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김구 암살사건과 평화적 통일국가 수립 가능성의 좌초

1948년 8월 초대 내각 구성 후 분열되었던 이승만과 한민당은 1949년 전반기 다시 하나로 힘을 합쳤다. 5.10단선 후 초대 내각 구성 과정에서 한민당은 이승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었고, 한민당은 정부에 대한 엄격한 검증을 하겠다며 야당 역할을 자처하였다. 단정 수립 과정에서 연합했으나 권력배분을 두고 갈등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은 내부의 권력배분을 놓고는 갈등, 대립했지만, 남북협상파, 의회 개혁파 세력, 좌익에 대해서는 단결해 싸웠다. 그 과정에서 1949년 6월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국회프락치사건, 김구암살사건이 연속적으로 휘몰아치며 일어났다. 일부 정치학자들이 ‘6월 공세’라고도 부르는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극우연합이 남한 내에 존재하고 있던 남북협상파, 중도파, 의회내 개혁세력, 친일파 청산을 추진하던 민족주의세력에게 총공세를 가해 치명타를 입힌 ‘쿠데타적 사건’이었다.

1950년 5월20일 국민보도연맹 월간지  창간호 편집회의. 콧수염을 한 오제도 검사가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 왼쪽은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인 정백, 오른쪽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다.
1950년 5월20일 국민보도연맹 월간지 창간호 편집회의. 콧수염을 한 오제도 검사가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 왼쪽은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인 정백, 오른쪽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다.

초대 내각에서 이승만에게 물을 먹은 한민당은 이후 효과적인 권력투쟁을 위해 신익희의 대한국민당, 이청천의 대동청년단, 무소속 일부를 규합해 1949년 2월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출범시켰다. 임시정부 출신의 신익희, 이청천 등이 가세함으로써 친일파 정당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70여석을 확보해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야당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이승만 진영에서도 윤치영, 임영신 등이 주동이 되어 독촉국민회의 대동청년단, 무소속 일부를 합쳐 대한국민당(국민당)을 결성, 여당 역할을 자처하였다. 국민당은 71석으로 민국당보다 많았으나 무소속 중 상당수가 야당 성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은 안정적이지 않았다.(주1)

서거 당시의 김구 모습. (사진=백범기념사업회)
서거 당시의 김구 모습. (사진=백범기념사업회)

그러나 1949년 초부터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고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미군철수, 남북협상, 농지개혁 등의 요구를 제기하고 나오면서 이승만 정권은 흔들렸다. 특히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 정권의 가장 핵심 기반인 경찰 내 친일파 제거로 권력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같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49년 2월과 4월, 5월 세 차례에 걸쳐 내각을 개편하면서 김효석(내무), 윤보선(상공), 장기영(체신), 그리고 기존의 김도연(재무) 등 민국당(구한민당) 인사들을 대거 정권에 기용하였다. 6월 공세를 위한 이승만과 한민당(민국당)의 합작(극우연합)이었던 것이다. 민국당은 경찰과 우익청년조직(내무), 원조자금과 정부예산의 집행(재무), 귀속기업체와 관련된 이익 등(상공, 체신) 사실상 정부의 핵심요직을 독점함으로써 반민특위 와해 공작, 국회프락치 사건의 조작, 그리고 김구 암살 등 일련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물리적·물질적 기반을 확고히 장악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승만과 민국당은 다시 결별, 대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49년 6월 공세의 마지막을 장식한 김구 암살사건의 뿌리는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김구에 대한 음해공작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부터였다. 극우세력은 여순사건의 배후가 김구라며 음해공작을 노골적으로 폈고, 숙군 과정에서 오동기 소령 등 김구를 추종하던 민족주의 계열 군인들도 처형되었다. 이때 김종석, 오일균, 최남근 등 일군 출신이지만 중간파 민족주의 성향의 장교들도 좌익으로 몰려 다수 처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극우세력은 의회 바깥에서 의회 내 소장개혁파와 정신적 유대를 갖고 미군철수, 남북협상 등을 주장하면서 통일운동을 펴고 있던 김구 제거 계획을 1949년 초부터 준비하기 시작해 늦어도 1949년 봄에는 구체적 계획을 마련하였다.(주2)

