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1948년 8월과 9월에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남측의 수구친일친미세력과 북측의 공산혁명세력은 남북 상호 간의 강한 대립으로 각자 정부의 권력과 안정을 도모하고 유지하여 나갔다.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줄달음을 쳐 다가간 정부라면, 이후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부는 민족의 이질성을 재확보하기 위하여 남과 북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줄달음을 쳐 달아난 정부이다. 독자들도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아니하는가?

2.

미처 몰랐는데, 미처 인지하지 못했는데, 요즘 인터넷 일부 새소식(뉴스)을 보니 북을 국가로 인정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 같다. 남과 북이 UN에 버젓이 각기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는데, 국제적 기준으로는 분명 별개의 국가인데, 국내법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재외국민인 내가 너무 앞으로 나가며 통일문화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일까? 나의 형제와 타계하신 부모는 외국 국적이지만 나는 민족주의자이기에 의도적으로 한국 국적을 포기한 일이 없다. 나는 언행이 자유롭다. 그 자유로운 언행을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중단하여야 하는가?

이제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해외여행이 다시 활성화하면 노년에 들어간 나는 다시 해외로 나가야겠다. 오래전 나는 해외의 한 지인에게 우리가 나이 들어 노년이 되면 대서양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자고 했었지만, 그 지인도 이미 수년 전에 타계하였다.

3.

나는 진보가 아니다. 나는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을 지키려는 진짜 보수주의자이다. 말로만 진보(進步)가 아니라 참 진보(眞保)이다. 나는 요즘 슬픔에 잠겨 산다. 지금 남북의 각 정부는 적대적 공존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7.4공동성명은 정치적 목적이든 무슨 목적에서든 박정희 정부가 내놓았고,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실천하였으며, 김영삼 정부는 첫 통일부 장관에 진보주의학자 한완상을 임명하였다. 반면에 김대중 정부는 첫 통일부 장관에 수구파 강인덕을 임명하였다.

나는 윤석열 정부가 첫 통일부 장관에 진보주의자를 임명하기를 바랐다. 민주나 진보 보다는 수구나 보수가 남북관계를 개선하면 민족정책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못하는 현 정부를 보면 슬프다.

4.

남북은 적대적 공존이 아니라 상생적 공존을 추구하여야 한다. 국제적으로는 두 개의 나라로 외교를 하고 교역 및 교류를 하는데, 국내에서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제사회에서의 이율배반이다. 이제 국보법이라는 녹슨 칼은 박물관으로나 보내자. 잘 들지도 않는 녹슨 칼을 휘두른다면 민주사회가 고통스러울 뿐이다.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공존은 미루더라도 문화적 공존과 자연환경적 공존은 상생적 공존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평화 공존이고 문화 공존이며 민족 공존이다.

정치논리에서의 적대적 공존을 문화 및 경제계 등의 국민에게는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윤석열 정부, 실패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 이제라도 민족정도(民族正道)로,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대통령직은 피난처 소도(蘇塗)가 아니다.

5.

남북관계는 외교부가 아니라 통일부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남북 간의 문제를 민족 내부의 문제로 진정 인식한다면 말이다.

남북관계를 외교부가 주도한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북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과거의 민주정부가 남북이 별개의 국가라는 명제에서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민족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여 통일부가 남북문제를 주도하도록 하였다.

윤석열 정부는 북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외교부를 통하여 국가 간의 문제로 끌고 나가려 한다. 물론 민족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수구가 갖는 국내정치에서의 이율배반이다.

나는 다시금 강조하여 말한다. 남북은 적대적 문화 공존이 아니라 상생적 문화 공존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것이 민족과 국가가 생존하는 정도(正道)이다.

『근역강산 맹호기상』, 김지도, 1909년경. 사진Ⓒ2022.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그림은 1908년 당시 평양의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지도가 『소년』 잡지 창간호에 실린 그림에 자극을 받아 1년 동안 궁리한 끝에 1909년에 평양에서 그렸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는 대륙을 향는 호랑이의 허리를 졸라 묶은 형세가 되었으니 대륙을 향한 포효가 불가능하다.해 포효하
『근역강산 맹호기상』, 김지도, 1909년경. 사진Ⓒ2022.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그림은 1908년 당시 평양의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지도가 『소년』 잡지 창간호에 실린 그림에 자극을 받아 1년 동안 궁리한 끝에 1909년에 평양에서 그렸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허리를 졸라 묶은 형세가 되었으니 대륙을 향한 포효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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