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나의 20대는 민족사학에 매료되어 민족사관의 사표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청년시절에는 홍익인간의 구현자로 의성(醫聖) 허준(許浚, 1539~1615)에 매료되어 실전된 그의 묘소를 찾아 성역화하도록 하였고, 그의 고향이라든가 생년 등 왜곡된 많은 부분을 바로잡았다. 이후 장년시절에는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이하 열사 생략)를 규명하러 천지사방을 헤집고 다녔고, 그 결과 이준의 사인(死因) 등 왜곡된 여러 부분을 바로잡았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내가 이 연재물의 큰 제목을 ‘국혼(國魂)의 재발견’이라 정한 것은 이준의 저술로 전하는 『한국혼의 부활론』에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혼의 재발견’은 이준의 『한국혼의 부활론』을 되살리기 위한 나의 작업이다. 결국 내가 지금 ‘국혼의 재발견’을 쓰고 연재하는 것은, 20대에 매료되었던 민족사관의 관점에서 지난 40여 년간 축적한 서지학과 회화사적 안목을 내어놓는 나의 운명과도 같은 정리 작업이다.

그런데 이번 7월 14일(목)은 이준의 115주 기일이다. 이에 이번에는 이준의 115주기에 앞서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저술로 알려진 『한국혼의 부활론』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글은 제1회 연재에서 한 “이준(李儁) 열사는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연재를 계속하며 언급하고자 한다”라는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것이 된다.

(20) 민족정신을 주창한 이준의 『한국혼의 부활론』

이준이 『한국혼의 부활론』을 저술한 시점은 대한제국 시기이고, 당시 국내외에서는 대한제국을 한국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책의 원제가 『조국혼의 부활론』일 수도 있다. 본문의 곳곳에서는 한국혼(韓國魂)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또한 끝부분에서는 조국혼(祖國魂)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해아밀사(海牙密使)』, 유자후, 1948년 9월 25일, ‘일성이준선생기념사업협회’ 발행. 「한국혼의 부활론」은 이 책의 119쪽에서부터 132쪽까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현재 널리 알려진 문장과는 크게 다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해아밀사(海牙密使)』, 유자후, 1948년 9월 25일, ‘일성이준선생기념사업협회’ 발행. 「한국혼의 부활론」은 이 책의 119쪽에서부터 132쪽까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현재 널리 알려진 문장과는 크게 다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왜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일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1948년 9월 25일자로 발행한 유자후(柳子厚, 1895~1950)의 『해아밀사(海牙密使)』에서 찾는다. 1948년 8월 15일, 이남에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 이북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국혼이란 단어를 한국혼으로 바꾸었고, 그 과정에서 뒷부분의 일부는 고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책의 서명을 『한국혼의 부활론』이라 하든, 이를 바꾸어 『조국혼의 부활론』이라 하든, 책의 원제목이 어떻든 간에 이준이 생각한 국혼은 제국주의의 제국혼(帝國魂)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민족혼(民族魂)을 의미한다. 공화주의자로 알려진 이준이 망조(亡兆) 든, 망해가는 황제국(皇帝國) 대한제국의 부활론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정신의 부활을 말한 것이다. 우리의 민족정신이 부활하여야 망해가는 나라가 민중의 나라로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 「한국혼의 부활론」 저술 시점과 전승

이준의 저술 『한국혼의 부활론』은 1907년 4월 22일 아침에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기 위하여 서울 종로구 안현에 살던 집을 나서면서 부인 이일정(李一貞)에게 넘겨준 원고이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이준의 말년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어, 늦어도 1907년 4월 20일쯤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준의 외증손자로서 현재 유족대표로 있는 조근송(67세)은, 부친에게 듣기를 이 원고는 “이준의 둘째 딸 이종숙이 간직하여 왔는데, 두루마리 본(縮本)으로 되어 있었고, 또 한적(韓籍)으로 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원고본은 두루마리 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적은 그 “사본일 것”으로 말하며, “두 책 모두 붓으로 써 내려갔다”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필자가 보기에는 두루마리 본은 초고(草稿)이고, 한적 본은 재초본(再草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자료를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자 기념사업회에서 보관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라고 말한다.

1907년 4월에 저술된 이후, 이 책은 1945년 8월까지 38년간 비장(秘藏)되어 오다가 해방과 더불어 빛을 보게 된다. 지금 이 책의 원본이 남아 있다면 3.1 「독립선언서」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사료 원본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해방된 조국의 하늘 아래에서 어느 시기엔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준은 당 시대에 명연설가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이를 보면, 그가 이 원고를 1907년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썼다고 해도, 평소에 가졌던 생각을 정리한 것임이 틀림없다.

