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

나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역사서로 단정하지 않는다. 역사서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종교서로 보고자 한다. 종교는 뭐를 믿던 자유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는 황당성을 상당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서가 사실에 바탕하고 있더라도 종교서는 역사서와 구분되어야 한다. 세계의 종교서 『성경(聖經)』에도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등의 역사서가 있지만, 『성경』의 역사서는 유태인과 관련된 것이라는 지엽적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에서의 역사서도 사실에 기반을 둔 고대(古代)의 기록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종교의 근현대 종교서의 소개는 뒤로 미루고, 이번 제9회분 연재에서는 사서(史書)로서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논하고자 한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일연(一然, 1206~1289)이 1281년에 편저한 “『심국유사』는, 특히 「고조선」 사실(史實) 기록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리 민족의 창세기이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2, 조선초기 본, 목판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보 『삼국유사』 권제1~2, 조선초기 본, 목판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현존하는 『삼국유사』 권제1 가운데 가장 고본으로 공인(共認)되는 파른 손보기 박사 구장본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증앙도서관 소장. 판목이 닳지 않아 자획(字劃)이 분명한 것을 보아 조선초기에 판을 보각한지 얼마 안 되어 찍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고고학자 손보기(孫寶基, 1922~2010) 박사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분의 저서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문고판 소책자 한 책으로 된 책이었지만 필자는 3권이 파책이 되도록 보았고, 손 박사와 필자는 고서수집가로서 경쟁자이기도 했다. 아마도 의학사학자 및 서지학자 김두종(金斗鍾, 1896~1988) 박사라든가 서지학자 천혜봉(千惠鳳, 1926~2016) 박사, 그리고 출판학 및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 1926~1993) 박사 만큼 필자에게 준 영향은 컷다.
손보기 박사는 자신이 『삼국유사』 조선초기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후에 유족이 이 소중한 책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고 나서 2013년에 공개한 것이다.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을 우리 민족이 기록한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고문헌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단군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제17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 조(條)에서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이라 하며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라 한 것이 유일하다. 『삼국사기』는 오직 삼국에 관한 기록만 한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군을 기술(記述)하는 것으로부터 책을 시작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 『삼국유사』 고판본

일연의 『삼국유사』는 1281년에 편찬되었으나, 편찬 직후에는 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편찬 30년 후인 1310년대에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에 의하여 간행되었다는 책이 초판본인 것 같다. 이후 조선초에 중간되었으며, 1512년에도 다시 경주부에서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되었다. 이들 판본은 모두 목판본이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3~5, 조선초기, 목판본, 곽영대 소장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보 『삼국유사』 권제3~5, 조선초기, 목판본, 곽영대 소장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판목이 닳지 않아 자획(字劃)이 분명한 것을 보아 조선초기에 판을 보각한지 얼마 안 되어 찍은 것으로 보인다. 파른 손보기 구장본 권제1~2와 이 곽영대 소장본 권제3~5를 합하면 『삼국유사』 조선초기본이 한 질로 완성된다. 그러나 손보기 구장본과 곽영대 소장본은 지질이 다른 것을 미루어 보면 각기 다른 시기에 인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존하는 『삼국유사』로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초기의 판본이다. 조선초기의 판본으로는 고 손보기 박사가 구장(舊藏)하다가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기증한 『삼국유사』 권제1~2의 2권1책이 있고, 현재 곽영대(송은 이병직 구장본)가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 권제3~5의 3권1책이 있고, 동래 범어사에는 권제4~5의 2권1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1512년(중종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 임신본(中宗壬申年本, 正德本)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한 질 소장되어 있다. 이상의 조선초기 판본과 규장각 소장본은 국보(國寶) 제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1512년 중종 임신본은 이외에도 국내외의 몇 곳에 낱권으로 또는 완질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국내외 소장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묵서(墨書)를 한 수택본(手澤本) 5권2책이다. 이 순암 수택본은 이계복이 중간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한 것으로,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매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순암 안정복 수택본을 조선고전간행회에서 1932년에 원래의 크기로 영인한 후 오침(五針) 선장(線裝)하여 공급하였다.

나. 『삼국유사』의 내용과 비판

『삼국유사』는 5권2책으로 되어 있고, 권제1의 앞에는 「왕력(王歷)」이 있고, 이어서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아홉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참조 : 한국학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편)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다른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등등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장3 전면(前面), 중종 임신년(1512) 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출처 - 서울대 규장각]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장3 전면(前面), 중종 임신년(1512) 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출처 - 서울대 규장각]

판목이 닳아 자획(字劃)이 다른 면의 것보다 굵게 찍혔다. 즉 이 부분은 조선초기의 판으로 찍은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기이(紀異)」 권제일 장1 후면 2행부터 장2 후면 1행까지 “고조선(왕검 조선)”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꼭, 한 장 분량이다.

