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우리 역사상 얼마나 많은 인물이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또한 지워져 갔는가? 사라지고 지워진 고려시대 이전의 이름들‥‥‥. 그러나 이름은 남김 없어도 그 시대의 역사와 그들의 업적은 존속했다. 학자들도, 예술가들도‥‥‥. 특히 화가도 똑같다. 우리 역사에 이름을 전하는 화가도 있고, 잃어버린 화가도 있다.

우리 민족의 화가로서 널리 알려진 고대의 인물은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솔거(率居)이다. 흔히 솔거를 삼국시대 신라의 화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솔거는 삼국시대 신라의 화가가 아니라 그보다 좀 늦은 후기신라시대의 화가이고, 현재 그의 작품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나라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여 고구려의 담징(曇徵, 579~631)과 백제의 인사라아(因斯羅我)와 백가(白加) 등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 미술사의 중요한 단면이 우리의 기록이 아니라 일본의 사서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번 회 연재에서는 『일본서기』 등에 나타나는 우리 화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서기』 등이 갖는 우리 고대사의 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13)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

『일본서기』 현존 최고본, 9세기 필사본. 축본(軸本). [사진제공 - 이양재]
『일본서기』 현존 최고본, 9세기 필사본. 축본(軸本). [사진제공 - 이양재]

일본의 대표적 신화서이자 역사서인 『고사지(고지키, 古事記)』와 『일본서기(니혼쇼키, 日本書紀)』는 8세기에 편찬되었다. 역사서 편찬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 두 책도 정치적인 필요 때문에 편찬되었다.

7세기경 40대 천무(덴무, 天武)왕은 임신의 난(壬申の乱 : 672년 천지(덴치, 天智)왕의 동생과 천치왕의 장자 간에 일어난 왕위 계승 싸움. 결국 천지왕의 동생이 승리하여 천무왕이 되었다)에서 승리하자 비조(아스카, 飛鳥)로 천도하고, 왕 중심의 국가 체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역사 편찬에 착수했다. 흐트러진 왕실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면 왕실의 계통과 역대 왕의 사적을 정비하여 왕정(王政)의 정당성을 여러 씨족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고사기』는 712년 정월 28일에 제43대 원명(겐메이, 元明)왕에게 헌상 되었다고 서문에 쓰여 있는데, 그 서문에 의하면 여러 씨족이 가진 제기(데이키, 帝紀 : 황실의 계보)와 본사(혼지, 本辞 : 전래한 신화, 전설, 설화)는 이미 진실과 다르고 허위(虛僞)가 더해져 있다는 말을 천무왕이 듣고,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몇 년 안 있어 본래의 취지가 없어질 것이므로 허위를 바로잡아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곧 『고사기』는 국내의 사상통일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천무왕은 사인(도네리, 舎人)인 패전아례(히에다노 아레, 稗田阿礼)가 낭송하면 이를 받아 기록하도록 했는데, 천무왕이 사망하여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그 후 겐메이 왕이 태안만려(오노 야스마로, 太安万侶)에게 명하여 완성했다.

『고사기(古事記)』는 명칭 그대로 '옛날 일을 적은 것'으로, 구승(口承)되던 신화와 전설, 설화를 수집, 기록한 책이다. 제기(帝紀)와 본사(本辞)를 토대로 상·중·하 세 권으로 편찬했다. 상권은 왕의 조상으로서 신들의 세계를 그렸고, 중권과 하권은 제1대부터 제33대까지 왕의 계보와 치적을 서술했다.

상권에 기록된 신화는 우주의 창조를 둘러싸고, 초인적이면서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투영된 인간적인 모습으로 신들을 묘사한다. 글자는 한자의 음과 훈을 섞은 변체 한문을 써서 일본 고유 문자의 정립에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은 구전의 세계를 생동감 있고 진솔하게 전한다. 역사적 자료를 취급하는 방법이 주관적이어서, 역사서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가치보다 문학적‧언어학적‧문화적 가치가 높다. (참조 : 『일본고전문학비평』, 정순분, 2006.2.11. 제이앤씨)

『일본서기』 성립 1300년 전 포스터. 2021년.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이 기획전에 갈 수가 없었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일본서기』 성립 1300년 전 포스터. 2021년.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이 기획전에 갈 수가 없었다. [사진제공 - 이양재]

반면에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제목에서부터 일본이라는 국호를 명시한 점이 암시하듯이, 대외적인 국위 선양을 목적으로, 특히 중국을 많이 의식하면서 편찬했다고 한다. ‘서기(쇼키, 書紀)’의 ‘서(書)’는 중국 기전체의 역사 서술법을, ‘기(紀)’는 편년체 역사 서술법을 의미한다. 그 이름처럼 『일본서기』는 중국의 역사서, 특히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체제를 모방하였다. 표기도 순 한문체로 중국인들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공적(公的)인 성격을 강조한다.