(나) 「한국혼의 부활론」의 문체

『한국혼의 부활론』을 읽어 보면, 이 글은 대중을 상대로 한 구구절절한 연설문체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에서 이천만 민족 동포에게 민족혼의 부활을 호소하는 이준의 유언으로서의 비장함을 느낀다.

이준은 “우리 민족이 죽기를 한하고 나가는 길이야 뉘라서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겠는가. 이렇게 죽기를 맹세한 정신으로 우리가 뭉치면 비단 우리나라의 갱생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공존영생(共存永生), 나아가서는 세계의 협화공존(協和共存)에 이바지하는 도의의 광채가 진실로 큰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죽기를 기를 쓰고 나가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이준의 이 부르짖음은 오늘 날에도 해당한다. 지금 우리 민족은 죽기를 한하고 나가는 길, 이렇게 죽기를 맹세한 정신으로 우리 민족은 뭉쳐야 한다. ‘한국혼의 부활론’을 현대에 되살려야 할 당위성이 현재의 국내외 정세에 있다.

(다) 『한국혼의 부활론』의 시대사적 의미

이 책은 역사책은 아니다. 그러나 해당 시대 지식인들의 생각과 동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찬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1903년 편찬 시작에서부터 1908년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5년간은 우리 민족의 모든 문헌을 집대성하고 해석을 하던 시대였고, 또한 이 시기는 모화사대성(慕華事大性)을 탈피하여 민족자주성을 강조하던 계몽기이다.

이준의 이 저술에서 국혼, 즉 민족혼의 부활을 이야기한다는 것, 즉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기묘한 계교와 신기한 방책”, “안시성주市城主) 양만춘 장군의 화살”,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거만한 것을 꺾”은 것, “고려 윤관”, “서희의 담력”, “강감찬의 장략(壯略)”, “발해 태조 대조영의 웅도(雄圖)”, “조선의 이순신 장군 거북배” 등등에 국혼이 나타나 우리의 역사를 천추에 빛내게 한 것을 들먹이며 우리 국혼의 부활을 역설하는 것은, 그 시대 애국적 계몽가들의 보편적인 행동이다. 이것은 이준이 1904년 9월에 조직한 ‘대한국민교육회’의 목적과도 상통한다.

‘대한국민교육회’의 목적은 ①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②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을 편찬 혹은 번역하여 간포(刊佈)하며, ③ 본국사기(本國史記)와 지지(地誌), 고금(古今)의 명인 전적을 모집, 광포(廣佈)하여 국민의 애국심을 고동(鼓動)하고 원기를 배양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한국민교육회’는 “민족혼의 부활”을 위한 목적이었다.

『신찬소박물학』, 1906년, 국민교육회가 저작하여 발행한 대한제국시기의 교과서이다. 국민교육회는 1906년 당시에 ‘황성 중서동구 돈화문외 내변 96통 7호’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찬소박물학』, 1906년, 국민교육회가 저작하여 발행한 대한제국시기의 교과서이다. 국민교육회는 1906년 당시에 ‘황성 중서동구 돈화문외 내변 96통 7호’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후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 되자, ‘대한국민교육회’ 회원들은 이에 항거하는 가두집회를 서울에서 가졌고, 교육회가 어려움에 부닥치자 공수학교(工數學校) 설립에 참여한 바 있는 이용태(李容泰)가 1천 원을 기부하였으나, 교육회는 1907년 11월에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방식으로 하여 그 업무가 1907년 11월 30일에 발기한 흥사단이 12월 중순쯤 통합한다.

이러한 이 계몽기에 나철(羅喆, 1863~1916)은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 하며, 대종교는 단군 중심의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을 양성하고 발전시킨다. 이러한 나철과 이준의 동지적 인연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나철(나인영)은 이준이 조직한 헌정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을사오적을 모살(謀殺)하려다 체포되어 복역 중이던 나철과 오기호 등등을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이준이 은사(恩赦)에 포함했다가 실패하여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나철과 이준은 동지였다. 어느 면에서 보면 이준의 국혼의 부활론은 나철이 대종교의 중광으로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같은 길을 가는 동지란, 같은 일을 함께 만들고 함께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 동지적 관계에서 논공행상의 크기를 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라) 『한국혼의 부활론』 소개

