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종교를 논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번 글은 쓰기가 가장 어렵다. 이 글에 실수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독자분들은 가르침을 댓글로 주시길 바란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현재 우리가 쓰는 말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단어(單語)와 한자 단어 및 외래어 단어 등등이 있다. 1961년에 나온 이희승(李熙昇, 1896~1989) 편 『국어대사전』은 23만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불과 38년 후에 나온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 1999년 초판본에는 48만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23만 단어에서 배가 넘는다. 이렇게 국어사전에서 단어의 숫자가 느는 것은 새로 찾아진 단어도 있고,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도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는 사실은 조선왕조가 개화기에 들어선 1882년에 우리 민족이 사용한 단어의 숫자와 140년 후인 2022년에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는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필자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그리고 초기문명시대에 상용(常用)한 단어의 숫자를 생각해 보았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그리 많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문명시대에도 많아야 1만여 개의 단어와 기본적 어순(語順)이 있으면 그 시대에 맞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즉 초기문명시대의 의사소통과 사회문화는 단순하였다. 이런 고대 상황으로 보아 현대의 시각으로 단군조선시대의 사회와 문화 및 신앙을 이해하려 한다면 큰 착오이다. 초기문명사회에서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는 어순과 단어만 다르지만, 혈통상 다른 족속과 상호 간에 문화적 공통성을 지니는 현상은 보편적임을 이번 회 연재에 앞서 상기시키고자 한다.

(12) 민족 종교와 경전

우리 민족의 근대 사상사나 철학사 및 종교사를 연구하는데 동학(東學)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최고의 존재이다. 이후에 나온 홍암 나철(羅喆, 1863~1916)이 1909년에 중광(重光)한 대종교(大倧敎)와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의 대종교(大宗敎),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증산교(甑山敎),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의 원불교(圓佛敎) 등등에서 수운 최제우 사상의 영향이라든가 인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종교로 자리를 잡은 천도교를 위시한 동학과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를 거시적(巨視的)으로 탐색하며, 천도교와 대종교를 중심으로 논할 것이다.

이운규는 실존 인물인가?

우리나라 근대에 시작된 이들 종교는 이운규(李雲圭, 1804~?)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민족종교 일각에서는, 이운규의 학통은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천문, 역산(曆算), 역학, 시문에 능통하였고, 그는 사람을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에 밝았다고 하며, 최제우와 김치인(金致寅), 그리고 김항(金恒)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전한다.

이운규는 전주이씨 담양군파의 파조인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1439~1450)의 후손이라 하는데, 그는 “천안 목천(木川)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문과 참판(參判)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친밀하게 지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조방목』을 확인하여 보면 이운규(李雲圭)라는 인물은 생원시든 진사시든 문과시든 아무 시(試)에도 급제한 사실이 없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그의 이름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참판을 지낸 적도 없다.

더군다나 이운규는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나, 이서구는 1825년에 사망하였는데 이운규가 1804년생이면 그가 이서구의 제자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지 않은 주장이다.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주장은 자신들의 계통을 세우기 위한 김항이나 강일순 측 종단의 주장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김항이나 강일순 측 종단은 자신들의 창시(創始) 교조(敎祖)가 이운규의 문인으로 최제우와 동문수학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최제우의 천도교 측은 최제우가 이운규의 문인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부인한다.

최제우는 1824년생이며, 김항은 1826년생이고, 강일순은 1871년생이기 때문에 셋의 나이 차이가 크고, 최제우의 행적 또한 이들과 잘 맞지 않아 이운규의 제자설은 부정되고 있다. 특히 최제우는 1864년에 순교했는데 이때는 강일순이 태어나기 이전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운규는 실존 인물임은 분명한 것 같으나, 일부 종단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에 대한 설명, 즉 이서구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냈으며 이하응과 친하게 지냈다는 주장은 위에서 규명하였듯이 미화된 맹탕 허구이다.