1949년 7월 김구 주석 국민장 장례식 모습(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1949년 7월 김구 주석 국민장 장례식 모습(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김구 암살사건에는 육군 소위 안두희를 하수인으로 내세운 군부(CIC, 헌병대, 포병사령부, 육군본부 등)가 전면에 나서 실행하였으나 그 외에도 경찰과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테러집단, CIA·CIC 등 미국 정보기관, 8.8구락부 등 우익정치인사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승만이 어떻게 개입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아직까지 이승만이 직접 지시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이 김구 암살 이후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암살자 안두희를 보호하도록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95년 12월 15일에 발표된 국회진상규명소위원회 보고서는 “이승만 박사는 암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직접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부하들은 이 박사의 뜻에 맞추어 알아서 암살을 감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주3) 국회 보고서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문제는 1973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는지 하는 문제와 너무 유사한 부분이 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자료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 당시 박정희 1인 중심의 초강경 권위주의체제에서 이후락 부장이 이철희의 반대에 부딪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역정을 낸 적이 있고 김기완 공사가 ‘박 대통령의 결재를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곧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정황과 더불어, - 납치공작이 한창 진행 중이던 73.7.27. 김대중의 반유신 활동사항을 종합한 내용이 박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되었을 때 공작진행과 관련한 상황도 포함되었을 개연성이 높으며, - 박 대통령이 사건 발생 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하였고, 김종필 총리를 파견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수습토록 한 점 등을 종합분석해 볼 때 박 대통령의 직접지시 가능성과 더불어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주4)이라고 결론 내렸다.

김구 주석 암살범 안두희의 젊은 시절(좌)과 나이든 모습.
김구 주석 암살범 안두희의 젊은 시절(좌)과 나이든 모습.

김구 암살사건, 조봉암 사법살인, 김대중 납치사건은 양상이나 결과가 다소 달랐지만, 독재자의 정적 암살 (기도)사건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백범 암살 사건은 관련 인물도 많고 복잡하며 그 내용 또한 간단치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더 이상 사건의 내용이나 관련자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백범 암살 사건이 가져다준 역사적 파급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자. 김구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해방 후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할 것이고, 실제로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등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김구가 평생을 ‘불구대천의 원수 왜적’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해방 후 반탁운동을 선두에서 주도함으로써 통일적인 임시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어렵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남북협상 참여를 두고는 이승만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하는 수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옳지 않은 이야기다. 김구가 마지막까지 이승만과 합작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모색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전제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남북연석회의 참석은 그에게 결코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 그는 남북에 분단 정부가 들어설 경우 내전으로 비화할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보고, 이 같은 민족사의 참극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통일정부를 위한 마지막 길에 나선 것이었다. 남북에 두 개의 분단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는 통일운동을 계속하였고, 미군 철수, 남북협상 등을 통해 민족자주적으로, 또 평화적으로 한반도 통일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김구는 현실적인 통일운동 방안을 위해 암살 전에 이듬해(1950년) 5월의 총선거에 참여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구의 현실정치 참여는 대통령 선출에 분명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이승만에게 위협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런 움직임이 그의 암살을 앞당기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주5)

김구는 평생을 민족을 위한 투쟁 속에서 살다가 갔고, 그 때문에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당대 현실정치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남과 북이 더 이상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할 길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남북연석회의 당시 김일성에게 ‘내란 충돌은 발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고 다짐까지 받았던 김구가 남한 내부의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상황에서는 김일성으로서도 더 이상 김구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명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북조선은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군사력을 강화하고, 경제계획을 추진 빠른 경제발전, 회복과 함께 사회주의적 개조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결정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중국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 중국혁명이 성공함으로써 김일성 등 북조선 지도부의 자신감은 배가되었고, 이는 결국 군사력을 동원한 통일의 추진(국토완정론)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일민주의 제창과 농지개혁 시행