『이준선생전』, 유자후, 1947년, 동방문화사 발행. 이준열사의 첫 전기이다. 저자 유자후는 이준의 둘째 사위로서 일제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약하였던 유명한 경제사학자이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화폐고』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선생전』, 유자후, 1947년, 동방문화사 발행. 이준열사의 첫 전기이다. 저자 유자후는 이준의 둘째 사위로서 일제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약하였던 유명한 경제사학자이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화폐고』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의 『한국혼의 부활론』은 그의 첫 번째 전기라 할 수 있는 유자후(柳子厚, 1895~1950)의 『이준열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유자후의 저서로 1948년 9월 25일자로 발행한 『해아밀사(海牙密使)』의 119쪽에서부터 132쪽까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현재 널리 알려진 문장과는 크게 다르다. 현재 널리 알려진 문장은 이준의 원저(原著) 원문(原文)을 이선준(李善俊)이 현대문으로 쉽게 읽도록 고친 것이다.

『일성 이준 열사』, 이선준, 1973년(적색 표지), 1994년(그림 표지). 이선준은 유자후 이래(以來) 이준 열사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일성 이준 열사』, 이선준, 1973년(적색 표지), 1994년(그림 표지). 이선준은 유자후 이래(以來) 이준 열사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의 원저 원문은 차후에 다른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편의상 이선준이 현대문으로 고친 것을 기승전결의 네 분단으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필자가 네 분단으로 나눈 부분은 이선준이 네 분단으로 나눈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기(起) : 우리 한국혼을 불러내야 하겠다

“인간이 ‘살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이며, ‘죽었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모름지기 혼이 있는 때를 ‘살았다’ 말하고 혼이 떠난 때를 ‘죽었다’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가 흥하고 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친 것이며, 성하고 쇠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백성이 나라를 위하는 정신이 있는 때는 흥하고 성하는 것이요. 그 정신이 없는 때는 망하고 쇠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영혼이 한 번 간다하면 어떠한 명의가 있다할지라도 다시 살릴 재주가 없을 것이요. 만일 나라로서 정신이 한 번 흩어진다 하면 어떠한 큰 정치가가 있다 할지라도 바로 잡을 방책이 없을 것이다.

이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하자. 그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 것이요, 그를 위하던 아내는 그 남편 앞에 엎드려 통곡할 것이며, 그에게 의탁하던 아들과 딸은 그 아버지를 부르며 몸부림을 칠 것이요, 그 친한 벗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정이 간절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부모, 그 아내, 그 자녀, 그 벗들의 지극한 정리와 정성을 만일 천지가 눈이 있어 능히 보고, 만일 귀신이 있어 능히 듣는다 하면 분명코 감동됨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마음이랴. 그러나 그는 명명유유(冥冥幽幽)한 속에 영원히, 영원히 길이 잠이 들어 깨어날 줄을 모른다. 그 얼마나 무정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무정한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혼이 무정한 탓이다.

가령 여기에 허수아비를 가져다 두고 아침마다 일깨우며 “너는 말하여 보라, 너는 말하여 보라” 하면 그 허수아비가 능히 말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여기에 우상을 가져다 두고 저녁마다 충동질 하며 “너는 달려 보아라, 너는 달려 보아라” 말한들 그 우상이 능히 달릴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모두 안 될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설령 ‘죽었다’ 할지라도 본래부터 우상이나 허수아비는 아닌 이상 아직도 혼의 자취가 아주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면 슬픈 울음과 애끊는 소리에 다시 머리를 들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도 본시 우상도 아니오 허수아비도 아닌 이상 설사 참혹한 액운에 빠졌다 할지라도, 어찌 다시 솟아날 수가 없으랴.

아! 나의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이여!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모두 안다할진대 다행이려니와 만일 모른다 하면 어찌하여 감각이 그다지도 둔하단 말인가. 여기에서 나는 비록 그 길이가 세 치에 지나지 못하는 혀(舌)끝만은 온 나라를 향하여 큰 소리로써 우리 한국혼을 불러야 하겠다. 반드시 불러내야 하겠다. 동쪽을 향해서도 우리의 한국혼을 부르고 서쪽을 향해서도 우리의 한국혼을 부르며, 남쪽을 향해서도 우리의 한국혼을 불러내고, 북쪽을 향해서도 우리의 한국혼을 불러내야 하겠다.”

2. 승(承) : 한국혼이여! 지금 너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한국혼이여! 한국혼이여! 반만년 동안에 금수강산으로 집을 삼고, 이천만 민족으로써 식구를 삼아 엄연한 독립의 나라로서 서로 전하여 감히 강한 나라가 업수이여기려는 것을 용납치 않고서 살아오지 아니하였는가.