이 고조선 기록의 끝부분에서 기자(箕子)와 한분치삼군(漢分置三郡, 한사군)이 나오는데, 이에 근거하여 일연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였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편자 일연이 승려였으므로 『삼국유사』에 불교의 설화적 내용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하여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서에 인용되었고, 사대주의 역사학자들조차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다. 『삼국유사』의 가치

『삼국유사』가 조선시대 유교의 풍토에서는 허황되게 평가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연구하는데 원천적 보고(寶庫)이다.

이 책은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도 많이 인용되었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 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문학 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우리나라 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 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 기본적인 문헌이다.

『삼국유사』는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삼국사기』 화랑(花郞) 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의 찬(讚)이 있어 그의 시문학(詩文學)이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참조 : 한국학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편)

그러나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게 있다. 이 책의 체재, 즉 권차(卷次)‧편목(篇目)‧항목 등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고, 본문 또한 오자(誤字)‧탈자(脫字)‧궐자(厥字)‧중문(重文)‧혼효(混淆)‧전도(顚倒) 등으로 인한 변화가 있어, 각 판본의 정밀한 교감과 역사‧문학‧종교 등 종합적인 연구와 자세한 주석을 필요로 한다.

편자 일연(一然)이 이 책에 담고자 했던 본연(本然)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의 신앙이자 생각이다. 사대화(事大化)된 유교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만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신앙과 생각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라. 환인(桓因)인가? 환국(桓國)인가?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제일 장1 뒷면 2행부터 장2 뒷면 1행까지 “고조선(왕검 조선)”이 기록되어 있다. 꼭, 1장(2면)의 분량이다. 이 고조선 기록의 끝부분에서 기자(箕子)와 한분치삼군(漢分置三郡, 한사군)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일연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조선초기 본, 목판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조선초기 본, 목판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이 『삼국유사』 권제1 「고조선」에는 '‘口+土’'으로 되어 있다. 고(古) 불경에서도 '보이는 '‘口+土’'자는 ‘因’자의 이체자(異體字)로 고려대장경에도 같은 자형과 쓰임이 확인된다. (참조 : 연세대학교 박물관, 2016, 『파른본 삼국유사 교감』, 58쪽).
물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환인(桓因)'으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단군(檀君)의 조부로서의 환인과 환웅은 인격체이며 환국(桓囯)은 인격체라 할 수가 없어 고기(古記)의 문맥(文脈)에도 맞지 않는다. 특히 필자는 중종 임신년 본의 ‘囯’자를 ‘因’으로 고친 것은 이마니시 류가 아니라 순암 안정복으로 판단하며, 그것은 책을 볼 때 발견하는 오자(誤字)를 독자가 고쳐 놓는 수택본(手澤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않고 문맥도 파악 없이 판각(板刻) 오자(誤字)에 집중하여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桓國)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고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몰상식한 행위로 비판 받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古朝鮮)」 기사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들 사이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고기운석유환인(古記云昔有桓因)”이란 부분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에는 '桓囯'으로 되어 있는데,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던 순암 수택본에는 ‘囯’자를 ‘因’자로 묵서(墨書)로 고친 것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이마니시류가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친 것은 순암 안정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장1 후면(後面), 「고조선」 조(條), 중종 임신년(1512) 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출처 - 서울대 규장각]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장1 후면(後面), 「고조선」 조(條), 중종 임신년(1512) 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출처 - 서울대 규장각]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은 「기이 권제일」의 앞 두 장은 자획(字劃)의 굵기가 다른 면의 것보다 가는 것을 보면 이 권제일의 앞 부분 두 장은 1512년에 보각(補刻군)한 판이다. 판을 보각하면서 환인(桓因)을 환국(桓囯)이라 오각(誤刻)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4행11자에서는 나라 ‘국(國)’자를 ‘국(國)’으로 제대로 판각하였는데, 5행4자에서는 ‘囯’자로 판각하고 있다. 이것은 ‘囯’자가 ‘국(國)’을 의미하는 글자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은 「기이 권제일」의 앞 두 장은 자획(字劃)의 굵기가 다른 면의 것보다 가는 것을 보면 이 두 장은 1512년에 보각(補刻)한 판이다. 따라서 이보다 앞선 조선초기의 판본으로 보각판의 오류를 교감할 수 있다.