남이든 북이든 정부 수립 과정에서 분열되고 혼란해진 정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였다.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열망을 반영한 개혁적 조치들이 시급히 시행되어야 했다. 특히 남한의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농지개혁, 친일파 청산, 민생 안정 등 미군정 시기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그 정치적 동맹자인 한민당은 민중이 요구하는 개혁적 조치들을 시행할 생각이나 의지가 없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서는 친일파 정당이란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던 한민당 뿐만 아니라 친일 경찰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도 강력히 반대했다. 남한 내부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관련해서는 민심을 얻음으로써 경쟁자인 좌익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아예 배제한 채 오직 경찰력과 물리력으로써 탄압을 통해 와해시키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오직 남한 사회의 안정은 반공국가 건설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한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특히 여순 사건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 국민보도연맹 결성, 청년단 통합과 일원화 및 준군사조직화, 학도호국단 등 학생들의 동원체제 정비, 반공 캠페인과 주민 감시체계의 강화 등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 일색의 경직된 사회로 만들었다.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 체계표.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 체계표.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이념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하였다. 1949년 4월 이승만은 “하나의 백성”(一民)으로서 함께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공산주의를 배척하자며 ‘일민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일민주의가 “신흥국가의 국시(國是)”라고 주장하였다.(주6) 그러나 일민주의는 정리된 이념이 아니었고 체계적인 내용도 마련되지 않았다. 단지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하나의 유일당 혹은 국민의 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일민주의’로 표현한 것이었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이승만의 초기 이데올로그로 활약했던 양우정 등이 일민주의를 이론화하고 보급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일민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특정세력의 계급독재를 옹호하는 반(反)민족적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대한민국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 개혁을 통해 양자를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일민주의는 점차 친자본주의, 친미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지도자를 강조하면서 반공파시즘, 국가주의로 변질되고, 이승만 우상화, 이승만 독재 정치를 위한 이데올로기 도구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자신이 국부(國父)로 추앙되고,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사심이 있는 당파, 그래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주7)

농촌 현장을 찾은 이승만. 남한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야심작이었다.
농촌 현장을 찾은 이승만. 남한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야심작이었다.

한편, 이승만과 한민당은 대부분의 정책에서 일치했지만 농지개혁에서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미군정 시기부터 농지개혁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한민당과 그 뒤를 이은 민국당은 정부 수립 후에도 과거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채 지주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이승만의 입장은 달랐다. 지주적 이해가 없었고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기 원했던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기 위해 미군정이 농지개혁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승만이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한민당의 반동적인 농지개혁 기도를 막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깊은 정치적 의도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농지개혁 과정에서 농민들의 인기를 얻은 조봉암은 이후 진보적인 야당의 정치거물로 성장, 이승만의 정적으로까지 발전했으나 1950년대 후반 결국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적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주8)

이승만 정권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농지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봉암. 이승만 정권 말기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승만의 정적에 대한 ‘사법살인’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농지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봉암. 이승만 정권 말기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승만의 정적에 대한 ‘사법살인’이었다.

농지개혁법안은 논란 끝에 1949년 6월 21일 국회를 통과했으나 1950년 3월 일부내용 개정과 함께 최종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농지개혁법은 처음 조봉암의 농림부 안과 기획처안(정부공식안), 그리고 민국당이 주도한 국회 산업위원회안을 절충한 것이었는데, 자본주의적 방식으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이었다. 남한의 농지개혁이 개혁적이었던 것은 농지개혁에 대한 이승만의 적극성, 조봉암의 강한 민국당 견제, 농민과 사회적 여론의 압박, 북한 토지개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주9)