너는 일찍이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기묘한 계교와 신기한 방책으로 나타나 수(隨)나라 양제(煬帝)의 백만 대군을 깨뜨렸고,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장군의 화살에 나타나 당(唐) 나라 태종의 눈을 맞혀 꿰뚫었으며, 혹은 신라의 장성(長星)이란 칭호가 있는 김유신 장군의 보검(寶劍)에 나타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거만한 것을 꺾었고, 혹은 고려 윤관(尹瓘)의 말에 나타나 만주(滿洲) 뜰을 휩쓸었으며, 혹은 서희(徐熙)의 담력에 나타나 여진을 몰아내었고 혹은 강감찬의 장략(壯略)에 나타나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을 내몰았으며, 혹은 발해 태조 대조영의 웅도(雄圖)에 나타나 당나라를 대항케 하였고, 혹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 거북배에 나타나 왜적을 때려 물리쳐 우리의 역사를 천추에 빛내게 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렇게 거룩한 한국혼이여! 이렇게 웅장한 한국혼이여! 네가 오늘 어디서 잠이 들고 있는가? 노쇠(老衰)한, 탓인가 멸패한 탓인가. 장차 파란(波蘭)의 복철(覆轍)을 밟으려하는가. 인도의 전감(前鑑)을 보지 못하는가. 노년(老年) 이태리(伊太利)와 같이 장차 갱소년이 되는 날을 맞이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북미 신대륙과 같이 두 번째로 건설이 되려는 때를 맞이하려 하는가. 천년이나 오래 잠이 든 사자가 과연 깨어날 기회를 맞이하려 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장경성(長庚星)이 과연 다시 비치려는 운수를 가져오려 하는가.

한국혼이여! 한국혼이여! 네가 그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 등 사색편당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는가. 네가 그 시(詩)와 부(賦)와 표(表)와 책(策)을 읊조리기에 흩어지고 말았는가. 네가 그 벼슬의 공명심 때문에 부서지고 말았는가. 네가 그 머뭇, 머뭇이 지내는 통에 파묻히고 말았는가.

한국혼이여! 한국혼이여! 네가 하늘 위에 있는가. 네가 땅 아래에 있는가. 네가 어느 관청이나 어느 마을에 있는가. 네가 어느 당(黨)이나 어느 회(會)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기운이 빠진 늙은이 축에 끼었는가. 어리고 젊은 청년 틈에 섞이어 있는가.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어 깨이려 하는가. 저 옛날 이태리(伊太利)의 혼이 일찍부터 무덤 속에 파묻히어 몇 천 년 동안 끙끙거리고 있다가 별안간 청년 이태리에 뛰어 맛치니(瑪志爾)가 생기고, 가리발디가 났으며, 카부르(加富伊)가 점지되어 옛날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였고, 또한 옛날 혁명군의 단독 힘으로 프러시아, 오지리 등 동맹국에 대항하여 백번 싸워도 굽히지 아니한 것은 불란서의 혼이요, 십삼주(十三洲) 땅으로써 새로 나라를 세우고 영국의 백만 대군과 싸워 팔년 만에 성공한 것은 미국의 혼이며, 저 조그마한 몇몇 개의 섬으로써 바다의 패권을 잡고 있는 것은 영국의 혼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 소위 삼세상(三世相)이 있어서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고 혼이 없이 그 나라를 잘 만들었다는 것은 일찍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장차로도 들어보지 못할 것이다.

한국혼이여! 한국혼이여! 지금 너는 어느 곳에 있는가! 몇 몇 천년 동안 대대로 전해 온 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는가. 이천만이 다 같이 하늘에서 받은 혼이어늘 하룻밤에 흩어졌는가. 아무리 불러도 막막히 움직이지 않고, 냉냉히 온기가 없이 한 끝의 신경도 까마득히 감각되는 조짐이 보이지 아니함은 유감된 일이란 것보다 통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국혼이여! 한국혼이여! 반만년 내려오는 중간에 공포의 역사가 무릇 몇 번이었던가. 장차 쌓이고 쌓인 모닥불이 일어나도 가의(賈誼)와 같이 올 줄을 모르며, 한밤중에 닭이 울어도 조적(祖狄)과 같이 일어나 춤출 줄 모르고, 필경 우리나라로 하여금 슬픈 지경에 빠지게 하였음은 무슨 일인가. 여기에 이르러도 네가 오히려 부끄럽지 않으며 여기에 이르러도 네가 오히려 두렵지 않는가.”

