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7) 금석문(金石文)
우리 민족의 금석문에 대한 총론은 한국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 12월에 편찬한 『한국고고학사전(韓國考古學事典)』 ‘금석문’조에서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를 참조하여 필자의 관점에서 부분 수정하며 논하는 만치, 이번 회(回) 글은 다른 회의 것보다는 다른 분들의 연구 성과를 많이 참고하였다. 금석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여러 선학(先學)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가. 금석문이란?
금석문이란 금속(金屬)이나 석물(石物)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을 총칭한다. 크게 나누어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분류하는데, 한층 넓은 의미로는 갑골문(甲骨文), 와전명(瓦塼銘), 토기나 도자기 명문, 금은(金銀)에 새긴 글, 목간(木簡) 등도 금석문에 포함한다.
금석문은 대체로 당대 사람들이 만든 1차 사료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이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자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문헌 사료가 부족한 고려 이전의 금석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의 금문의 종류로는 칼(刀劍)에 새긴 글자, 범종명(梵鐘銘), 동경(銅鏡)과 여러 종류의 불기(佛器)에 새긴 글자, 조상(造像), 동인(銅印), 금속판(金屬板)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석문은 비문(碑文)이나 지석(誌石) 중심인데, 그 내용에 따라 사적비(事蹟碑), 순수비(巡狩碑), 국경비(國境碑), 신도비(神道碑), 사찰비(寺刹碑), 탑비(塔碑), 석당비(石幢碑), 갈(碣), 지석(誌石) 등으로 나눈다. 그 외의 중요한 석문으로 석각(石刻), 석탑, 불상, 석등, 석주에 새긴 명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나. 삼국시대의 금석문 개요
우리 민족 금석문은 선사시대 것으로 바위에 새긴 그림인 암각화(岩刻畵)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암각화는 문(文, 글)이라기보다는 그림이다. 울주 대곡리·천전리, 고령 양전리, 경주 금장대, 포항 칠포리 등에 그러한 유적이 있다.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문자를 사용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의 청동기시대의 유물에 그림은 새겨진 것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것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평양의 낙랑(樂浪)구역에서 발견된 명문 있는 유물로는 청동거울, 와당(瓦當), 봉니(封泥)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점제현신사비(蟬縣神祠碑)」는 85년 세워졌는데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 삼성지역에 있는 최고(最古)의 비석이다. 이후 삼국시대는 금석문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기이다. 이는 문자 사용이 이 시기에 급속히 확산하였음을 뜻한다.
고구려의 것으로는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평양성석각(平壤城石刻)」, 불상 광배에 적은 조상기(造像記) 등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외형, 글씨,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금석문보다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제3회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안악3호분(일명 동수묘)」과 「덕흥리 고분」, 그리고 「모두루묘」 등의 고분벽화와 함께 남아 있는 몇 점의 묵서(墨書) 명문도 고구려사 연구의 중요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날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른다. 무기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백제의 금석문으로는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 명문을 비롯하여 부여의 「사택지적비」, 1995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 그리고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 지석(誌石)」 등이 있다.
백제는 문장, 글씨 등의 작성 솜씨를 볼 때 비슷한 시기의 다른 나라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 문자가 있는 기와편과 최근에 발굴로 출토된 목간이 여러 점 있다.
가야의 금석문으로는 1989년 발견된 「합천 매안리 비(陜川梅岸里碑)」가 유명하다. 또 합천 저포리 고분군에서 나온 하부(下部)명이 적힌 항아리와 대왕(大王)명이 새겨진 장경호 등의 토기명문이 있다.
가야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명문이 있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몇 점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창녕의 교동 11호분에서 나온 칼은 종래 백제의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최근 X선 사진 판독을 통해 새롭게 고구려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신라의 금석문으로서는 비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현재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 알려진 영일(迎日) 「냉수리비(冷水里碑)」를 비롯하여 울진(蔚珍) 「봉평비(鳳坪碑)」,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명활산성비(明活山城碑)」, 대구(大邱) 「무술오작비(戊戌烏作碑)」, 남산(南山) 「신성비(新城碑)」 등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들 자료들은 신라의 중앙통치조직, 지방통치체제, 신분제, 촌락구조, 산성과 저수지 축조, 그리고 부역동원 등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석각으로는 법흥왕대의 울주 천전리 「서석(書石)」이 유명하다. 이곳에는 그림과 부호와 함께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금속류로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왕의 시호가 새겨진 「호우(壺)」, 서봉총에서 나온 「은합(銀盒)」 등이 있다.
삼국시대는 문헌사료가 빈약하므로, 그 어느 다른 시대에 비해 금석문이 차지하는 가치가 매우 높다.
후기신라의 비석으로는 왕의 비문, 승려의 비문 등이 있는데, 이 시기의 비는 외형상 비신(碑身), 이수(首), 귀부(龜趺)를 갖춘 정형을 취하게 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왕의 비문으로 무열왕릉에는 현재 비신은 소멸되었으며 웅장한 모습의 이수와 귀부만 전하고 있다. 「문무왕릉비」와 「김인문묘비」는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고, 성덕왕릉과 흥덕왕릉에서는 비의 조각이 몇 점 발견된 바 있다.