가. 동학과 『동경대전』

『동경대전(東經大全)』, 1880년, 인제 경진년 초판본. 목활자본. 『동경대전』으로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동학론」이 다음 판에서는 「논학문」으로 제목이 바뀐다. [사진제공 - 이양재]
『동경대전(東經大全)』, 1880년, 인제 경진년 초판본. 목활자본. 『동경대전』으로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동학론」이 다음 판에서는 「논학문」으로 제목이 바뀐다. [사진제공 - 이양재]

동학(東學)은 서학(西學)에 자극을 받은 수운 최제우가 서학의 상대적인 사상으로 창시하였다. 동학에는 서학에 상응하는 면도 있고, 서학과는 다른, 정확하게는 서학을 뛰어넘는 우리 민족에 내재한 심상(心想)을 표출하고 있다.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사회개혁적인 민중사상으로 교리화(敎理化)하신 분이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고, 종교 조직화한 분이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이다. 최재우의 동학사상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그대로 담겨있다.

『동경대전』의 첫째 편인 「포덕문」은 최제우가 1861년(철종 12년)에 전라북도 남원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 일명 龍泉寺)에 들어가 한 암자를 빌려 은적암(隱寂庵)이라 이름을 짓고 수도하면서 지은 것으로, 525자의 한문으로 되어 있다. 「포덕문(布德文)」은 서학(西學)이 아닌 동학의 각도(覺道)를 알리는 최제우의 사상적 선언문으로, 천도(天道)인 하늘의 조화로 밝은 덕을 온 천하에 베풀어 보국안민(報國安民)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경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편인 「논학문(論學文)」은 최제우가 1861년에 은적암에서 집필한 총 1,338자의 한문으로 되어 있다. 『동경대전』 인제 경진판에는 「동학론(東學論)」으로 되어 있는데, 즉 동학을 논한 경문이라는 뜻으로, 천지조화의 무궁한 운수와 천도의 무극한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서학에 대치하여 서학이 아닌 동학을 자각창도하게 된 까닭과 각도 경위, 그리고 포덕을 위하여 마련하게 된 주문(呪文) 21자를 말한 다음, 어진 사람과의 문답 형식을 빌려, 서학에 대비한 동학의 교리와 사상 전반을 밝혀주고 있다.

셋째 편인 「수덕문(修德文)」은 최제우가 1862년에 은적암에서 새해를 맞아, 각지의 제자들에 대한 정회(情懷)를 금하기 어려워 「권학가(勸學歌)」와 함께 지은 것으로, 각지의 문도들에게 수덕에 힘쓸 것을 당부한 경문이다. 모두 1,060자의 한문자로 구성되어, 선조 대대로 덕을 닦아 이어온 여경(餘慶)으로 마침내 자각 창도하게 된 최제우 자신의 동학의 극의(極意)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4자에 있으므로, 하늘 조화의 그 참된 마음을 고이 지켜 공경하고 믿는 데서 창조의 바른 기운을 살려내는 것을 수덕의 미립으로 삼을 것이며, 그러기 위하여 알아 두어야 할 참고사항과 취할 태도와 정신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 넷째 편인 「불연기연(不然其然)」은 524자의 한문자로 구성되어, 1864년에 최제우가 대구 장대에서 처형되기 전인 1863년에 자신의 출생일인 10월 28일을 전후하여 「흥비가(興比歌)」와 「8절(八節)」 및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등의 글과 함께 지어 반포하였다. 이 「불연기연」은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하고 심오하였던 만년의 저작으로, 천도의 인식론적 근거를 통찰, 개진한 저서로 평가된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민족의 사상사에서 볼 때 『동경대전』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이다.

나. 동학의 분화

이러한 『동경대전』은 최제우에 의하여 창시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와 종교학계에서는 동학이 1894년의 농민봉기에 실패한 이후 여러 갈래로 분화한 것으로 본다.

