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지난 제13회 연재에서 기자(箕子) 동래(東來)의 허구성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에서 쟁점이 되는 한사군(漢四郡)과 이부(二府), 그리고 위만(衛滿)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후 출현한 『단기고사』와 『부도지』 최근에 출현한 『화랑세기』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8) 후기 고조선 멸망과 고구려 건국 사이의 여러 나라, 그리고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위만과 사군(한사군) 및 이부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쟁점이었다. 이를 두고 “민족적 시각으로 판단하느냐 사대적 시각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민족사학이냐? 식민사학이냐?”가 구별된다. 그만큼 민감하고 중대한 쟁점이다.
가, 위만, 사군, 이부
필자는 제13회 연재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조선시대 사대사학자들이 말하는 기자(箕子) 동래가 허구임을 주장하며, “오늘날에는 요동(遼東)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가 중국과 크게 다르고, 한(漢)나라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자동래설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중국의 기자와 고조선의 기자를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도 나온 바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현재는 민족사학계이든 강단사학계이든 기자의 동래를 부정하는 것은 남북역사학계 공통의 보편적 시각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단군조선의 멸망한 이후 기자조선이 아닌 후기조선이 나왔으며, 그 후기조선의 개국자(開國子)를 기자(箕子)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라는 관점이나 “중국의 기자와 조선의 기자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관점마저 형성하게 한다.
(1) 위만 조선의 정체성
위만(衛滿, BC 3세기 후기~BC 2세기 전기)은 누구인가? 그동안 학계에서는 그를 고조선계 유민이나 한인계(漢人系) 연인(燕人)으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 왔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위만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한 후, 자신의 벗이었던 노관(盧綰)을 전국 7웅의 하나였던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연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기록 때문에 위만이 노관의 부하 장수로 알려졌으나, 『사기』 「노관열전」에는 위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는 노관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로 보인다. 위만에 관해 기록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불과 수십 년 차이밖에 나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이 쓴 『사기』로 보아야 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위만이라고 알려졌지만, 『사기』에는 단지 이름 ‘만(滿)’뿐, 성씨 ‘위(衛)’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만은 후대에 중국학자들이 만왕을 중국계 유민으로 단정하고 동북지역에서 흔한 중국계 성씨인 ‘위(衛)’씨를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분석도 있다.
즉, 『인물한국사』 「위만(衛滿)」 항목에 의하면 “『사기』에는 조선의 왕 만(滿)은 옛 연나라 사람(故燕人也)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나라 초기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고, 옛 연나라가 멸망(B.C. 222)한 후 최소 20년 이상 1천명 이상의 세력을 거느리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동쪽 변경에서 세력을 키웠던 부족장 정도로 볼 수 있다. 그가 1천명의 부하들과 함께 북상투와 고조선의 복장을 하고 망명했다는 점은, 그가 본래 고조선 출신의 사람이었음을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그는 B.C. 3세기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1천리 땅을 빼앗았을 때, 연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후손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준왕에게 쉽게 신임을 얻고 왕위를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의 출신 때문이라 하겠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 일본의 정한론파 사학자들은 그가 중국 유민이라고 여기고, 위만조선을 중국의 식민정권이라고 하여 조선의 역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가 이민족 출신이라고 해도 그가 다스렸던 고조선이 다른 나라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만은 왕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고조선 역사를 단절시키지 않았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후 고조선을 흔히 위만조선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일 뿐, 그는 나라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고)조선이었으며, 수도 역시 왕검성(王險城) 그대로였다.
그가 임금이 된 것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있을 법하지만, 그는 큰 문제 없이 고조선을 안정시켰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중원 땅에서 온 수만 명의 망명객이 고조선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앞선 고조선 시기에 비해 이때 중원문화가 고조선에 일정하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이 중원의 망명객을 받아들인 것은 후기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이었고, 그것은 당시에 인구를 늘리고 국력을 키우기 위한 국가전략의 하나였다.
