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으로만 떠돌던 신윤복의 [미인도]가 드디어 실물을 드러냈다.
장황(裝潢, 표구)을 하기 위해 광통교 서화사로 보내진 것이다.
소문을 들은 몇몇 화상들이 장황을 맡은 배첩장을 찾아왔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 경이었다.
“점심이나 먹고 와도 될 것을. 왜 이리 서둘러 왔는가.”
배첩장이 하던 일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말한다.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해가 중천에 뜨기 바로 전인 이 시간대가 제일 좋네. 정신도 말짱하고.”
“그림을 보기 전에 물어볼 말이 있네. 이 그림을 누가 주문한 건가?”
[미인도]는 신윤복이 도화서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다.
전통 초상화 방식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고, 무엇보다 국가 미술기관에서 기생을 공식적으로 그릴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신윤복에게 주문을 넣은 것이다.
화원 가문 출신인 신윤복에게 그림 주문을 넣을 정도면 한양에서 큰 부자여야 한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을 안다면, 그림 속 기생의 정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네. 알아도 말 못 하네. 종복 몇 명이 그림을 꽁꽁 싸매고 왔네. 어느 집안에서 주문했는지는 함구하라고 신신당부하는데, 거의 협박에 가깝더군.
벌벌 떨면서 그림을 받았네. 내가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묻지 말아 주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지만, 할 수 없지. 어서 그림이나 보여주게나.”
배첩장은 [미인도]를 펼쳤다.
누웠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는 것처럼 생생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났다.
세필로 촘촘하게 그린 트레머리는 윤이 났고, 가늘고 여린 선으로 그린 얼굴, 귀밑으로 이어지는 목덜미 선은 마치 봄바람이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살짝 내리깔아 사물을 보는 건지, 꿈을 꾸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눈동자와 살짝 다문 붉은 입술에는 애잔함이 서려 있다.
구슬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손에는 알 수 없는 머뭇거림이 보이고,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회청색 주름치마 속에는 가늠하지 못하는 생명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이렇게 큰 여인상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네.”
[미인도] 속 여인의 키는 대략 150cm 전후로 추정하는데, 그림이 주는 확장성을 고려한다면 실물 크기로 느껴질 것이다.
실제 [미인도]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유명 선비나 공신의 초상화와 비교했을 때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다.
[미인도]는 114.2*45.7cm인데, 비슷한 자세의 [서직수초상] 크기가 148.8cm*71cm이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초상은 155.5*81.9cm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그림의 정체가 알쏭달쏭하네. 여인 한 명만 단독으로 그리고 배경도 없으니 초상화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혜원이 잘 그렸던 풍속화로 보아야 하나. 거참...”
“초상화나 풍속화로는 규정할 수 없다네. 그냥 조선 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 것이네.”
미인도(美人圖)라는 명칭은 후세 사람들이 지은 것이다.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표현한 그림으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밀로스의 비너스, 비너스의 탄생, 여신, 모나리자, 성모 마리아, 무당집의 선녀, 심지어는 미국의 마릴린 먼로나 바비인형도 미인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비, 왕후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왕비나 왕후의 초상화는 없다.
대신 의녀(義女)의 초상화는 제법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고, 일부는 전한다.
임진왜란 때 적장을 껴안고 죽은 진주 기생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 18세기 초 경종 대에 이루어졌다.
1739년 논개의 사적비와 ‘의기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당연히 사당에는 논개의 초상화가 봉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상화는 전하지 않는다. 최근에 새로 그려 봉안했다.
논개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평양 기생 계월향의 초상화도 전한다.
1815년. 지방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계월향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의 초상을 그리고자 한 사건이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전문을 소개한다.
[1695년 7월 27일 숙종이 전(前) 응교(應敎) 김진규(金鎭圭)에게 명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인 중전(中殿)의 영자(影子)를 그리게 하니,
여러 신(臣)이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다가 우의정(右議政) 신익상(申翼相)이 상차(上箚)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여서야 곧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숙종이 하교하기를 “내간(內間)에 영자를 그릴 일이 있으나 여기는 중관화사(中官畫師)가 입참(入參)할 곳이 아니니 종신(宗臣)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전 응교 김진규에게 궁궐(宮闕) 안에 출입하는 일로 해 조(曹)에 말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조종조에 왕후(王后)의 영정(影幀)을 대내(大內)에 간직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반드시 여인의 그림 잘 그리는 자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종척(宗戚)의 신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중전(中殿)의 영자에 뜻이 있어 여러 가지로 종반(宗班)을 찾아 물었으나 한 사람도 없었다.
임창군에게 전 응교 김진규와 함께 궁궐 안에 출입하여 큰일을 완성(完成)케 하라.” 하였다.]
숙종은 ‘조종조에 황후의 영정을 대내에 간직한 일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왕후의 영정을 그려 궁궐에 보관했다는 말이다.
또한 ‘중관화사(中官畫師)가 입참할 곳이 아니니’라는 말은, 중관화사는 도화서 화원을 말하는데, 어진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도화서 화원들에게는 왕후의 초상을 맡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홍문관 응교 관직을 지낸 선비 화가 김진규에게 왕후의 초상을 그리라고 명했지만 듣지 않았고, 이후 왕후의 종친인 임창군에게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왕의 어진은 그렸지만, 부인인 왕비의 초상화는 그릴 수 없었다.
이를 남성 중심의 사회, 여성차별 따위의 관점으로 볼 것은 아니다.
논개와 계월향 같은 천민 여성의 초상화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개와 계월향의 초상화와 왕비의 초상화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조선 시대는 초상화에 대해 엄격했다.
초상화는 왕이나 공신, 의기(義技)나 의녀(義女) 외에는 그릴 수 없었다. 강제적 규정은 없지만 불문율이었다.
미술작품은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루던 시대부터 숭배성과 주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나 전설은 그림으로 그려져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신성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고 숭배했다.
특히 인물을 그리면 곧바로 신격화되거나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을 믿지 않고 귀신조차 없었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어진이나 공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사회적 공로와 가치를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공공의 가치를 역사적 기록처럼 초상화에 담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이는 성문이나 국가적 행사에 초상화를 걸거나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종묘나 사당에 봉안했고 평소에는 문을 꼭꼭 걸어 두었다.
왕의 어진이나 공신 초상화를 본 백성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신하들이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거부한 것은 복잡한 정치적 사연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현왕후가 특별한 사회적 공로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혜원 신윤복이 왕비, 의기나 의녀도 아닌 평범한 기생을 그린 이유는 뭘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