그 첫째 갈래는 갑오년 봉기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반봉건‧반외세투쟁을 계속해 가는 세력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제2차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나타나는 의병이라든가, 1910년 이후 만주지방의 독립군 등에 편입되어 활동하는 동학세력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갈래는 일진회 및 시천교 등 처럼 친일 세력화하는 세력이다.

셋째 갈래는 종래 동학이 표방했던 반근대적 노선을 버리고 일본을 통한 근대문명을 수용하여 종래의 동학교단을 크게 쇄신하려고 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망명 개화파 인사들이 이끄는 천도교이다.

넷째 갈래는 갑오년 봉기의 실패는 동학교단의 지나친 현실 참여 내지는 정치 참여에 있다고 비판하고 1894년 이후 철저하게 종교적 수도주의, 은둔, 현실 불간섭을 표방하여 순수한 종교운동에만 전념하는 세력이다. 여기에는 경상북도 상주(尙州)를 비롯, 충청남도 계룡산(鷄龍山)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여러 동학계 신종교들이 있다.

다섯째 갈래로는 동학과는 완전히 결별하여 새로운 종교운동에 나서거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세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운동의 대표적 사례로는 1901년에 창립되는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증산교(甑山敎), 1916년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창립되는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의 원불교(圓佛敎)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례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황해도의 경우가 대표적)한 세력도 있다.

증산교라든가 원불교 교단에서 인정하든 부정을 하든, 이들 종교는 동학사상과 활동으로부터 상당한 자극을 받아 창도(創道) 또는 창교(創敎)한 것만은 사실이다. 반면에 대종교는 중광(重光)을 말한다.

다. 대종교의 중광

『도해삼신제강의(圖解三神諸講義』, 신태윤(申泰允, 1884~1961) 편, 1938년 10월 30일 초판본. 전남 곡성에서 발행. 대종교의 경전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한글 토를 달고 있다. 신태윤은 곡성에 단군전을 지은 독립운동가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도해삼신제강의(圖解三神諸講義』, 신태윤(申泰允, 1884~1961) 편, 1938년 10월 30일 초판본. 전남 곡성에서 발행. 대종교의 경전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한글 토를 달고 있다. 신태윤은 곡성에 단군전을 지은 독립운동가이다. [사진제공 - 이양재]

대종교(大倧敎)는 홍암 나철이 창시(創始)하였다. 동학이 천주(天主, 한울님)의 계시로 “꽝”하고 나타난 것이라면 대종교는 단군 신앙의 중광(重光)을 말한다. 대종교는 환인(桓因)과 환웅(桓雄)과 환검(桓儉)을 삼신(三神)으로 받드는데, 그러한 신앙은 단군조선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다가 명맥이 끊어졌기에, 그것을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중광이라 한 것이다.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는 대종교(大宗敎)와는 다른 교단이다. 대종교(大宗敎)는 조선 말기에 서두에서 언급한 이운규(李雲圭)가 창설한 남학(南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나철의 대종교(大倧敎)는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위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인 우리 민족종교의 중심이다. 어느 종교가 대종교처럼 독립과 민족자존을 위하여 투쟁하였는가? 필자는 대종교를 매우 우호적인 심정으로, 대종교가 크게 번성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대종교를 통해 본 우리 민족의 신앙은, 즉 대종교가 형상화한 단군의 가르침은 비교종교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원시 신앙과 상당히 상통한다고 판단된다.

대종교에도 경전이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경전이 아니라, 기본경전이 있었고 그 기본경전의 교리에 대한 후속되는 설명이나 가르침이 더해진 것이다.