위만이 이들 망명객을 규합하여 권력을 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가 중원의 문물을 가져와서 고조선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준왕의 정책이 만든 기회를 잘 이용했을 뿐이었다. (참조 : 『인물한국사』 「위만(衛滿)」, 2011년)
지난 8월 5일 자에 독자이신 임찬경 박사께서 보내주신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2019. 한국학술정보) 1책이 도착하였고, 8월 25일에는 자신의 논문 「위만조선(衛滿朝鮮) 시기의 창해군(滄海郡)과 무제대(武帝臺) 위치 연구」 파일을 카톡으로 보내 주셨다. 임찬경 박사 “논문의 결론은 서기전 128년에 설치된 창해군은 한반도 혹은 그 인근 요동반도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창해군과 마찬가지로 위만조선도 한반도나 혹은 그 인근 요동반도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서기전 110년에 세워진 무제대는 현재 중국 창주(滄州) 동쪽에 있는데, 그 곳은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었던 지역의 일부라는 것이다”라는 매우 중요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위만에 대한 최근의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이른바 위만조선의 국가적 정체성은 허구이며, 그는 후기 고조선의 권력을 찬탈한 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 위만은 역사에 기록된 우리 민족 최고의 쿠데타 주모자로도 지적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사군의 실체와 의미
사군(四郡)은 한사군(漢四郡)을 말한다. 전한(前漢)의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네 개의 군급 행정구역이다. 사군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진번군이 폐지된 자리에 대방군이 세워졌기 때문에, 명칭으로는 총 5개 군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제의 정한론 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존재를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확대 해석하여 우리 민족의 고대사 인식을 왜곡하는 악영향을 끼쳐왔다.
① 낙랑군(樂浪郡) : BC108년 ~ AD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② 진번군(眞蕃郡) : BC108년 ~ BC82년. 토착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이 폐지되고 낙랑군에 편입되었고, 낙랑군 남부도위가 설치되었으나 3세기 초 한(韓)족 및 예족의 세력이 강해지고 삼한으로 망명하는 유랑민의 수가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낙랑군 남부도위에 해당하는 7개현을 독립시켜 진번군 자리에 대방군(帶方郡, 204년경~314년)을 재설치하였다. 낙랑과 함께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③ 현도군(玄菟郡) : BC107년 ~ AD404년. 창해군 자리에 설치되었다가 BC75년 고구려, 옥저 등 토착민의 저항을 받아 요동 근방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1세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무순(撫順) 지역으로 재이전되어 4세기 이후 모용선비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한사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하였다.
④ 임둔군(臨屯郡) : BC108년 ~ BC82년. 이후 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사군에 대하여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 현도 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요동설을 주장했고,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약천집(藥泉集)』 「패수(浿水)」조에서 “패수가 요동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하고, 답 이찰방 세구(答李祭訪 世龜)에서는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 땅에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중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라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조선시대의 학자군이 형성되었다. (참조 : 이덕일, 『한국 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⑩ 「조선 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을까?」)
또한 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나 위당 정인보 등등 제1기와 제2기 민족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부정하였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한나라 관계」를 다루며 “(중략)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선 역사상의 쟁점이다.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씨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지금의 개원(요령성 동북쪽) 이북은 당시에는 북부여 땅이었다. 지금의 흥경 동쪽은 고구려 땅이었다.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 땅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 땅이었다. 따라서 이 네 지역 밖에서 한사군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우리 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남과 북의 역사학계에서 활발해지면서 사군 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남측은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학설로 정리하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시대 실학자들과 단재 신채호의 관점에 따라, “평양의 낙랑 유적은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 최이(崔理)의 낙랑국의 유적으로 낙랑국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랴오닝성(요녕성) 지역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북에서는 평양 락랑구역의 고분 및 유물들이 모두 낙랑국의 것이라 한다. 낙랑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남북한 학계의 세부적 주장이 다르지만, 남측에서도 점차 북측 학계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3) 이부의 실체와 의미
『삼국유사(三國遺事)』 ‘이부(二府)’에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 BC82)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 (一然 註 :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 현토 임둔 낙랑 등 네 군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즉 ‘이부’는 사군의 후기 모습을 명칭만 달리 한 것이니 별로 의미가 없다.