현존하는 『삼국유사』 권제1 가운데 가장 고본으로 공인(共認)되는 파른 손보기 박사 소장본 『삼국유사』 권제1에는 ‘口+土’으로 되어 있다. 고(古) 불경에서 보이는 ‘口+土’은 ‘因’의 이체자(異體字)인데, 고려대장경에도 같은 자형과 쓰임이 확인된다.(참조 : 연세대학교 박물관, 2016, 『파른본 삼국유사 교감』, 58쪽).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지리지.(부분) [사진제공 - 이양재]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지리지.(부분) [사진제공 - 이양재]

“(중략)....., 靈異,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이하 중략)....” 
“(중략).....,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이하 중략)....” 

물론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에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1454년 편찬을 완료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단군의 조(祖)로서의 환인(桓因)과 부(父)로서의 환웅(桓雄)은 인격체이며 환국(桓國)이 나라의 이름이라면 인격체라 할 수가 없어 고기(古記)의 문맥에도 맞지를 않는다. 특히 필자는 중종 임신년 본의 ‘囯’자를 ‘因’으로 고친 것은 이마니시류가 아니라 순암 안정복으로 판단하며, 그것은 책을 볼 때 발견하는 오자(誤字)를 독자가 고쳐 놓은 수택본(手澤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않고 문맥 파악도 없이 오자에 집중하여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시도한 것처럼 결국에 가서는 「고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본 연재의 제1회 기고 ‘사색을 시작하며’의 ‘(4) 민족성을 말살하는 법’에서도 밝혔듯이 이는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파괴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마.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의 실존성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은, 유태교나 기독교의『구약(舊約)』 「창세기(創世記)」와 같은 것이다. 「창세기」가 유태인 중심의 신앙과 역사의 서술이므로 타민족이 보기에는 오류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대한 신념이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유태교든 기독교든, 심지어 회교(回敎)도 까지도 믿음이 성립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에서 단군에 대한 부분이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성립할 수가 없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기에 단군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부정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심각성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사상의 일부에 단군 말살의 의도를 숨겨 뒤섞어 놓은 데 있다. 즉 진실에 근거하여 거짓을 뒤섞어 놓아 궤변을 떨며 민족의 정체성을 기만한 것이다. 환인(桓因)을 환국(桓囯)으로 오인(誤認)하게 하여 환인(桓因)의 의미를 부정하는 순간, 단군의 실체와 우리 민족의 천손사상(天孫思想)이 부정된다. 그러므로 제2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이유립(李裕岦, 1907~1986)과 황상기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후 우리 사학계의 큰 수확은 한반도 내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중국에도 상당수 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0여년간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漢字)는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던 창힐(蒼頡)이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대략 BC 3,000년 정도 무렵으로 본다. 즉 황제이든 단군이든, 그들은 석기시대 이후 초기 문명시대의 인물이다.

석기시대 이후 초기 문명시대에 고조선, 즉 단군조선은 우리 역사에 실체로서 존재하였다. 아무리 단군의 존재를 끌어 올린다고 해도 기존의 단군 기원 BC 2333년에서 300~400년 정도이어야 한다.

왼쪽 사진은 북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1962)에서 단군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북의 ‘과학원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1964년에 일본에 있는 총련계의 ‘학우서방’에서 영인하였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1978년경에 처음 입수하여 『국정국사교과서의 고칠 점들』이라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역사로 보았던 자료집(1979년 2월 20일자 서문)을 낼 때, 이 책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사진제공 - 이양재]
왼쪽 사진은 북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1962)에서 단군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북의 ‘과학원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1964년에 일본에 있는 총련계의 ‘학우서방’에서 영인하였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1978년경에 처음 입수하여 『국정국사교과서의 고칠 점들』이라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역사로 보았던 자료집(1979년 2월 20일자 서문)을 낼 때, 이 책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이 책의 존재를 널리 분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이다. 이 자료집을 만들 당시에 안호상 박사는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당시 중앙정보부 고위직에 있던 어느 제자가 ‘고조선을 연구한 책이 북에서 나왔다’며 전해 주었다”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원래 안호상 박사는 민족주의자 상향이기는 하지만, 반공(反共) 안물로서 후일 대종교(大倧敎) 총전교를 지내다가 1995년 4월에 당시 정부의 승인없이 방북한 바 있다. 

참고로 북한은 “1993년 10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사람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라고 한다.

흔히 고고학상에서 연대를 측정하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측정 한계성이 있어 측정 연대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1993년에 5011년 전이면 BC 3018년을 말하는데 측정 오차를 ±300년으로 잡아도 단군릉 출토 유골은 황제헌원(黃帝軒轅) 보다도 이전의 유골이 되는 것이고, BC 3018년이면 단군 기원에서 685년전이다.