『三一神誥』 표지와 간기, 대종교본사(경성 북부 대안동). 1912년 4월 7일 초판본. 편수 겸 발행인은 김교헌. [사진제공 - 이양재]
『三一神誥』 표지와 간기, 대종교본사(경성 북부 대안동). 1912년 4월 7일 초판본. 편수 겸 발행인은 김교헌. [사진제공 - 이양재]
『三一神誥』, 필사본 표지와 끝면, 책의 끝에 『천부경』을 소자(小子)로 쓰고 있다. 정훈모의 단군교 계열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우수한 저지(楮紙)에 필사하고 있고, 본문에 구결(口訣)로 토를 달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을 1980년대 중반에 입수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三一神誥』, 필사본 표지와 끝면, 책의 끝에 『천부경』을 소자(小子)로 쓰고 있다. 정훈모의 단군교 계열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우수한 저지(楮紙)에 필사하고 있고, 본문에 구결(口訣)로 토를 달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을 1980년대 중반에 입수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필자는 1912년 4월 7일 자로 당시의 경성 북부 대안동(안국동)에 있던 대종교본사가 발행한 『삼일신고』 초판본과 1914년 2월 20일 자로 당시의 경성 북부 삼청동에 있던 대종교본사에서 발행한 『신단실기』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 편수 겸 발행인이다.

대종교의 『삼일신고』는 교리서이고, 『신단실기』는 역사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모은 책이다. 이 두 책의 성격은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종교의 경전이 역사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도, 우리는 교리서와 역사서는 구분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역사서는 교리서를 보충하는 것이지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라. 대종교 경전 『삼일신고』와 『신단실기』 등

『신단실기』 표지와 간기, 대종교본사(경성 북부 삼청동), 1914년 2월 20일 초판본. 편수발행자는 김교헌. [사진제공 - 이양재]
『신단실기』 표지와 간기, 대종교본사(경성 북부 삼청동), 1914년 2월 20일 초판본. 편수발행자는 김교헌. [사진제공 - 이양재]

대종교에는 여러 경전이 있다. 대종교의 경전은 ‘계시경전(啓示經典)’과 ‘도통경전(道通經典)’으로 나누어지는데, 계시경전은 『삼일신고』‧『천부경(天符經)』‧『참전계경(參佺戒經)』‧『신사기』 등으로 대개 대종교 중광 이전에 한배검의 계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된다. 반면에 도통경전은 『신리대전』‧『회삼경』‧『삼법회통(三法會通)』‧『신단실기』 등으로 계시경전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종사가 해설해 놓거나 주석해 놓은 것이다.

계시경전 가운데서도 『삼일신고』가 가장 중요시되는 것으로 다른 경전들은 『삼일신고』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계시경전 가운데 『천부경(天符經)』은 가장 늦게 대종교 경전으로 인정받는다. 『천부경』은 1975년 6월 대종교 교단 교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경전으로 정식 공인되었고, 1983년 간행된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실리기 시작하였다.

대종교가 1909년 초 중광(重光) 될 당시에 『천부경』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계연수(桂延壽)가 암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찾아내 1916년 9월 9일 이를 탁본(拓本)하여 1917년 초에 단군교에 전했다고 주장한다.

그 후 대종교에서 발간한 『종리문답(倧理問答)』에서 “한배검의 사관(史官)인 신지(神誌)가 『비사(祕詞)』와 『천부경』을 지어서 한배검의 교화를 전하였다”는 내용으로 『천부경』을 소개하고 있다. (『천부경』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추가 언급한다.)

대종교의 교리를 보면, 한인 한웅 한검(환인 환웅 환검)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말한다. 그 논리는 천주교 및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상응하는 교리라는 관점을 갖게 한다.

마. 원불교의 『원불교 교전』

『원불교교전』 제1권, 원불교중앙총부, 1962년, 초판본. 필자 같은 애서운동가의 눈으로 보기에 원불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설파(說破)한 ‘조선불교유신론’(1913년)을 실천한 가장 건실(健實)한 불교 종단으로 보인다. [사진제공 - 이양재]
『원불교교전』 제1권, 원불교중앙총부, 1962년, 초판본. 필자 같은 애서운동가의 눈으로 보기에 원불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설파(說破)한 ‘조선불교유신론’(1913년)을 실천한 가장 건실(健實)한 불교 종단으로 보인다. [사진제공 - 이양재]

원불교 경전은 『교전』이라고 한다. 원불교 교리의 강령을 밝힌 『정전(正典)』과 교조의 언행을 수록한 『대종경(大宗經)』을 합하여 1962년에 간행하였다.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朴重彬)이 교단을 세우고 교화를 시작하면서 1927년 『수양연구요론』을 쓰고 1932년에는 『육대요령(六大要領)』을 써서 교서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육대요령』에 불교의 경(經)과 논(論)을 추가하여 1943년 『불교정전』을 간행하고 기본 경전으로 사용하다가 여기에서 경과 논은 분리하고 대신 교조의 언행록을 보충하여 발행하였다.