나. 우산국
위에서 언급한 위만과 사군, 이부는 실체가 미약한 것을 침소봉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약하지만 실체가 확실한 해상국가가 있었으니, 동해상의 우산국(于山國)이다. 이제 우산국에 대하여 살펴보자. 필자가 여기서 우산국을 특별히 다룬 것은 독도(獨島)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1) 우산국
우산국(于山國)은 지금의 울릉도에 있었던 고대의 소국이다. 우산국의 존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6월에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서 실존 국가임이 확실시된다.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4에 의하면, 내물왕 4세손인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 현재의 강릉)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사부가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력(威力)으로는 오게 하기 어렵지만, 꾀를 쓰면 굴복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師子) 모형을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알리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맹수를 풀어서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 곧바로 항복하였다”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에 동해상의 소국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우산국이 있었던 울릉도에서도 여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있다. 즉 울릉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늦어도 청동기시대였던 것 같다. 언제라도 울릉도에서 선사유적과 유물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독도에도 선사유적이 있을 수 있다고 보며, 독도에 대한 고고학계의 정밀 탐사도 촉구한다. 독도는 우산국시대에도 무인도였을 것이며, 다만 어로(漁撈) 활동을 위하여 우산국인들이 들렸던 유적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심정적으로는 나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가 모두가 진본(珍本)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판단력은 이러한 나의 심정적인 소망을 거스른다. 이 책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고양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본질을 몽환적으로 왜곡하여 흔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책들로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1) 『단기고사』에 대하여
『단기고사(檀奇古史)』는 719년(무왕 1) 3월 3일 발해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탈고한 것으로 주장하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연대기이다.
원문은 발해문이었는데, 약 300년 뒤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며, 「저자의 말」과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단기고사』는 71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및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고 하지만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과 유응두의 등사본도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의 중간서(重刊序)와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가 부록되어 있으나, 이것이 진짜 서문인지 조차도 의심된다. 특히, 신채호가 『단기고사』를 단기(檀奇) 2000년사의 실사(實史)라 찬양하였다던가. 또한 출판인 김해암(金海菴) 이화사(李華史)의 출간경로(出刊經路)는 이 책을 한말에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롯하여, 마침내 광복 후기에 출판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며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해방후에 만들어진 주장으로 보인다. 정작 신채호나 이경직은 『단기고사』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1월 11일 경북대학교 김주현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는 ‘한국문학언어학회 동계학술발표대회’에서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 문제'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해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단재 신채호로 알려졌지만, 중간서의 내용·형식·문체 등을 고려할 때 신채호와 광복회 활동을 같이한 화사 이관구(華史 李觀求. 1885~1952)가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김 교수는 “중간서 마지막 부분에 글 쓴 시점을 임자중춘(壬子仲春, 1912년 음력 2월)으로 밝히고, ‘단기고사를 이 당시 중국 안동현에서 보았다’라고 적고 있으나, 단재는 1911년 12월 중순부터 1912년 5월5일까지 신문발간 사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1907년에 이경직이 썼다는 서문에 1909년에 단군교로 창교(創敎)하여 1910년에 이름을 바꾸어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大倧敎)’가 등장하며, 또한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쓰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大祚榮)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년~737년)는 ‘인안(仁安)’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이것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도 내용에는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의 근대에 등장한 용어를 사용하였고, 황당하게도 기구와 전화, 엑스레이와 잠수선, 비행기, 사진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필자는 이관구이던, 아니면 다른 누구이던, 『단기고사』는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김광의 『대동사강(大東史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해방 직후에 저술된 것으로 판단한다.
(2) 『부도지』에 대하여
『부도지(符都志)』는 삼국시대 신라학자 박제상(朴堤上)이 저술한 것으로 전하는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서라 주장되는 책이다. 박제상 사후에 박 씨 종가에서 필사되어 전해왔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 세조 이후에는 영해 박씨들이 숨어 살게 되면서 숨겨졌다가, 김시습이 저술한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 의해 원본 『징심록』과 그 속에 있던 『부도지』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현존하는 『부도지』는 1953년 울산에 있던 영해 박씨 55세손인 박금(朴錦, 1895~?, 본명 박재익)의 복원본을 말한다. 박금에 의하면, 해방 후 월남할 때 여러 대에 걸쳐 전수받은 원본을 함경남도 문천에 놓고 왔고, 분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원본에 가깝게 남한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이리도 이유립의 『환단고기』의 경우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지‥‥‥, 박재익의 『부도지』를 이유립의 『환단고기』로 표절한 것은 아닐까?
