을 쓰고 쪽빛 비단옷을 입었다.
옷에는 옥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가 달려 있었고 금장식이 있는 기다란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깊은 주름이 있는 미간과 희고 긴 눈썹, 좁은 입술을 덮은 수염은 파란만장한 삶의 징표처럼 보였다.

“혜원의 명성을 들어 익히 알고 있네. 소박한 내 집을 찾아주어 고맙기 이를 데 없네.
서찰에서도 언급했듯이, 올해가 내 환갑 년일세.
벌써 환갑이라니... 남들은 장수했다고 축원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네.
아, 돌이켜보면 그간 참으로 고군분투하면서 살았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죽을 고비도 참 많이 넘겼지.”

강부자는 입에 침을 닦아가며 한 시간도 넘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신윤복은 묵묵히 들었다.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인생이 허무하더이다. 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 만하다 보니 정작 내 몫을 챙기지 못했소.
내 일전에 기방에서 아리따운 기생을 만났소. 도화라는 기명을 쓰고 있소.
솔직히 지금까지 많은 기생을 만나고 그럭저럭 어울렸소.
하지만 도화를 보는 순간, 이 늙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불덩이가 일더이다. 정말 오랜만에 삶의 의욕을 느꼈소.
그래서 첩으로 들일 생각으로 의향을 물었는데, 완강히 거부하더군.”

“강부자께서 재물을 아끼지는 않았을 것이고, 거부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평생 먹고 살 재물을 약속했네. 도화의 부모에게는 집 한 채와 형제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고개를 돌려버리더군.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하더군.
재물이 아니라 마음을 달라고.
참으로 난감한 요구네. 도화를 향한 나의 마음은 불덩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준단 말인가.
도무지 여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네.”

“저 같은 환쟁이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마음을 달라 해서 여러 날 고민했네. 그 마음이 뭔지, 그 마음을 어떻게 보여줄지.
그러다가 갑자기 초상화가 떠올랐네. 도화의 모습을 올곧이 그림 속에 담아내어 세상에 남기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네.”

“그러니까 도화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말씀입니까?
간결하게 말씀드립니다. 불가합니다.”

“어찌 불가하다 하시오. 혜원은 이미 수많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소.”

“그림 속의 여인은 모두 익명으로, 풍속화의 한 요소일 뿐이오. 하지만 구체적 이름을 가진 여인의 초상을 그리는 일은 왕도 하지 못했소.
기생의 초상을 그리는 일은 조선의 하늘이 무너져야 가능한 일이오.”

“까칠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리 단호한 줄 몰랐소. 혜원이 이리 나올 줄 알고 나도 조사를 했소이다.
내 말 좀 들어보오. 나는 중국을 자주 다녔소. 북경에는 유리창이라는 곳이 있소.”

중국의 유리창은 청나라 당시 세계적인 시장이었다. 조선의 사신단이 빠지지 않고 들렀던 곳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중국의 유리창은 청나라 당시 세계적인 시장이었다. 조선의 사신단이 빠지지 않고 들렀던 곳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유리창(琉璃廠)은 청나라 북경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조선 후기 때만 해도 27만 칸이나 되는 수많은 상점이 동서로 2.5km 걸쳐 길게 뻗어 있었다.
특히 수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점들이 즐비하고, 중국뿐 아니라 서양의 다양한 물품들까지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진 세계적인 시장이었다.

요지경과 오르골, 벼루와 벼루 갑, 이쑤시개와 치아통, 면빗과 참빗, 바늘통에 골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비단 가게, 서점, 그림 가게, 종이 가게, 찻집, 약국, 포목점, 은전포, 인삼 가게, 문방구점, 장난감 가게 등 수많은 상점에서는 온갖 물건을 팔았다.