『정전』은 총서, 교의, 수행의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서편에는 개교의 동기와 교법의 총설이 있고 교의편에는 일원상(一圓相), 사은사요(四恩四要), 삼학팔조(三學八條), 사대강령 등 근본 교리를 밝혀놓았으며 수행편에는 훈련과 수행에 관련된 법문이 실려 있다.

『대종경』은 15품 54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수집한 교조의 언행과 법문 중에서 가려 뽑은 내용으로 기본 교리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필자 같은 애서운동가의 눈으로 보기에 원불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설파한 ‘조선불교유신론’(1913년)을 실천한 가장 건실한 불교 종단으로 보인다. 원불교는 1916년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대종사가 창시한 한국의 신 불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하고 있으니, 원불교는 조선불교 혁신화의 선두에 있다.

바. 증산교의 경전류

증산교의 경전으로 가장 먼저 출판된 것은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이다. 이 경전은 보천교 혁신계를 주도했던 이상호(李祥昊)가 보천교를 탈퇴한 후 강일순의 추종자들에게서 들은 강일순의 행적을 모아 1926년 간행한 책이다. 역시 이상호에 의해 저술된 경전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은 『증산천사공사기』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1929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증산교 계열의 각 종단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경전들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생화정경(生化正經)』(삼덕교, 1954)‧『중화경(中和經)』(미륵불교, 1955)‧『선도진경(宣道眞經)』(태극도, 1965)‧『증산대도전경(甑山大道典經)』(법종교, 1970)‧『전경(典經)』(대순진리회, 1970)‧『교전(敎典)』(보천교, 1981)‧『증산도성전(甑山道聖典)』(증산도중앙총무부, 1988) 등이 있다.

이들 경전은 대체로 『대순전경』을 토대로 하면서 자기 종단 창시자의 행적과 가르침을 아울러 수록하고 있다. 증산교는 동학이나 대종교 원불교에 비교하여 그 종파가 간단치 않다.

사. 우리 민족종교를 관통하는 사상은 후천개벽

동학의 최제우와 김항, 증산교의 강일순 세 분은 모두 후천개벽을 자신들의 중심 사상으로 놓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누가 먼저 후천개벽을 주장하였는가 하는 점이 관건인데, 후천개벽을 처음 주장한 종단은 당연히 동학이다.

『원불교대사전』의 「후천개벽(後天開闢)」조에 따르면 “어둡고, 불평등하고, 괴롭고, 낡은 선천의 세상이 지나가고, 밝고 평등하고 살기 좋은 낙원의 새 세상이 돌아온다는 말”이라 하고 있다. 아울러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면서 그 이전을 선천 그 이후를 후천이라고 쓰기 시작한 이래 많은 한국의 신종교들이 이 후천개벽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불교에서도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정신문명이 발전된 세상을 후천개벽 시대로 보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후천개벽 사상이 이들 근대의 민족종단을 관통하는 공통된 사상이다.

그런데 후천개벽의 사상이 나철의 대종교에는 없다. 즉 대종교는 현실적인 종교이다. 우리 민족사학자의 태두라고도 할 수 있는 단재 신채호는 대종교인으로서 민족사학을 개척했지만, 결국에는 대종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아나키스트(Anarchist)가 된다. 아마도 신채호가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는 대종교 사상에 실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내세에 대한 환상적 기다림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강력한 투쟁을 모색한 것이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아. 「천부인」은 『천부경』으로 단정할 수 없다

나철이 1909년에 창시한 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의 이름은 ‘단군교(檀君敎)’였다. 그러나 나철은 1910년 8월에 단군교라는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었고, 이에 반발한 정훈모(鄭薰謨)는 단군교 명칭을 고집하여 대종교에서 이탈하였다.