남한의 농지개혁은 한계와 문제점이 없지 않았으나 한국 사회의 반봉건적 소작제도의 해체와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립, 일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통한 자본주의 발전에 참여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주계급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산업자본으로 전화하는데 실패하고 몰락하였으며, 이는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했던 민국당(한민당)의 물질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주10) 군부숙정처럼 농지개혁법 통과(전쟁 발발로 경남 일대를 제외하고 전국적인 본격 시행은 전쟁이 끝난 뒤 이뤄짐)도 한국전쟁에서 한국정부의 유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전에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지 않았더라면 한국 민중의 남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훨씬 미약했고 남한 정권의 정치적 기반도 그만큼 취약했을 것이다.(주11)

농지개혁 문제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한민당(민국당)의 정치, 사회 정책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이승만과 한민당은 통일문제에서도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힘으로 상대를 압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력통일 방안이었고, 이승만은 이를 ‘북진통일’이란 선동적인 구호와 결합해 표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북조선에서는 통일방안으로 ‘국토완정론’을 들고 나왔다. 본격적으로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무력공격을 통해 제거하겠다는 사고가 등장한 것이다.

북조선의 국토완정 제기와 정치역량 통합

1948년 9월 10일 북조선 정권 수립 마지막 날 김일성 수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개 정강(주12)을 발표했다. 그 첫째가 조국통일과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이었다. 김일성은 “전체 조선인민을 정부의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원할 것이며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되는 소미 양국 군대의 동시철거에 관한 소련정부의 제의를 실천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먼저 민족통일을 언급한 것이다. 공화국 존립의 이유이자 근거였던 셈이다. 셋째로 일제 법령과 남한의 반민주적 법령 무효 선언과 북조선의 민주개혁의 공고 발전 및 전조선적 실시를 천명했다. 북조선의 통일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나고 있다. 남한은 민족반역자들이 조작한 제국주의 괴뢰정부이며, 북조선은 전인민의 총의로 수립된 중앙정부로서 통일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주13)

북조선 정부 수립 4개월 후에 있은 1949년 신년사에서는 김일성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강력히 드러냈다. 김일성은 “비록 지난 해에 우리민족은 전국적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머지않아 장래에 전국적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할 수 있는 기초와 조건들을 갖추어 놓았다”고 전제한 뒤, 미군과 유엔한국위원단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945년에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은 1948년 말 이미 철수한 상태였고, 북조선으로서는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김일성은 이 신년사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이라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13번이나 사용하였다. 이른바 ‘국토완정론’의 전면적인 등장인 셈이었다. 이후 국토완정론과 완전자주독립은 항상 붙어 다니는 말이 되었다. 북조선의 입장에서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이 된 것이 아니며, 북조선에 의해 국토완정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주독립이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1949년 김일성 신년사를 계기로 국토완정은 북산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주14)

항일빨치산 출신 북한 최고위 인물들이 북한에서 생산한 소련제 무기를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민족보위상), 김책(부수상), 김일(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성(수상),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이들은 특히 군대를 중시, 인민군 최고 상층부를 장악했다.
항일빨치산 출신 북한 최고위 인물들이 북한에서 생산한 소련제 무기를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건(민족보위상), 김책(부수상), 김일(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성(수상),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이들은 특히 군대를 중시, 인민군 최고 상층부를 장악했다.

북조선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에 대비되는 것이 남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애초 단선과 단정을 주장했던 탓에 통일문제를 적극 제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민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했으며, 한편으로는 통일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가는 오히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파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 언급을 회피하려 했다. 이승만은 통일론이라고 할 것이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북진론 또는 북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을 적극 제기한 것은 1949년 9월 30일 이후부터였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고문이었던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행동을 취하여 우리에게 충성스런 북한 공산군과 합세, 그 잔당들을 평양에서 소탕해야 할 가장 심리적인 호기라고 나는 느끼고 있소. 우리는 김일성 부하들을 더러 산악지대로 몰아내서 그곳에서 그 자들을 서서히 굶겨 항복시키게 될 것이요. … 우리 국민들은 북진을 부르짖고 있소.”라고 썼다.(주15)