현재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황제헌원은 “BC 2717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BC 2698년에 즉위하였고, 119세 되는 BC 2599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주장대로 황제 즉위년을 BC 2698년으로 볼 경우에는 단군의 즉위 연도 BC 2333년 보다 365년이 앞선이다. 이렇듯 단군의 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오는 초기 문명시대이다.

『삼국유사』 권1 「고조선」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그 초기 문명시대에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부인(天符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단군신화와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을 비추어 볼 때 거울(鏡), 검(劍), 방울(鈴), 북(鼓), 모자(冠) 등의 무구(巫具)가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고, 현재 사용되는 민속상의 무구와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과 비교해 볼 때 천부인 세 개를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천부인 세 개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린다는 의미의 세 개 인수(印數)를 말한다는 주장도 있고, 천부인을 「천부경(天符經)」과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필자는 천부(天符)와 인(印)을 구분할 수도 있다고 본다. 천부인과 천부경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천부인에 대한 기존 이론에서 천부인을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로 보는 것과 북의 단군릉에서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단군은 청동기시대 초기의 인물이라는 명제(命題)가 성립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바. 신시(神市)의 의미

환웅이 다스리던 신시는 그 뒤 환웅이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평양을 도읍지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 현재 신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로 “신시는 신정시대에 도읍 주위에 있던 별읍(別邑)으로서 삼한의 소도와 성격이 같은 신읍이었다”는 해석이 있었고, 둘째로 “신시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으로서 환웅을 가리키며, 그것은 조선 고대의 국가들에서 왕을 뜻하는 ‘신지(臣智)’가 존칭화 한 것이다”라는 해석이 있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필자는 「고조선」조 기록에 있는 환웅의 신시(神市)를 글자 그대로 시(市)로 본다. 즉 신시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市場)이다. 화폐가 없던 시대에 서로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하는 장소, 즉 원시 경제 체제가 확립된 장소가 신시인 것이다. 이러한 신시는 물건의 교환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노동력의 변화도 가져오며 철기(鐵器) 기술의 발달도 필연적으로 가져 온다.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노동 집약적인 인력 동원으로 만든 고인돌과 청동기 기술로 만든 비파형 단검(短劍) 등이 고조선의 유물로 확정되고 있는데,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나타나는 지역 즉 현재 중국의 동북 삼성 전체와 산동반도, 그리고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대부분이 고조선의 강역(疆域)이거나 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임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고인돌이라는 보편적 유적과 비파형 단검이라는 독특한 유물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음으로써, 고조선의 영역과 실체는 거의 대부분을 규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황당한 『환단고기』에 매달려 우리 주변국들의 역사학계에 떼를 쓰는 듯한 인상을 남겨 우리 민족의 민족사관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는 질색할 만한 기가 막힐 일이다. “스스로가 민족사관을 말한다면서 어찌 이렇게 우리 민족의 본질과 정체를 왜곡할 수가 있는가? 그들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한 번이라도 신시(神市)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 일이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사. 추기(追記) 1 :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에 환웅이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風伯) 등등 3,000명의 중요한 인물들을 이끌고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천손사상(天孫思想) 또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의미하여, 경제사학적(經濟史學的)으로 원시적 시장경제의 출현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史實)이다.

기원전 24세기에 3,000명의 무리라면 수만 명을 통제하거나 다스릴 수 있는 거대한 부족국가(部族國家)로서, 이것은 고대의 시장경제가 싹트고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이다. 이러한 신시의 적통성(嫡統性)을 이은 것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산다. 특히 고대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 있어야 세력도 군대도 형성된다.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고대 민족의 강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이다.

아. 추기(追記) 2 :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저하면서 『위서(魏書)』라든가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대로 주(註)를 달았다. 일연이 단 주는 부정되는 경우가 있다. 일연의 주가 틀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환인을 “제석(帝釋)”이라 주를 단 것이라든가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太伯山)”을 “묘향산(妙香山)”이라 주를 단 것 등이다.

그러나 대체로 민족사학자들은 환인을 “제석”이라 주를 단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보며, 아울러 여기에서의 태백산의 ‘백’은 ‘우두머리 백(伯)’자이므로 조종(祖宗)의 산(山) 백두산(白頭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태백산(太伯山)은 백두산의 이칭(異稱)이다.

이렇게 일연의 이해 부족으로 단 주라든가 중화 사대주의적인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태백산(太伯山)이 후일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백산(太白山)으로 오인(誤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심국유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원문(原文)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支柱)이다.” 누구든 민족사학자임을 자칭한다면 『심국유사』 「고조선」조의 사실(史實)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그 사실(史實)은 우리 민족의 창세기(創世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환단고기』에 대하여 갖게 되는 분노는, ‘『환단고기』는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무시하고, 식민사관을 극복한답시고 황당사관을 주장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