“슬프다! 오백년 동안 문을 닫고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알며, 해가 나면 낮이요, 달이 뜨면 밤인 줄만 알았고, 밭을 갈아 먹을 것을 얻고 우물을 파서 마실 물이 생기면 강구연월(康衢烟月)의 세상인 것을 노래하며, 책상 위에 놓인 역사책은 다만 통감강목(通鑑網目) 등 몇 권이요 그 희망하는 바는 다만 진사급제 한 가지 뿐이요 일생의 사업이란 것은 벼슬하고 부자가 되겠다는 것뿐이다.

또한 그 듣고 본 것이란 것은 돌구멍(城內) 안에 그쳤고, 그 사색(思索)이란 방 안에 잠기어 아무런 찔림도 없고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그대로 아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이 살아 왔을 뿐이었던가. 그렇다. 이에 만일 네가 모른다 하면 책망할 길 없겠다. 그러나 임진의 왜란이며 병자의 호란(胡亂)을 네가 어찌 머리를 돌이켜 보지 못하며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사건(辛未事件)을 네가 어찌 귀를 기울여 듣지 못하였으며, 병자통상(丙子通商)과 임오군란(壬午軍亂)에 네가 어디 있었으며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는 네가 어디로 갔던가.

3. 전(轉) : 너는 모름지기 단결하며 헤어지지 말지어다.

모름지기 팔도강산이 물 끓듯이 움직이게 된 그 급하고 위태한 형세가 이웃나라의 못된 비평을 빗발같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오히려 주저하던 그 버릇이 여전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던 그 버릇이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웬 일인가.

서울에 있는 관원들은 주사(主事)와 의관(議官)의 갑을 따지고, 시골의 선비들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며, 화(華)와 이(夷)가 다르다는 것만 논란하고, 정계의 파란은 와각(蝸角)의 투쟁이 쉴 새 없고, 지방의 정상은 생령(生靈)의 비명이 그칠 새 없음은 이것이 웬일이랴. 그래도 산정(山亭), 수각(水閣)에는 승평재상들이 편히 눕기만 일삼고, 은익한 현실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남아(憂國男兒)가 끊어지려 하니 이것이 무슨 대상의 현실이냐.

이렇게 저렇게 하는 동안 세계 지구의(地球儀) 가운데서 우리 한국의 한자리의 옛 자취를 잃어버리게 되니 참으로 슬프다. 우리 한국의 혼이여! 너는 조국의 부끄럼을 잊어버리고 말려는가.

지난 일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다. 다만 눈물이 펑펑 흐르고 슬픔이 용솟음 칠 뿐이다. 그러나 오는 일에 대하여는 오히려 될 만한 성질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어찌하여 장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용맹스럽게 살피지 아니하는가. 우리의 혼이 한 번 또 한 번 빼어났다 하면 자유도 될 수 있고 독립도 될 수 있는 것이다.

(1) 한국의 혼이여! 너는 독립의 혼이 되고 노예(奴隸)의 혼이 되지 말라!
(2) 한국의 혼이여! 너는 자유의 혼이 되고 견마(犬馬)의 혼이 되지 말라!
(3) 한국 혼이여! 지금 너는 새는 배(船) 가운데 있다. 닻줄과 노(櫓)를 놓지 말지어다. 한 번 마음을 놓으면 풍랑(風浪)이 두렵다.
(4) 한국혼이여! 지금 너는 험한 비탈에 있다. 조심하여 헛디디지 말지어다. 한 번 실족하면 땅에 깔린 가시 덤불이 두렵다.
(5) 한국혼이여! 너는 평안히 앉지 말지어다. 평안히 앉기만 하고 용맹스럽게 뛰지 못하고 너를 그물질하려는 놈, 너를 끌려고 하는 놈, 너를 밀어내는 놈, 너를 넘어뜨리려는 놈이 수없이 와서 너를 해치리니 이를 어찌 할 것이냐.
(6) 한국혼이여! 너는 모름지기 단결하며 헤어지지 말지어다. 헤어져서 단결이 못되면 너를 쏘려는 놈, 너를 찌르려는 놈, 칼을 가진 놈, 총을 멘 놈들이 모두 와서 너를 해치리니 이를 어찌 할 것이냐.

슬프다 한국혼이여! 너는 이미 살아온 지가 사천년이 넘었도다. 그리하여 청국, 일본, 영국, 미국, 법국, 덕국, 그 여러 나라가 혹은 너의 후진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들은 우리를 평등으로 대접하지 않고, 그들은 우리를 벗으로 불러 주지 아니하니 이러한 부끄럼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친구로 대접하여 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호랑이도 되고 사자도 되고 승냥이도 되고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니 두렵지 않고 무엇이 두려울 것이냐.

