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1.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는 스승인 표암 강세황과 합작한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렸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소나무 아래에 쓴 [표암화송, 豹菴畵松]이라는 글자이다.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글자를 후대에 쓴 위서라고 주장한다.

표암화송이라는 글자와 낙관은 조작한 것이다. [사진제공 - 심규섭]
표암화송이라는 글자와 낙관은 조작한 것이다. [사진제공 - 심규섭]

강세황의 처남인 유경종(柳慶鐘, 1714~1784)이 1782년 표암과 단원이 함께 그린 호랑이 그림을 보고 지은 ‘영화호(詠畵虎)’라는 시의 일부가 있다.
이때 김홍도의 나이는 38세, 강세황은 70세였다.

“두 사람이 한 호랑이를 그리는데, 너무나 비슷하여 실물과 똑같네.
옛날에는 왕개보(王介甫)가 있었고, 오늘날엔 표암과 단원일세.
그림을 보노라니 시 쓸 생각이 절로 나네.
누가 있어 두 사람을 계승하겠나.”

‘두 사람이 한 호랑이를 그리는데’라는 문장은 상당한 혼란을 준다.
이 문장으로는 호랑이를 두 사람이 함께 그렸다는 말인지, 호랑이와 소나무를 각각 그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북송 때 정치인이자 문인인 왕개보는 단원 김홍도와 아무 연관이 없고, 오히려 강세황을 찬양하고 있다. 문장의 내용은 횡설수설하다.

정밀하게 그린 호랑이는 북종화법, 소나무는 남종화풍으로 기법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호랑이에 비견해 소나무를 너무 크게 그린 점도 있다.
그러다 보니 김홍도의 절친이면서 남종화 전문인 이인문이 그렸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김홍도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이기도 했다.
남종화법으로 소나무를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홍도는 모든 갈래에 능통했다.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신선도의 원류는 중국에 있고, 중국의 작품보다 뛰어나지는 않았다.
[송하맹호도]는 중국이나 조선에 없었던 자신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만드는데 가장 부합한다.
새로운 작품을 창안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겸재 정선이 그랬던 것처럼, 북종화와 남종화를 한 그림에서 통합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에서는 [어진], [궁중 장식화], [의궤]처럼 공공의 작품은 공동창작했다. 이러한 공공작품에는 개인 화가의 개성은 필요하지 않았고 작품의 평가나 가치도 국가기관에서 했다.
따라서 궁중회화 작품에는 서명이나 낙관이 없다.

[송하맹호도]는 낙관과 이름을 넣은 김홍도 개인의 작품이다.
이 정도의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후원자가 필요하다.
경제적 후원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강세황과 같은 선비는 부자가 아니다.
당시 부자는 대부분 중인이었다.
후원자는 자금을 대고, 그 대가로 작품을 가져간다.
물론 작품은 한 점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최소 2점 이상 그려서 한 점은 후원자에게 주고, 나머지는 김홍도가 소장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강세황과 합작을 해야 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정치적 보증이다.
김홍도는 중인 화원이었고, 강세황은 남인 선비였다.
당시 호랑이 그림은 사회성이 없었다. 이런 위험을 스승이자 선비였던 강세황을 통해 보증받고 해소하고자 했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표암화송]이라는 글자와 낙관이 위작으로 밝혀지면서 유일한 가능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정황상, 강세황이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창작에 적지 않은 관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세황의 글씨와 낙관을 조작한 이유는 뭘까?
김홍도와 강세황은 모두 유명한 화가이다.
이 둘의 결합은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고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이미 구매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비싼 값에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밖에는 없다.
따라서 조작은 김홍도 사후, 1800년대 중반 전후로 추정한다.

2. 하천(霞川) 고운(高雲)선생(1495~?)은 16세기에 형조 좌랑 벼슬을 지낸 무반이다.

이 분이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 2점이 전한다.
호랑이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컸던 시기에, 무관이 호랑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 연관시키기 어렵다. 무엇보다 진위를 알지 못한다.

좌-고운 필 송하맹호도-김홍도의 그림과 거의 유사하다. 진위를 알기 어렵다.우-대액대호-민화풍의 호랑이 그림인데. 16세기 초중반에 19세기 풍의 그림이라니??? [사진 제공 - 심규섭]
좌-고운 필 송하맹호도-김홍도의 그림과 거의 유사하다. 진위를 알기 어렵다.우-대액대호-민화풍의 호랑이 그림인데. 16세기 초중반에 19세기 풍의 그림이라니??? [사진 제공 - 심규섭]


3. 김홍도와 임희지의 [죽하맹호도]

죽하맹호도/김홍도, 임희지/91*34cm/비단에 채색/조선 후기/개인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죽하맹호도]는 일본 수출용으로, 대나무를 잘 그렸다는 중인 화가 임희지와 합작한 작품이다.
김홍도는 처음부터 대나무가 그려질 공간을 남겨놓고 호랑이를 그렸다.
호랑이의 모습은 [송하맹호도]와 비슷하다. 단지 좌우가 바뀌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더 틀었다.
수출용 그림이라는 말은 김홍도 화실에서 다량의 호랑이 그림을 창작한 것을 반증한다.

일본 어딘가에는 다수의 호랑이 그림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 작품도 일본에 있다가 국내로 돌아왔다.

4.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의 호랑이 그림

우측-김양기필/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122*40.1/19세기/국립중앙박물관.좌측-김양기/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91*55/19세기/일본 유현재. [사진 제공 - 심규섭]
우측-김양기필/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122*40.1/19세기/국립중앙박물관.좌측-김양기/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91*55/19세기/일본 유현재. [사진 제공 - 심규섭]

마흔이 넘은 나이에 얻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워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따라 그렸지만, 수준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
김양기의 전문은 호랑이 그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산수화를 더 잘 그렸다.
김양기의 호랑이 그림도 주문에 의한 일본 수출용이다.

5. 이의양의 호랑이 그림

송호도(산군포효)/이의양/비단에 수묵담채/129.0×48.7㎝/1811년/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송호도(산군포효)/이의양/비단에 수묵담채/129.0×48.7㎝/1811년/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심규섭]  

조선 후기의 화원인 이의양(李義養, 1768~?)이 그린 호랑이 그림이다.
1811년 마지막 조선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다.
김홍도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소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약간은 멍청한 표정이다.
아래 배경에는 뜬금없이 시냇물을 그렸다. 하천의 나라인 일본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판단한다.

6. 혜산 유숙(劉淑)의 호랑이 그림

좌-동굴에서 새끼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우-부부 호랑이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수컷은 줄무늬 호랑이, 암컷은 점박이 호랑이(표범)이다. 가족의 화목을 표현한 그림으로 조형성은 뒤떨어진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좌-동굴에서 새끼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우-부부 호랑이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수컷은 줄무늬 호랑이, 암컷은 점박이 호랑이(표범)이다. 가족의 화목을 표현한 그림으로 조형성은 뒤떨어진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혜산 유숙은 조선 말기의 화원이었다. 1827년(순조 27)에 태어나 1873년(고종10)에 사망했다.
줄무늬 호랑이와 표범이 뒤섞인 호랑이 그림으로 인문학적 가치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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