승려의 비문은 라말려초(羅末麗初) 선종의 유행과 함께 많이 작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을 손꼽을 수 있다. 이는 내용 뿐 만 아니라 글, 글씨, 조각 수법 등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속에 새긴 것으로는 속칭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명문과 그 비천상이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석등, 석탑, 사리함 등에 새겨진 명문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고려와 조선의 비문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다. 조선시대의 금석학(金石學)
우리 민족의 금석문에 대한 관심과 자료수집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이는 고려후기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등의 사서를 작성하면서 삼국시대의 금석문을 활용한 데서 알 수가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한 고려시대의 여러 문집에서는 앞 시대의 비문을 언급하고 수록하였다. 조선초기의 『동문선(東文選)』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의 비문과 묘지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수록하거나 소개하는데 그쳤으므로 금석학(金石學)이라 이름하기는 어렵다. 명실상부하게 금석학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선조의 아들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吳)는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3백 종의 탁본을 수집하여 연대순으로 엮어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7책을 1668년에 제작했다. 이 『대동금석첩』은 신라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조선 숙종 시대에 이르는 고비(古碑)·탑비(塔碑)·석당(石幢)·석각(石刻) 등 약 300여종의 탑본을 수집하여, 각 탁본의 일부분을 동일한 크기로 오려 수록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본격적인 금석학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문의 체본(体本)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낭선군 이우가 서예가이므로 서체를 중요시 한 것이다.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인 숙종 6년(1655)에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은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탁본 120여 점을 모아 『금석청완(金石淸玩)』이란 책을 편찬하였고, 영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청사(淸沙) 김재로(金在魯, 1682~1759)는 금석 탁본 246책의 『금석록(金石錄)』이란 저서를 남겼다. 『금석록』은 원래 원편 226책, 속편 20책, 총 246책이었는데, 대부분 현존하지 않고 지금은 39책만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서예의 참고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긍석문 탁본 일부를 잘라서 모아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증학의 한 분야로서 금석문의 비문 내용 중심의 사료적 가치를 학문적으로 검토한 것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 이르러서 였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등의 저서에서 금석문을 과학적으로 고증하였으며, 이를 고고학적 연구방법으로까지 이용해 금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현대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금석학의 연구방법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추사의 영향을 받은 중인 역관 출신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은 비문을 판독하고 고증하여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한편, 1832년 청의 유희해(劉喜海)는 이상적(李尙迪, 1804~1865) 김정희 조인영(趙寅永, 1782~1850) 등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금석문을 모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펴냈고, 1922년에 유승한은 이 책의 보유편(補遺編)을 간행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거질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2책을 편찬하였다. 이 조사에 참여하였던 갈성말치(가쓰라기 스에하루, 葛城末治)는 그 경험을 토대로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1935)란 연구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식민지사학의 관점에 접근한 한계성을 갖고 있으나, 조선의 금석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이다.
라. 해방후 금석문 연구
해방 후에 우리나라의 학계는 새로운 금석문 자료를 많이 발굴 소개하였고, 이에 대한 판독이 이루어졌다. 1960~70년대 이후에는 그를 모아 집대성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이난영(李蘭暎)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1968), 황수영(黃壽永)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1976), 1979년부터 계속 나오고 있는 조동원(趙東元)의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1~5, 허흥식(許興植)의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1~3(1984), 장충식(張忠植)의 『한국금석총목(韓國金石總目)』(1984)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또 주제별로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임창순(任昌淳)의 『한국금석집성(韓國金石集成)』 권1 선사시대편, 김영태(金煐泰)의 『삼국신라시대 불교금석문고증(三國新羅時代佛敎金石文考證)』(1992) 등이 있다.
금석문자료에 대한 역주(譯註) 작업도 진행되어,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에서는 『역주 한국고대금석문(譯註 韓國古代金石文)』1~3권(1992)을 발간하였다. 승려 이지관(李智冠)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신라편과 고려편(1993~1995)을 펴냈다.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에서는 『역주 나말여초금석문(譯註 羅末麗初金石文)』 원문교감(原文校勘) 상·하권(1996)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한국의 금석문 자료의 정리와 연구는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1970~80년대 이후 금석문자료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금석문의 잇단 발견으로 인해 최고(最古) 비석이란 기록이 갱신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연구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요컨대 금석문은 역사, 예술, 문학 등 각 방면에 있어서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되며,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시대가 올라갈수록 문헌 자료의 공백으로 인해 그 중요성이 한층 커진다. 아울러 금석문은 서예연구사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금석문 자료에 대한 발굴 조사는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기왕의 금석문 자료에 대한 정리와 판독 작업은 지속되어야 한다.
금석학은 역사학, 언어학, 종교학, 인류학, 민속학, 자연과학 등의 학문 분야가 서로 연결을 맺으며 발전되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X선과 적외선 사진, 컴퓨터 입체 스캔 등을 활용하여 기왕에 잘 보이지 않았던 글자에 대한 정밀한 판독을 진행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 맺음 말
최근 자칭 민족사학자로 주장하는 황당사학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이유립의 『환단고기』파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까지도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황 아무개 씨파 부류이다.
결국 황 모 씨파 부류는 「진흥왕순수비」라든가 「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등등의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금석문을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곧 이것은 우리 민족의 거의 모든 문물(文物)‥‥‥, 즉 신라라든가 백제, 고려와 조선의 사적(史蹟)과 영토(領土)를 부정하는 몽상이자 망상이다. 이는 결국 우리 민족을 공중에 띄워 버리는 망동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신라와 백제 가야의 역사가 중국 대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우리의 영토를 부정하면, 그 자리에 일본의 임나(任那)가 들어오게 된다.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우리 민족의 사적을 버리고 중국의 사적을 우리의 것으로 착각하며 주장하는 당시 황 모씨의 논리를 제2기의 민족사학자 안호상과 최인 등은 이미 1970년대 말에 “우리 민족을 중국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심지어 그를 “중국의 XX”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당시 중국이라는 말은 지금의 대만을 의미한다. 황당사학자들, 특히 황 모씨파 부류의 이러한 한심스러운 행위가 우리 민족의 금석문과 사적을 훼손하는 일로 이어질까 염려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