슬프다. 한국혼이여! 너는 동포가 이천만이나 있고나. 그리하여 이웃집에는 두령이에 싸인 「비스마르크」같은 어린 아이를 안아 볼 수가 있고, 마을 초당(草堂) 안에서는 「와싱톤」같은 아이를 기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아들을 희롱하며 이 손자를 양육함에 있어서 어찌 분발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냐.

슬프다. 한국혼이여! 너의 땅덩이는 팔만 이천 평방리(平方里)가 있다. 이 조국의 유업(遺業)이 장차 자기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뼈 속의 기름까지가 모두 남의 손에 농락이 되고 말 것인가. 그런 뒤에 땅을 찾고 집을 찾으려면 그 슬프고 분한 생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참으로 우리 한국의 혼이 없다하면 비록 천 번 변화와 만 번 어려운 운수를 지냈다 할지라도 필경은 아무런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혼이 있다하면 씩씩한 한국혼이 다시 살아 길이길이 살 것이다.

원컨대 벼슬의 욕심을 청산하고 우리 한국의 혼을 살리자.
원컨대 여러 위험을 청산하고 우리 한국의 혼을 살리자.
원컨대 쇠퇴하든 못된 성질을 청산하고 우리 한국의 혼을 살리자.
원컨대 부패한 습관을 청산하고 우리 한국의 혼을 살리자.

그래서 굽히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정신으로서 이천만 동포가 한 입(口) 한 마음으로 한국을 불러일으키고 불러내자. 우리가 이 혼이 없으면 사람이고도 사람 아닌 사람이요, 이 혼이 없으면 나라이고도 나라가 아닌 나라가 되는 것이다.

지금 가령 육대주(六大洲)의 오색 인종이 섞이어 한나라를 이루고 한 주재자(主宰者)를 세우고 한 정부에 복종하여 언어가 같아지고 풍속이 통일되어 살빛 누른 남자와 살빛 흰 여자가 서로 혼인을 하고, 구라파 사람이 형도 되고 아우도 되며, 아세아 사람이 아우도 되고 형도 되어 한 집안에서 거처하여 통 털어 한결같이 된다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아니한 지금에 있어서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은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전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한국의 혼이 다시 살아나 세계 여러 나라의 혼과 대등하게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 한국의 참혹한 환란은 물론이요 동양의 위태함은 불에 비치어 보는 것보다 뚜렷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극렬한 상업과 공업 경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동포는 때로는 백리, 날로는 천리씩 찌부러져서 우리의 민정과 우리의 국세는 몇 해를 지나지 못하여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아, 우리 동포가 장차 이렇게 되고 우리나라가 장차 이렇게 된다면 차라리 굴원(屈原)의 뒤를 따라 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차마 초(楚)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백이(伯夷)의 뒤를 따라 수양(首陽)에 죽은 혼이 될지언정 어찌 차마 주(周)나라 곡식을 한 톨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차라리 한 집안 형제로 더불어 노련(魯連)의 뒤를 따라 동해 바다 속에 묻힐지언정 어찌 다시 진 나라 임금의 남은 부끄러움을 말하며 차라리 일국의 의사(義士)들과 함께 전횡(田橫)의 뒤를 따라 외로운 성에 갇히고 말지언정 어찌 차마 한나라의 뜰을 한걸음인들 밟을 수 있으랴.”

“슬프다. 우리나라가 장차 이와 같이 되고, 우리 민족이 장차 이와 같이 된다하면 우리나라는 마침내 보존하지 못할 것이요, 우리 동포는 장차 보존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고 땅을 굽어 생각하면 낮에는 밥 먹기를 잊어버리고, 밤에는 잠자기를 잊어버리며, 앉아서는 나라를 보전 할 것을 생각해 보고, 걸으면서는 백성을 보호 할 것을 생각하며, 또한 시시(時時)로는 나라 보전 할 것을 생각해 보고, 각각(刻刻)으로는 백성을 평안히 할 것을 생각하여 보아도 별다른 도리가 생각되지 않는다.

4. 결(結) : 조국혼을 어떻게 불러 일으키면 다시 살아날 수있을까.