필자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천부경』이 대종교의 경전으로 포함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그런데 단군 사실(史實)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이 『천부경』이라는 주장은 ‘인(印)’의 의미를 모르는 억측에 불과하다. ‘인(印)’은 글자 그대로 인장(印章)을 의미한다. 고래로 인장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환인이 환웅에게 삼위태백을 다스리는 권력을 준 증표가 ‘천부인’이다. 요즘도 권한을 행사하거나 증명할 때 인을 찍고, 고대에는 왕권의 계승에 옥새(玉璽)를 넘겨주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였다.

이러한 인장의 기원은 기원전 약 5,0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했다고 알려진 수메르인들은 원통형 인장을 사용하였다. 둥근 인장의 몸통에 무늬를 새기고, 이를 진흙에 굴려 요철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원통형 인장 이후에도 인장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고대 이집트의 풍뎅이 모양 인장, 고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장, 그리이스‧로마에 이은 유럽의 반지형 인장, 태국의 상아로 만든 불탑 인장, 이란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제국의 원통형 인장 등 전 세계적으로 각양각색의 인장이 나타난다.

환인은 환웅에게 『천부경』을 준 것이 아니라 「천부인」을 주었다. 그것도 3개를 주었다고 단군사실에서는 수량까지 못 박고 있다. 이 「천부인」을 방울, 칼, 거울로 해석하는 설도 있고, 『천부경』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지만, 「천부인」은 『천부경』이 아니라 삼위태백을 다스리는 권력으로서의 상징물, 즉 옥새와 같은 것이다.

자. 갑골문 『천부경』은 있을 수 없다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전문」,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전문」, [사진제공 - 이양재]

2019년에 어느 경매사에서 거금을 들여 낙찰받은 자료이다. 원고에 퇴고(推敲)가 보여 필자는 계연수(桂延壽)의 친필이 아닌가 여겼으나, 이유립의 제자 모 씨를 여의도에서 2019년 8월에 만나서 보인 결과 의외로 이유립의 필적으로 확인되었다. 필자는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기를 바랐는데, 이 자료의 필적이 이유립의 것이라면 계연수의 실체에 대한 나의 관점은 다시 예전처럼 계연수는 가공(架空)이 인물이라는 것으로 돌아갔다. 이 자료는 이유립이 계연수의 이름으로 『천부경도해』를 편찬히려 한 것 같다.

『천부경도해』는 전문(前文)을 포함하여 모두 8면이다. 이 글이 쓰인 종이는 1960년대에 시중의 문방구에서 팔던 시험지이므로 변색이 심하다. 그런데 『천부경도해』의 뒤에는 『다물구음(多勿矩音)』이란 책이 합본되어 있다. 『다물구음』은 후에 논하고자 한다. 『천부경도해』는 아래에 사진으로 전문을 소개한다. 첨부된 부분은 올린 후 다시 사진을 찍었다.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②①.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②①.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④③.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④③.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⑤④.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⑤④.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⑥⑤.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⑥⑤.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앞표지.⑥. [사진제공 - 이양재]
『천부경도해(天符經圖解)』 앞표지.⑥. [사진제공 - 이양재]

BC 1500년경의 갑골문은 대체로 4,000자 정도가 발견되었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9,353자가 수록되었다. 1716년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47,035자가 수록되었으며, 2008년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는 53,667자가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청소년 시절에 국어 교사가 “한자 6,000자만 알면 최고의 석학이 된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지난번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갑골문자를 만든 상(商) 왕조의 건국은 BC 1600년경이다. 즉 BC 1600년 이전에 갑골문자는 없었다. 그리고 갑골문은 1899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20세기에 들어와 규명되기 시작한 고대의 은허(殷墟)에서 나온 문자이다.