북진이다 통일이다-이승만의 연설 모습(1953.6.25)
북진이다 통일이다-이승만의 연설 모습(1953.6.25)
휴전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플래카드. 북진통일은 이승만과 주변 인사들이 끊임없이 내뱉은 구호였다. 그러나 실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나 내부 통합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는 미국과 내부 국민을 향한 협박성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휴전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플래카드. 북진통일은 이승만과 주변 인사들이 끊임없이 내뱉은 구호였다. 그러나 실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나 내부 통합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는 미국과 내부 국민을 향한 협박성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1949년 10월 7일에는 이승만이 미국연합통신(UP) 부사장 존스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주와 한국간의 국경은 38선보다 방위하기가 용이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미국의 경고 때문에 참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10월 하순과 11월 초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났을 때도 그대로 했다. 그 뒤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여러 차례 언급했으나 통일론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북한 공산집단을 몰아내야 한다는 구호의 성격이 강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겨냥해 무기지원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정치적 반대세력을 협박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측면이 컸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도 이승만 정권은 국방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북진통일은 호전성을 드러냈을 뿐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허풍’이었던 셈이다.(주16)

그러나 북조선은 국토완정론을 구호 차원으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1949〜1950년에 소련의 지원 아래 동구권과 중화인민공화국, 북베트남 등의 외교적 승인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49년 3월 김일성·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해 상품유통, 차관, 기술원조, 문화교류 등의 협정을 맺었다. 인민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고, 1949〜1950년에 걸쳐 2개년인민경제계획도 수립, 시행하였다. 2개년 계획을 통해 해방 직후 파괴된 경제를 복구해 생산력을 1944년 수준으로 회복하여 ‘민주기지’를 떠받칠 물질적 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정규학교를 정비하고 대학도 15개나 설립하였으며, 문맹퇴치운동을 통해 성인의 문맹률을 거의 해결하였다.(주17)

조선인민군 창건 1주년 기념대회. 북조선은 정부 수립 후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조선인민군 창건 1주년 기념대회. 북조선은 정부 수립 후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정부 수립 준비과정과 그 후 북조선은 정치역량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1948년 8월 조선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때부터 상부는 사실상 통합되었다. 1949년 6월 30일 북로당과 남로당은 정식으로 통합되어 조선노동당으로 발전, 출범했다. 남북노동당 통합 과정에서 정부 수립 때 내각에서 소외된 소련파와 남로당이 자기 몫을 충분히 챙기는 바람에 김일성의 지위는 북로당 시절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1949년 9월 24일에 열린 북로당 제3차 회의에서 소련계가 약진했고, 당조직 부장을 맡고 있던 허가이가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사실상 당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위원장인 김일성은 내각 수상을 맡고 있었으므로 누군가는 당을 관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주18) 소련계가 당의 중추를 장악한 것은 이들이 북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당의 실무경험을 가진 집단이었고, 내각으로 우수한 인력이 빠져나갔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노동당의 합당에서 박헌영의 남로당계열을 견제하려는 김일성이 의도가 작용한 탓이었다.(주19)

남북노동당의 합당은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통합한 성격이 강했다. 1949년 합당 당시 북로당은 북한지역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한 명실상부 전위조직이었던 반면, 남로당 조직은 큰 타격을 입어 남한지역에서 거의 궤멸상태로 지하지도부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노동당의 출범으로 남북의 공산주의 정치역량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단일지도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보면 해방공간에서 형성되었던 남한혁명세력의 몰락과 남한혁명운동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노동당은 단일지도체제가 되기는 했지만 당 내부에서 유일적 지도가 실현되지 못하는 파벌연합적 성격이 존재하였다. 결국 이는 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노당의 숙청과 종파투쟁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주20)

남북노동당의 통합과 함께 남북 민전의 통합에도 착수하였다. 1949년 6월 26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하나로 통합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을 결성하였다. 조국전선은 남북에 존재하던 모든 정치적 역량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로 남한을 겨냥한 것이었다. 조국전선은 결성 직후인 1949년 6월 말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방안을 제기하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7일에는 남북 간의 최고입법기관 준비 선거를 위해 남북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를 개최하자고 평화공세를 펴기도 했다.