『일본서기』 전30권은 일본의 나라시대(奈良時代) 초기인 720년 사인친왕(도네리 신노, 舎人親王)을 중심으로 완성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편년체 역사서이다. 당시의 우리나라나 중국에는 이미 역사서가 있는데 일본에는 그에 필적할 만한 역사서가 없어, 천무왕의 명에 의해 편찬을 착수하였고, 원명(겐메이, 元明)왕 때에 완성되었다.

이른바 신대(神代)에서 지통(지토, 持統, 재위 690~697)왕 때까지의 역사가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한문체로 되어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당시의 주변 국가인 고대 우리나라와 중국 등의 사서에 대응하는 일본의 공적인 역사서로서의 성격이 크다.

『일본서기』는 『백제삼서(百濟三書)』, 즉 백제인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등과 중국의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을 인용(引用)하고 있어, 일본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고대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왜의 진구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였다는 황당무계한 대목이 있고, 편찬할 때 왜(倭)를 일본으로 대왕(大王)을 천황(天皇)으로 바꾸어 기록하였지만, 또한 연대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二周甲)을 끌어 올린 사실까지도 드러난다.

따라서 『일본서기』를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는 혹평(酷評)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본서기』는 우리 민족의 삼국시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 사서로 인정된다.

한편 백제에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 시기의 박사 고흥(高興)이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서기(書記)』를 저술했다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현존하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삼서(百濟三書)』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시기에도 백제의 역사서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신라를 앞세우고자 한 의도에 의하여 고구려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사의 상고(上古) 부분도 대거 필삭(筆削)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는 없는 내용이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한 상태로 보이는 것이다.

가. 백제 학자 ‘왕인(王仁)’

왕인(王仁)은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전연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고사기』에는 그의 이름을 화이길사(와니키시, 和邇吉師)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왕인(와니, 王仁)이라고 나와 있다.

왕인은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 때의 왕자이다. 이때 일본에서 황전별(아라타 와케, 荒田別) 등을 백제에 보내어 학자를 구하니 왕의 명령으로 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天字文)』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하여 일본 응신(應神) 왕의 신임을 받고 태자(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왕인의 자손은 대대로 하네(고치, 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왕 15년(284) 가을 8월,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와 좋은 말 2필을 보냈는데, 경판상구(輕阪上廐)에서 이를 길러, 아직기가 이를 맡아 했고, 이로 인하여 말 기르는 곳을 구판(廐阪)이라 하였다. 아직기 또한 경전에 능해 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이때 왕이 아직기에게 ‘그대와 같은 훌륭한 박사가 있는가?’ 묻자, 아직기는 ‘왕인이라는 뛰어난 이가 있다’라 대답하였다. 여기서는 ‘왕인(王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불러오게 하였다. 드디어 16년 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는 그를 스승 삼아 여러 전적을 배웠는데,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아화왕(阿花王)이 죽자 아직기가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아화왕은 아신왕(阿莘王,392~404)이고, 아직기는 전지왕(腆支王,405~419)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아신왕 조 6년 5월에 일본과 우호를 맺기 위해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고, 즉위할 때 일본 왕이 병사 1백 명으로 호송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일들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에 걸쳐 있다. 즉 『일본서기』의 응신왕 15년(284)에서 이주갑(120년)을 늦추어 보면 404년에 아직기가 일본으로 갔고, 왕인은 405년에 일본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종요(鍾繇, 151년~230년)가 지은 『천자문(千字文)』, 왕희지(王羲之)가 종요의 『천자문』을 쓴 작품이다. 담징이 일본에 전한 『천자문』은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이 아니라, 위(魏) 나라의 종요(鍾繇)나 백제에 누군가가 지은 『천자문』일 것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종요(鍾繇, 151년~230년)가 지은 『천자문(千字文)』, 왕희지(王羲之)가 종요의 『천자문』을 쓴 작품이다. 담징이 일본에 전한 『천자문』은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이 아니라, 위(魏) 나라의 종요(鍾繇)나 백제에 누군가가 지은 『천자문』일 것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한편 왕인이 일본에 전한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 470년 추정~521년)가 양 무제의 명을 받고 지은 『천자문』은 아니다. 중국 위나라의 종요(鍾繇, 151년~230년)도 『천자문』을 남겼는데, 주흥사의 책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하나, 종요의 책은 “이의일월(二儀日月)”로 시작한다. 그렇다고 종요의 『천자문』이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백제의 독자적인 『천자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백제의 화공 ‘인사라아(因斯羅我)’

백제의 화공 인사라아(因斯羅我) 역시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전연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蓋鹵王) 9년(463년, 일본의 雄略天王 7)에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백제의 화공이다.