우리의 보국(保國)과 안민(安民)은 우리 한국의 혼이 다시 사는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의 한국혼이 다시 살아나서 엄연히 독립한다 하면서 저 칭기스칸, 저 알렉산더대왕, 저 피터대제, 저 나폴레옹과 같은 고금에 무서운 야심가가 어깨를 같이하여 왼편으로 끌고 오른편으로 당기면서 우리나라를 엿본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혼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내일이 또 내일에 이르고, 금년에 있어서 혼이 도로 오지 못하고 명년이 또 명년에 이른다하면 구풍(歐風)과 아우(亞雨)는 장차 우리나라를 휩쓸어 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홍귀(紅鬼)와 흑시(黑屍)는 장차 우리 동포들을 불러 짝을 지어 놀자 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고 무엇이 슬프다 하겠느냐.

우리의 대한, 아무리 수천년이란 오래고 자랑스러운 역사국이라 할지라도 조국혼의 부활이 없으면 세계의 여러 나라는 우리나라를 독립자주인 여러 나라 속에서 그 나라의 자격을 제쳐버리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 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면 우리의 욕되지도 않고 멸망되지도 아니 할 조국혼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면 다시 살아날 수있을까. 이 조국혼을 다시 살리며 뜻한 데까지 이르려면 모진 바람, 억센 비, 무시무시한 가시 덤불 등 여러 가지의 장해와 난관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나라의 걸음을 결단코 멈추지도 말고 꺾이지도 말고 침착한 의기로써 활발하게 애써나가며 웅대하게 뻗히어 제 각각 스스로가 천하에 큰 임무를 짊어졌다는 기상과 혼을 길러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천하를 위한 넓고 큰 기백을 가지고 어떠한 깨달음으로써 조국혼을 부활시키며 어떠한 포부로써 조국혼을 다시 살리게 하느냐 하면 우리민족에게 비치며 밝히어 주는 높은 덕(德)과 믿음성스러운 정성으로 얽혀 나오는 도의로써 천하에 독립케 하는 것이 즉 한국의 깨달음일 것이고, 여러 나라와 화목하여 같이 길이 살아나가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천하에 선포하는 것으로써 힘을 다하는 것이 즉 한국의 포부일 것이다.

한국의 각오 가운데는 허다한 혁신과 경장(更張)이 필요하고 한국의 포부에는 꼿꼿한 성의와 친선(親善)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 안에 있어서는 광복(光復) 중회(重恢)의 정신을 일으키어 같은 마음과 같은 도리로써 정치와 경제를 윤택하게 하여야 하며, 국제 사이에 있어서는 권모(權謨)와 술수(術數)를 버리고 정정하고 당당하게 나라의 위신을 베풀어서 내외가 모두 대의명분으로써 공통이 되고 연합이 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어려운 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때로는 자기의 몸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사양치 않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죽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죽기를 한하고 나가는 길이야 뉘라서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겠는가. 이렇게 죽기를 맹세한 정신으로 우리가 뭉치면 비단 우리 나라의 갱생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공존영생(共存永生), 나아가서는 세계의 협화공존(協和共存)에 이바지하는 도의의 광채가 진실로 큰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큰 임무이며 동시에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국혼의 도의로써 된 의기와 정신으로 우리나라의 열약성(劣弱性)을 먼저 물리치고 그 다음으로는 동양의 위미성(萎微性)을 내몰아 밖에서 들어오는 거만스러운 것과 무례한 것을 누르고, 마침내 세계의 사심(私心)과 천하의 사욕(私慾)을 뿌리 채 빼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한국혼의 확충성(擴充性)이요 그것이 한국혼의 부활이며 갱생이다.

우리 한국혼이 부활되고 갱생이 되어 먼저 자기의 나라를 안정케 하고 마음에 천하의 사심과 사욕을 소멸시키는 임무로써 세계에 높이 앉을 날이 있다면 이는 우리 한국혼이 세계적으로 사표성(師表住)이 되는 것을 천하에 밝히 보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의 실현성을 확실히 믿으며, 또한 이 말이 우리 한국혼이 영생하는 것과 같이 되기를 빌어 마지 아니하는 바이다.”

마. 맺음말 : 이준의 115주 기일에 부쳐

이준은 복(福)이 없었던 것 같다. 조실부모하고, 평생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힘겹게 살다가 헤이그에서 순국(殉國)하셨다. 위의 글 “(다) 『한국혼의 부활론』의 시대사적(時代史的) 의미”에서 나는 “동지적 관계에서 논공행상의 크기를 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준은 해방 후에 광복된 조국의 하늘 아래에서 그의 최대의 동지였던 이상설을 기념한다는 기념사업회의 모략에 걸려 철저히 부정되었다.