전쟁 전야: 남북의 무력 충돌 격화와 북조선의 군사력 강화

1948년부터 38선 경비를 남북 양측 모두 미군과 소련군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으로 넘겨주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남측 38선 경비를 점차 한국군이 넘겨받기 시작했다. 38선 북측도 인민군이 넘겨받기 시작해 1948년 말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인민군이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1949년 1월부터 양측 군대의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어떤 때는 대대급 전투로까지 확대되었고, 비행기가 뜨고 함정이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될 때까지 38선에서 874회나 교전이 벌어졌다. 매일 두 번 이상의 충돌이 벌어진 셈이다. 이 같은 교전상태는 전면전이 아니었을 뿐 전쟁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주21) 이 상황을 연구자들은 ‘작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북 간의 교전이 곧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같은 충돌은 남북 간의 대결이 무력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했다. 일반국민들까지도 늘 언제 전면전이 터질지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후 군부숙정과 38선 충돌로 남북간 군사교전이 상시적으로 벌어져 ‘작은 전쟁’ 상태가 되었다. 이 무렵 군인들의 월북사건과 월남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 강태무와 김업을 선전하는 북조선 선전물.
여순사건 후 군부숙정과 38선 충돌로 남북간 군사교전이 상시적으로 벌어져 ‘작은 전쟁’ 상태가 되었다. 이 무렵 군인들의 월북사건과 월남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 강태무와 김업을 선전하는 북조선 선전물.

38선을 사이에 둔 남북 군대 사이에 첫 대규모 교전이 벌어진 것은 1949년 5월이었다. 이후 1949년 가을까지 전투가 더욱 빈번해졌다. 양측의 38선 충돌은 북조선의 게릴라 남파와 연계되어 벌어졌다. 남로당이 내려 보내는 무장 게릴라의 활동과 맞물려 38선의 전투가 격화된 것이다. 38선의 충돌과 교전은 남북한 쌍방이 서로 도발했다. 객관적으로 공격의 횟수는 쌍방이 비슷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남한측이, 어느 지역에서는 북조선측이 더 많았다. 초기에는 남한이 좀더 공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북조선측이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북한이 더 공격적이 된 것은 남한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게릴라 투쟁을 도와주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 38선 충돌은 황해도 옹진반도에서부터 강원도 양양까지 38선 전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니었다. ‘작은’ 전쟁이었다.(주22)

38선을 둘러싼 남북 군대 사이의 교전은 1949년 가을을 고비로 점차 줄어들었다. 1950년에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는 남에서 벌어지고 있던 게릴라 투쟁과 관련이 있었다. 북에서 남파된 게릴라 역량은 1949년 9월 절정에 달했다. 남한 게릴라들은 정규군 편제인 병단으로 재편되었고, 그 아래 대대, 중대, 소대, 분대 등 군대 편제까지 갖추고 활동했다. 1949년 가을 남한 게릴라는 총력을 기울여 공격을 감행했다. ‘아성공격(牙城攻擊)’으로 불리는 행정중심지의 관공서 및 주요 시설물에 대한 공격과 파괴 등이 잇따랐다. 남한 정부는 게릴라의 공격에 크게 위협받았다.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 일부 산악지역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1949년 겨울에서 1950년 봄 사이 겨울에 남한 군경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남한 게릴라는 많은 부분 전투력을 상실했다. 1950년 봄 이후 남한에서의 게릴라 투쟁은 활발하지 못했다. 이 무렵에는 38선에서의 교전이 뜸해지고 소강상태를 유지했다.(주23)

남로당 지하지도부 총책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로 남로당은 사실상 궤멸상대가 되었다.
남로당 지하지도부 총책 김삼룡과 이주하의 검거로 남로당은 사실상 궤멸상대가 되었다.