당시 일본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건너간 도공(陶工)‧화공‧가죽제품공 등 기술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베(部)’라는 무리에 속하여 있었다. 인사라아도 이와같이 ‘가베(畫部)’에 속하였으며, 웅략왕(유랴쿠왕, 雄略王)은 이들 도일 기술공들을 상도원(가미쓰모모하라, 上桃原), 하도원(시모쓰모모하라, 下桃原) 그리고 진신원(마가미노하라, 眞神原)라는 세 곳에 살게 하였다.

인사라아의 자손들은 604년(推古王 12) 하내화사(가와치화사, 河內畫師)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장소에 살면서 면세를 받는 등 국가적 보호를 받으며 세습화공(世襲畫工)이 되었다. 그러나 인사라아가 어떠한 작품을 남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 백제 화가 ‘백가(白加)’

백제 출신의 화가 백가(白加)는 일본에서 활동하였던 불화(佛畵)를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위덕왕 35년(588)인 일본 숭준(崇峻)왕 원년에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은솔(恩率) 수신(首信), 덕솔(德率), 개문(蓋文), 나솔(那率), 복부미신(福富味身)과 승려‧건축공‧와공(瓦工)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당시에 일본에서 법흥사(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했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볼 때 수신사의 일행으로 파견된 백제의 기술자들은 법흥사를 짓기 위한 요청으로 일본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의 도일이 불사건축(佛寺建築)과 관계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불화를 그렸던 화가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역시 일본에서 어떠한 작품을 남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라. 고구려 승려 화가 ‘담징(曇徵)’

『일본서기』에 의하면 담징(曇徵, 579~631)은 일본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승려 화가이다. 그는 610년(영양왕 21)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碾磴)등의 제작 방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법륭사 제6호벽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가로 262cm. 세로 308.6cm.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법륭사 금당벽화를 일본 학계에서 담징과의 관련성을 애써 부인하더라도, 담징 이후의 고구려계 화사(畫師)들이 벽화 제작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사진제공 - 이양재]
법륭사 제6호벽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가로 262cm. 세로 308.6cm.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법륭사 금당벽화를 일본 학계에서 담징과의 관련성을 애써 부인하더라도, 담징 이후의 고구려계 화사(畫師)들이 벽화 제작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일본에서 그는 일본 승 법정(法定)과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법륭사(호류사, 法隆寺)에 기거하면서, 오경(五經)과 불법(佛法) 등을 강론하고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수리 중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화(模寫畫)가 일부 남아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凹凸法)‧채색법‧인물의 묘사법 등이 서역(西域) 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唐風)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백봉시대(하쿠호시대, 白鳳時代)에 그려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법륭사 제6호벽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부분도). 관음보살의 얼굴이다. 고려시대의 불화에서처럼 철선묘(鐵線描)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법륭사 제6호벽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부분도). 관음보살의 얼굴이다. 고려시대의 불화에서처럼 철선묘(鐵線描)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제공 - 이양재]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는 금당의 건립 연대, 벽화의 제작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본래 법륭사는 성덕태자(쇼토쿠태자, 聖德太子)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598년설과 606년설로 엇갈리고 있으나 7세기 초에는 이미 건립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일본학계에서는 690년 낙뢰로 말미암아 호류사가 불타 버린 뒤, 재건되었다는 주장(再建論者)과 재건되지 않았다는 주장(非再建論者)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 그리고 재건 연대에 관하여서도 덴무 연간(天武年間, 673∼68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과 지토 연간(持統年間, 687∼696년)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즉 일본 학계에서는 이 그림을 고구려의 담징과 연결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강한 것이다.

법륭사의 금당은 수리하던 중 1949년 1월 26일 화재가 일어나 내진(內陳) 위쪽 소벽(小壁)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버렸다.

법륭사 금당벽화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당대(唐代) 미술의 영향이 함께 나타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영향을 배제할 수도 없다. 즉,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鐵線描)를 위주로 한 묘법(描法) 그리고 이른바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사방불(四方佛) 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법륭사 금당벽화를 일본 학계에서 담징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더라도, 담징 이후의 고구려계 화사(畫師)들이 벽화 제작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필자는 위에서 “인사라아의 자손들은 604년(推古王 12) 하내화사(가와치화사, 河內畫師)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장소에 살면서 면세를 받는 등 국가적 보호를 받으며 세습화공(世襲畫工)이 되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나 『성덕태자전력(聖德太子傳歷)』에 의하면, 그 당시 하내화사 이외에도 산배화사(山背畵師)‧황문화사(黃文畫師)‧책진화사(簀秦畫師)‧추화사(揂畫師)도 정한다고 했는데, 이 중 산배화사와 황문화사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산성국제번부(山城國諸蕃部)에 기재되어 있는 고구려 출신인 산배박련(야마시로고마노무라지, 山背拍連)과 황문연(기부미노무라지, 黃文連)의 동계씨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구려 출신으로 추정되는 산배화사와 황문화사의 이름을 가진 화가 집단의 존재는 삼국시대의 우리나라(고구려와 백제)의 고대 화가들이 일본 나라시대의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말해준다.