또 중간중간 들어선 술집에서는 소흥춘(紹興春), 죽엽청(竹葉靑) 같은 향긋한 술을 팔아 거리의 흥취를 더했다.
‘병장기는 받지 않습니다(軍器不儅)’라고 크게 써 붙인 전당포에는 물건을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삼삼오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 무리와 부딪칠 듯 비껴가는 마차들로 귀뿌리가 울릴 지경이었고, 장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지나가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나 북경에 도착한 사신들이 몇 번이고 꼭 들렀던 곳이다.
이곳에서 청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참고: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이홍식)

“거기에는 세상의 모든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곳이오. 서화사나 지전같은 그림 가게에는 다양한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신기한 그림을 보았소. 아름다운 여성들이 호화로운 궁궐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이었소.
대부분은 여러 명이 그려져 있는데, 어떤 그림에는 여성 한 명만 그린 작품도 있었소.
이 그림을 사녀도(仕女圖)라고 하는데, 황실의 궁녀들을 그린 것이라고 하오.”

“사녀도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 사녀도의 전통은 위진남북조시대(3~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녀(仕女)는 벼슬을 가진 여성으로 궁녀를 뜻한다. 이후 사녀도는 궁녀뿐만 아니라 미인을 뜻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중국 사녀도의 전통은 위진남북조시대(3~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녀(仕女)는 벼슬을 가진 여성으로 궁녀를 뜻한다. 이후 사녀도는 궁녀뿐만 아니라 미인을 뜻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오.
동료 역관에게서 들은 말인데, 단원 김홍도 선생이 사신단에 끼어 북경을 들렀다고 합디다.
중국의 여러 화원을 만나고 천주교 성당 그림을 보러 가기도 했답니다.
한 번은 단원이 유리창에 들러 사녀도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한 점을 구매했다더군.
그러니까, 조선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여성을 단독으로 그린 사녀도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번 모사했다는 말이 있소.”

신윤복은 김홍도가 그린 사녀도를 알고 있었다.
강부자의 말대로 중국의 사녀도를 모사한 그림이다.
혜원은 이러한 사녀도가 단지 [신선도]를 그리기 위한 습작인 줄 알았다.
김홍도의 [신선도]에는 여자 신선인 하선고(何仙姑)와 성별이 모호한 남채화(藍菜和)가 등장한다.
이러한 신선의 복장이나 자세를 참조하기 위한 참고 작품이라고 여긴 것이다.

단원 김홍도가 사신단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시기는 1789년이다.
이때 사녀도를 구해 왔다는 강부자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단원 김홍도가 정조대왕 앞에서 군선도를 창작한 때가 1776년이므로, 그 이전에 사녀도를 보고 모사한 것이다.

김홍도의 사녀도. 중국의 사녀도를 자신의 필치로 모사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군선도를 창작한 1776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습작을 통해 중국 신선의 의복이나 장신구 따위를 참조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사신단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시기는 1789년이므로, 이 당시 김홍도가 사녀도를 수입했다는 것은 소설적 상상뿐이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무튼, 신윤복이 기생을 단독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앞선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김홍도의 사녀도. 중국의 사녀도를 자신의 필치로 모사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군선도를 창작한 1776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습작을 통해 중국 신선의 의복이나 장신구 따위를 참조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사신단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시기는 1789년이므로, 이 당시 김홍도가 사녀도를 수입했다는 것은 소설적 상상뿐이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무튼, 신윤복이 기생을 단독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앞선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지금 조선은 변화의 길목에 서 있소. 청나라 것이면 곧 첨단이고 고급이며 기준이오.
청나라에서 여성을 단독으로 그렸다면, 조선에서 못 그릴 것이 뭐요?”

강부자의 말을 사실이었고, 혜원은 대꾸하지 못했다.

“내 환갑잔치가 6개월 남았소. 그동안 세상에 없었던 그림을 그려주시오.”

“하나만 더 여쭙니다. 조선에는 왕의 어진을 그렸던 훌륭한 화원이 많은데 하필 저를 부른 까닭이 무엇인지요?”

“도화가 혜원이 아니면 아니 된다고 하더이다.”

“음. 알겠습니다. 사생 하려면 도화라는 기생을 만나야 합니다.”

“만남을 주선하겠소. 단, 이 그림은 비밀로 해야 하오. 요즘 의금부에서 내 뒤를 캐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고, 행여 작은 꼬투리라도 트집 잡을까 조심스럽소.
내 전망 좋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근사한 방을 준비해 두었소. 일단 완성할 때까지 내 집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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