만약 단군사실의 「천부인」이 『천부경』이라고 해도, 그것이 갑골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1991년경에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 사진을 가지고 누군가가 필자를 찾아온 적이 있다. 붉은 종이에 쓴 81자의 『천부경』 사진이다. 필자는 가짜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 갑골문 『천부경』이라는 것은 문서로서 옛날에 만든 것이 아닌 이유가 있다. 근‧현대까지 우리 민족은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글을 써 내려갔다. 이를 내려쓰기라 한다. 우리 민족이 1914년 이전에 문장(文章)을 가로쓰기든 역(逆)가로쓰기든 한 예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은 역(逆)가로쓰기를 하고 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위로 역(逆)가로쓰기를 하는 것이다.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은 문장을 이렇게 쓴 유일한 예이다. 한편 극동 삼국은 모두 세로쓰기를 하고 있는데, 유태인들의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역(逆)가로쓰기를 하고 있다.

또한 그 문서는 고려 때 것이라 말하기에 필자가 가지고 있는 그 붉은 색종이와 같은 종이를 보여 주었다. 당시만 해도 필자는 1040년대의 고려초기부터 고려말까지는 100년 단위로 종이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초기부터 근래까지는 20~30년 단위로 여러 지역별 종이를 가지고 있었다. 서지학에 있어 종이의 시대와 지역적 특성 판별은 매우 중요하다. 지역마다 종이를 뜰 때의 재료에 차이가 있으며, 시대마다 종이는 크기와 두께를 달리한다. 필자는 종이를 통하여 그 시대의 경제 상태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려 때 종이는 백지(白紙)가 기본이면서도, 색지(色紙)는 금니나 은니로 사경을 쓰기 위한 짙은 남색의 감지(紺紙)와 상수리나무 염료를 입힌 상지(橡紙), 그리고 치자 염료를 입힌 황지(黃紙)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색지는, 정확히 말하여 적색(赤色)의 색지는 빠르면 영조(英祖, 1694~1776) 때, 확실한 것은 정조(正祖, 1752~1800) 때 와서야 궁중에서 비로소 사용되었다.

아무리 갑골문 『천부경』을 만들어 내놓아도, 그 행위는 어설프다. 필자가 보기에는 『천부경』 자체는 단군시대의 것이 아니다. 대종교 교리에 맞추어 191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한다.

차. 최근에 만들어 묻은 백두산 『천부경』

백두산 정상에서 갑골문 『천부경』이 발견됐다고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두산 정상에서 갑골문 『천부경』이 발견됐다고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백두산 정상에서 갑골문 『천부경』이 발견됐다고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 [사진제공 - 이양재]
백두산 정상에서 갑골문 『천부경』이 발견됐다고 북한 언론이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해방후 수십년간 여러 차례 파헤쳐지고 사람의 발길로 다져진 이 위치에서 해방후 75년만에 대리석 『천부경』이 나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부경』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한 백두산 정상의 그 위치는 『천부경』이 발견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이 대리석에 새겨진 『천부경』과 붉은 종이에 쓰여진 『천부경』을 화상으로 만들어 겹쳐보고 싶다. 필자는 똑 같이 일치하여 나올 것으로 예측한다. 

2020년 2월 28일 자 조선중앙티비는 “백두산 장군봉 마루에서 대종교 천부경이 새겨진 대리석과 삼각형 옥돌을 발굴했다”라고 보도하면서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 강좌장 교수, 리광희 박사와 같은 대학 조선어학부 교원 교수, 리동윤 박사의 증언”을 전했다. 단군을 상징하는 푸른색 삼각형 옥돌과 대리석 판으로 된 대종교 경전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유물을 발굴하게 된 것은 216사단 인민보안상 연대동무들이 작업 도중에 글이 새겨진 유물을 발견했다는 통보를 하여온 것에 기초해서 현지에 나가서 그 동무들과 함께 발굴”을 진행했다고 한다.