마. 고구려 화가 ‘가서일(加西溢)’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陀羅繡帳)’. 622년, 고구려계 화가 가서일(加西溢)이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확정된 수장(繡帳)이다. 일본 나라(奈良) 중궁사(中宮寺) 소장품. 작품 뒷면 명문(銘文)에서 화사(畵師) 고려가서일(高麗加西溢), 동한말현(東漢末賢), 한노가기리(漢奴加己利)가 수장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의 복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복식과 같다. 이 수장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수예 작품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陀羅繡帳)’. 622년, 고구려계 화가 가서일(加西溢)이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확정된 수장(繡帳)이다. 일본 나라(奈良) 중궁사(中宮寺) 소장품. 작품 뒷면 명문(銘文)에서 화사(畵師) 고려가서일(高麗加西溢), 동한말현(東漢末賢), 한노가기리(漢奴加己利)가 수장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의 복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복식과 같다. 이 수장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수예 작품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가서일은 일본 사서에도 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일본 나라(奈良) 중궁사(中宮寺)에 소장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陀羅繡帳)’의 뒷면 명문(銘文)에서 확인된 화가로서, 그는 그 수장(繡帳)의 밑그림을 그렸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은 621년 성덕태자(聖德太子, 573~621)가 죽은지 1년 후(622년)에, 그의 부인의 하나인 귤대랑녀(다치바나, 橘大郎女)가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뒷면의 명문에는 화사(畵師) 고려가서일(高麗加西溢), 동한말현(東漢末賢), 한노가기리(漢奴加己利)가 수장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은 자사(紫紗)와 황릉(黃綾)으로 짜여진 포(布) 위에 백‧적‧황‧청‧녹색 등의 색실로 수를 놓은 것이다. 특히, 이 수장에 나타난 측면에서 보고 그린 연화문(蓮花文) 및 인물 표현 중에서 저고리와 주름치마의 기법 등이 덕흥리(德興里) 고분벽화와 쌍영총(雙楹塚)‧수산리(修山里) 고분벽화 등 고구려 고분벽화와 흡사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고구려 화가 가서일의 작품의 단면(斷面)은 중궁사(中宮寺)에 소장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陀羅繡帳)’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 후기신라의 화가 ‘솔거(率居)’

『삼국사기』 권제48, 열전 제8, 솔거전, 14C, 목판본, 성암 조병순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삼국사기』 권제48, 열전 제8, 솔거전, 14C, 목판본, 성암 조병순 소장본. [사진제공 - 이양재]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48, 열전 제8에 보이는 솔거전(率居傳)에 의하면 솔거는 농가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유마거사상」을 그렸다는 단속사(斷俗寺)의 완공 시기를 보아 삼국시대보다는 후기신라시대에 활동하였던 화가로 보인다.

우선 단속사는 『삼국사기』에 창건에 관한 두 가지 설을 쓰고 있다. 748년(경덕왕 7)에 왕의 총신(寵臣) 이준(李俊/李純)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改創)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고, 763년(경덕왕 22)에 현사(賢士)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즉 단속사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부터 최소한 80년 후인 8세기 중반에 창건한 절이다.

솔거는 황룡사(黃龍寺)에 「노송도」 벽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벽화는 노송을 실감 나게 잘 그려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또한 그가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를 그렸다고 하는데,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다. 황룡사(黃龍寺)의 「노송도」 벽화나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는 건물이 완공된 훨씬 후대에 그릴 수 있으나, 단속사의 「유마거사상」은 건물이 지어지기도 전에 그릴 수는 없으므로, 솔거를 후기신라의 화가로 보는 것이다. 솔거는 우리 민족의 역사서에 기록된 삼국시대의 유일한 화가이다.

사. 첨언(添言)

이상과 같이 필자는 이번 회 연재에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나타나 있는 우리 민족의 고대 화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다. 위에서 왕인을 먼저 다룬 것은 그는 고대의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화 교류에서 연대가 제일 올라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이 민감한 위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에게는 잊혀지거나 지워져 버린 우리 민족의 학자와 미술가들이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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