1984~5년쯤의 일이다. 당시 ‘한국고서동우회’의 연락처인 공평동 ‘한국출판판매(주)’의 고서부(古書部)에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찾아와서 “『부도지(符都志)』가 나오면 매수하겠다”라고 말하였다며, 부탁을 받은 직원이 그 책에 대하여 내게 물어 온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부도지』를 본 적이 있는데, 목활자본으로 채 열 장이 되지 않는 책”이라고 답변하며 매우 희소하여 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부도지』가 1986년에 번역본이 나와 공급되었디. 문제는 내가 본 『부도지』는 번역되어 나온 『부도지』와는 전혀 다른 책이라는 점이다. 원래 『부도지』라는 고서는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마고에 대한 책이 아니라, 도참(圖讖) 서적(書籍)으로 기억하고 있다. 즉 지금의 『부도지』는 이름만 빌려 온 것이다.
(3) 드러나는 『화랑세기』의 실체
신라 진골 출신의 귀족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郎世記)』란 제호의 저술을 남김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신라의 왕호에서부터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으나 그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디. 그런데 1989년 2월에 박창화가 남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발췌본, 32면)을 서울신문이 공개하였고, 6년 뒤 1995년 4월에는 일본 궁내성 용지에 필사되어 있는, 그 전 발췌본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의 필사본(162면)이 공개되었다. 이 필사본은 일제하인 1933∼44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황실 도서관)에서 조선전고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 소장본을 필사한 것으로 성급하게 추정(推定)하였다.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僞書)가 아닌 진본(珍本)이라는 주장도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냐 소설이냐는 박창화의 유고(遺稿)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결론이 날 것이고, 그러한 전체를 보고 판단하는 연구를 역사학계 일각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즉, 2007년 12월 13일 오후 5시 동국대 문화관에서 개최된 ‘동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동국대학교 겸임교수인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를 비교하는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수」를 발표하였다. 그 발표애서 박남수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진 시기(1930, 40년대)보다 앞선 1930년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흡사한 45쪽의 소설책(가칭 ‘소설 화랑세기’)과 이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가 ‘소설 화랑세기’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됐고 비슷한 내용도 다수 발견됐다”라며 “이에 비춰보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소설 화랑세기’처럼 화랑을 다룬 박창화의 역사소설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마. 맺음말
우산국은 동해상에 있었던 실존적인 국가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이라든가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는 제각각이다. 특히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하나의 작은 성읍(城邑)을 황당하게 국가 규모로 침소봉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위만에 대한 민족사관적 관점은 위만은 원래 고조선 사람이므로 조선이라는 국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그가 다스리던 위만조선은 평양이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었다. 또한 한사군은 그리 강력한 군(郡)이 아니었고,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도 요동지역에 있었고, 평양의 낙랑 유적은 최이의 낙랑국(樂浪國) 유적이다.
나는 1959년 한글 번역본 『단기고사』를 1978년경에 통문관에서 구입하였고, 『화랑세기』는 1999년에 출판된 이정욱 역주해본과 2002년에 출판된 김태식 본을 가지고 있다. 『화랑세기』는 『단기고사』나 『부도지』, 『환단고기』보다도 진위서(眞僞書) 논쟁이 더 치열하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냐는 소설이냐는 것은 박창화의 유고(遺稿)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결론이 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진서라 보기에는 허점이 많다.
『단기고사』나 『부도지』, 『환단고기』, 『화랑세기』의 공통점은 모두 해방후에 나왔고, 모두 필사본의 형태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부도지』와 『환단고기』는 잃어버린 책으로 그 내용 기억을 되살려 재구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자신들이 지어냈다는 말을 실토하는 수식어(修飾語)로서, 위서를 진서로 주장하는 한 반복적인 패턴(pattern)이 되었다.
필자는 심정적으로는 이 책들을 모두가 진본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판단력은 심정적인 소망을 거스른다. 이 책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고양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본질을 몽환적으로 왜곡하여 흔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책들이라고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러한 책들에 현혹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웃음꺼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매우 심각한 일이다.
제가 9월 15일경부터 30일까지 국혼의 재발견에서 소개한 역사 자료 일부와 독립운동가 자료 및 관련 미술품 100여 점을 엄선하여 전시를 하려 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하는 본 연재의 원고를 작성하느라 그 준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시 준비를 위하여 『국혼의 재발견』 연재는 두 주일 정도 순연해 9월 20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백민 이양재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