조선중앙티비에 나온 대리석 판 『천부경』에 새겨진 글자 꼴은 이른바 갑골문 『천부경』과 역(逆)가로쓰기한 것까지 똑 같다. 사진으로 볼 때 대리석 석질은 중국산 골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새겨진 문자를 붉은 물감으로 칠한 것 역시 중국인들의 제작 수법이다.

그런데 그 대리석 판 『천부경』이 나온 위치가 비정상적이다. 그 장소는 여러 차례 파헤쳐져 개조된 땅이다. 백두산은 북의 성역지로 함부로 올라가거나 파헤치지를 못한다. 누군가가 접근이 용이한 지역의 그 개조된 땅에 파묻고는, 일정 기간이 흐른 후에 발견한 척하며 국가에 보고하여 김일성대학교 교수들이 발표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여러 차례 파헤쳐졌던 땅에서 왜 이제야 나왔을까? 필자는 남측 『천부경』 신봉자 누군가가 중국에서 만들어 중국 국적의 조선족을 통하여 북측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그 대리석을 그곳에 파묻은 것으로 판단한다.

이 발견 소동은 남측의 일부 수구들의 공격 대상이 될수 있다. 북에서는 이 소동에 개입한 자들을 찾아내어, 국가가 개입한 소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카. 첨언 : 경고

『조선출판문화사 (고대~중세)』, 리철화 집필, 407쪽, 1995년 1월 20일,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사진제공 - 이양재]
『조선출판문화사 (고대~중세)』, 리철화 집필, 407쪽, 1995년 1월 20일,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사진제공 - 이양재]

1995년에 나온 이 책을 보면 남측의 1970년대 초반의 수준이다. 그 이유는 북에는 전래하는 고본의 수량이 적고 북의 학자들은 일본 등지의 해외에 있는 우리 전적 문화재를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북 안동(安東) 지역은 임진왜란이라든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등 큰 전란을 직접 겪지 않은 지역이다. 필자가 1980년대에 고서를 집중하여 수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시중에 유통되는 임란왜전 이전의 고본은 대다수가 안동과 그 인근 지역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간송미슬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안동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 한 예일 뿐이다.
지금 북쪽 지역은 전란을 많이 겪어 고본이 많지 않다. 현재 묘향산 보현사에 보존하고 있는 재조대장경도 일제 강점기에 찍은 것이다. 반면에 호남지역은 많은 전란이 휩쓸고 지나가 전존(傳存)하는 고본은 희소하다. 다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상권은 호남지역에서 나왔다. 

필자는 남측에는 이북보다 남아 전하는 고본(古本)이 최소 10배 이상은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남측의 학자들은 일본이나 해외에 있는 우리의 고본을 보고 연구하기가 북측의 학자들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따라서 이북의 서지학 수준은 남측에 비하여 매우 낮다.

1995년 1월 20일 자에 평양에서 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한 『조선출판문화사 (고대~중세)』를 보면 집필자 리 모에게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3년여 전인가? 북남을 오가는 어느 지인이 남측의 누군가에게서 “북에서 『환단고기』가 있을 수 있으니, 1911년 목판본을 찾아와”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견해를 물은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헛수고 말아요. 북에도 없어요”라고 단언하며 “『환단고기』는 목판본으로 출판한 사실이 없어요, 결국에는 가짜를 만들어 달라는 말”이라고 지적하며, “만들어 와 봐야 한눈에 구별이 된다”라고도 하였다.

필자는 이제 이 글의 끝에 여기에 덧붙인다. 필자는 중국의 어느 특정지역에서 한국의 골동품 위조 전문가들이 가리방 프린터본(本)으로 위조 서적을 만들었고, 이를 국내의 권 모씨가 유통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구체적인 서명은 민감한 문제라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적시하며 그 위조범들에게 자중하기를 강력히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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