1949년 가을부터 1950년 봄 사이에 산악지역에서 대대적인 게릴라 토벌작전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마을 지역에서는 좌익 검거 작전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좌익조직의 파괴 과정에는 국민보도연맹이 중요한 역할이 담당했다. 정부당국은 관제조직으로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30만 명 이상의 조직원을 확보하고 있던 국민보도연맹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좌익조직원 색출 작업에 나섰다. 경찰과 검찰은 보도연맹원들에게 과거의 활동에 대한 확실한 전향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지를 배신하고 그 명단을 제출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로당 등 좌익조직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남로당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정부당국의 공세로 수많은 좌익들이 전향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익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 정보는 조직파괴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조직 활동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지하로 들어가 잠복하거나 점조직 형태로 최소한의 연락관계만 가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1950년 3월 말 남로당 지하당 총책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되면서 무너졌다. 남로당 조직은 완전히 무너졌다.(주24)

좌익파괴에 동원된 국민보도연맹 조직도(미 국립문서기록청, 1949.6.2 주한미대사관이 미국무부에 보고한 국민보도연맹 종합보고서)(부산일보 2004.7.9.자 보도).
좌익파괴에 동원된 국민보도연맹 조직도(미 국립문서기록청, 1949.6.2 주한미대사관이 미국무부에 보고한 국민보도연맹 종합보고서)(부산일보 2004.7.9.자 보도).
국민보도연맹은 관제조직으로 남로당 등 좌익파괴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비상시 예비검속 등을 통해 대량학살의 수단으로 전락, 한국전쟁 후 대량민간인 학살의 통로가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관제조직으로 남로당 등 좌익파괴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비상시 예비검속 등을 통해 대량학살의 수단으로 전락, 한국전쟁 후 대량민간인 학살의 통로가 되었다.
보도연맹원을 중심으로 예비검속자들, 형무소재소자 등은 전쟁 발발과 함께 아무런 법적조치도 없이 조직적으로 처형, 학살되었다.
보도연맹원을 중심으로 예비검속자들, 형무소재소자 등은 전쟁 발발과 함께 아무런 법적조치도 없이 조직적으로 처형, 학살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과 1950년 초에 걸친 북조선 군대의 38선 공격과 남파 게릴라의 남한 내부 무장투쟁, 좌익의 공세 등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1949년 가을에서 1950년 봄 사이 게릴라 토벌작전의 성공, 남한 내부 좌익조직의 파괴 등을 통해 안정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 정권의 기반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좌익의 공세가 약화되자 다시 이승만과 민국당(한민당)의 지배연합이 분열하였고, 1950년의 5.30 2대 총선에서 남북협상파와 중간파 정치세력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근본적인 위협은 북조선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1949년부터 38선에서 남북 군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남한 내부에서는 남파 게릴라의 투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남과 북은 북진통일과 국토완정을 주장하며 무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군사적 준비는 남한에 비해 북조선이 앞섰다. 군대의 숫자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북조선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여파가 고스란히 북조선까지 전해졌다. 북조선 사회는 중국혁명의 승리로 한층 자신감이 배가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병사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북조선 인민군의 전투력이 한층 배가되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여름과 1950년 봄에 북한으로 들어온 조선인 부대원의 규모는 5만여명이었다. 이 부대들은 각각 조선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 그리고 18연대(4사단)로 개편되었다. 1960년 6월 25일 아침 38선에서 남진한 북조선 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가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 부대였다. 이 조선인 부대는 전투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49〜1950년 사이에 중국에서 북조선으로 전입한 부대는 그 용감성으로 인해 중국내전 기간 중 큰 명성을 얻었는데, 항상 중국군의 선두에서 돌격로를 열고 전투의 대세를 결정했으며 1개 소대로 1개 대대를 포로로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1948년의 장춘·사평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 연구가 장준익은 당시 남진했던 여타 인민군 부대의 전투력을 1로 평가할 때 중국에서 입북한 조선인 사단은 1.5로, 인민군 예비사단은 0.5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주25)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1949.10.1.)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북조선에 엄청난 흥분과 기대감,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1949.10.1.)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북조선에 엄청난 흥분과 기대감,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중국 국공내전 때의 인민해방군. 국공내전에서 조선인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들이 입북하면서 북조선의 군사력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중국 국공내전 때의 인민해방군. 국공내전에서 조선인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들이 입북하면서 북조선의 군사력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중국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부대의 입북은 북조선 인민군의 전투력과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켰으며 이는 무력으로 남한을 완정하겠다는 김일성·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한 자극제가 되었다. 김구가 남한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된 순간 김일성으로서는 무력공격을 포기해야 할 명분도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혁명의 성공과 조선인 부대의 입북, 그리고 남한의 혼란과 북조선 사회의 발전으로 넘치는 자신감을 갖게 된 북조선 지도부는 무력전쟁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반에 걸쳐 북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군사적 급진주의’가 팽배하였다. 이것은 전면적인 전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의 태평양과 극동지역 방위선을 밝힌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제외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애치슨 라인이 북조선 지도부에게 한반도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안겨준 것은 분명하다.