이상설의 혈손들은 이준의 외아들 이용을 따라 월북하였지만, 이상설의 후손 행세를 하는 종친(宗親)들이 두 분의 동지애와 우정을 망각하고 집요하게 망동을 저지른 것이다. 그 배후에는 친일 세력이 숨어 있고, 그들은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을 자신의 비즈니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망동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조만간에 글로 밝힐 것이다.

환국 사진, 1963년 9월 30일, 김포공항. [사진 제공 - 이양재]
환국 사진, 1963년 9월 30일, 김포공항. [사진 제공 - 이양재]
유족 사진, 1963년 10월 4일, 환국 당시 수유리에 안장하고 이준 열사의 유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종숙(둘째딸)과 유성천(외손녀) 조윤(조서해, 외손자) 조근송(외증손자) 등이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유족 사진, 1963년 10월 4일, 환국 당시 수유리에 안장하고 이준 열사의 유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종숙(둘째딸)과 유성천(외손녀) 조윤(조서해, 외손자) 조근송(외증손자) 등이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은 그 성체(聖體)나마 순국한 지 56년이 지나서 1963년 9월 30일 환국(還國)하였으나, 친일파와 수구들마저 이준의 기념사업을 한답시고 그의 그림자 밑으로 기어들어 와 그의 이름을 팔기에 바빴다.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가짜 후손의 출현도 심심치 않았고, 종친회도 한때 가짜 자손들에게 현혹되었으며, 심지어는 그를 추모한다는 기념사업회가 가짜 자손을 내세워 제사권을 강탈하려고 2021년에 사문서위조에 자격모용(資格冒用)을 시도한 정황마저 있다.

『이준과 만국평회회의』, 이선준 편, 1997년.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발행. 이준열사의 본가(本家)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회회의』, 이선준 편, 1997년.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발행. 이준열사의 본가(本家)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회회의』, 이선준 편, 1997년.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발행. 이준열사의 본가(本家)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과 만국평회회의』, 이선준 편, 1997년. (사)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발행. 이준열사의 본가(本家) 계보를 수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에 나는 서지학과 족보학 전문가로서 분명히 말한다. 이준의 혈손(血孫)들은 이준의 사위 유자후가 지은 『이준선생전』(1947)과 이선준이 지은 두 종의 『일성 이준 열사』(1973)와 『일성 이준 열사』(1994), 또한 이선준이 편찬한 『이준과 만국평화회의』(1997) 등등에 명확히 규명되어 있다. 현재 이준의 본손(本孫)은 모두 이북에 거주하고 있으며, 외손(外孫)만이 이남에 거주하고 있다. 이런 경우 제사권은 혈손인 외손에게 있고, 이 제사권은 누구도 뺏어 갈 수가 없다.

『호적부』, 한성부. 1903년, 이준 열사의 45세시 호적부로서, 본관이 전주(全州)로 기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호적부』, 한성부. 1903년, 이준 열사의 45세시 호적부로서, 본관이 전주(全州)로 기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이준의 본관과 종파를 조사하기 위하여 10여 년 전부터 이준의 족보와 인적 자료도 모았다. 이준의 대한제국시 호적부를 보면 이준이 전주이씨인 것이 확실하다. 유자후가 저술하여 1947년에 발행한 『이준선생전』에는 이준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큰형 이원계(李元桂, 1330~1388)의 18세손이라고 한다. 즉 전주이씨 완풍대군파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발행한 전주이씨 『선원속보』 등의 완풍대군파 고족보(古族譜)에는, 이준은 물론이고, 그 조상의 사대(四代) 위의 계대(系代)조차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규명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이유를 밝힐 것이다.

한편, 나는 이준의 둘째 딸 이종숙을 1981년도에 사직동 자택으로 찾아뵌 적이 있으며, 그의 딸 유성천을 2006년에 삼선교 인근의 자택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또한 현재의 유족대표 조근송(67세)을 이준의 혈손으로 매우 존중한다. 내가 알기에는 2015년 7월 14일 제108주기 추모제부터 유족대표 조근송은 기념사업회와는 별도로 묘역에서 추모제를 갖고 있다. 금년으로 8년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제공한 전 회장이 지난해에 타계한 이상 이제는 그 원인을 용서해 주고 모두가 함께하는 길은 없을까?

이준을 기린다는 것은 기념사업회의 사적인 비즈니스가 아니다. 이준을 기린다는 것은 전 회장처럼 이준을 자기 유익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준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민족혼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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