애치슨 라인
애치슨 라인

이런 가운데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었다. 애치선은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였다. 이때 태평양에서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애치선 라인’도 함께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라인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또한 북한 지도부에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한반도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잘못된 신호였지만, 한국전쟁 발발에 한 요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조선 인민군의 전면 공격과 남진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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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현우, 『한국 정당통합운동사』, 을유문화사, 2000, 245〜253쪽

2) 서중석, 위의 책, 237쪽

3) 국회법사위 백범암살진상소위원회,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 조사보고서』, 1995.12.15.

4) 국정원, 「김대중 납치사건」, 2007, 549쪽

5) 서중석, 위의 책, 253쪽

6) 일민주의는 체계적으로 정리돼 발표된 것이 아니고 1948년 10월 9일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 정강과 당시 발표에서 ‘일민주의’가 등장했던 것이다. 정강은 “1.우리는 계급과 지역과 성별을 초월하여 민족완전통일로 자주독립의 국권신장을 기함. 2. 우리는 정치·경제·교육 등 각 방면에 있어 국민균등의 복리증진을 기함”이라고 제시했다.

7) 홍태영, ‘과잉된 민족’과 ‘찾을 수 없는 개인’: 일민주의와 한국 민족주의의 특수성, 한국정치연구 제24집 제3호(2015), 94〜107쪽

8) 임영태, 『대한민국사 1945〜2008』, 들녘, 2008, 183〜186쪽

9) 임영태, 위의 책, 135〜137쪽

10) 이은희, 농지개혁의 의미와 한계, 법학연구(인하대학교 법학연구소), 21(1), 2018.3, 178〜200쪽

11)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나남출판, 1996, 457쪽, 475〜517쪽 참조.

12) 주요내용은 1) 민족통일과 미소 양군 통시철수, 2) 민족반역자 숙청, 3) 일제 법령과 남한 법령 철폐 및 공화국 민주개혁 전국적 시행, 4) 자주적 민족경제 건설, 5) 교육, 문화, 보건 사업 발전, 6) 인민정권기관의 공고 발전, 7) 대외 평등 우호 친선 관계, 8) 인민군대의 백방 강화 등이다.(박경순, 『현대조선의 탄생』, 내일을여는책, 2020, 322〜323쪽

13)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출판, 1996, 457쪽, 83〜84쪽

14)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출판, 1996, 457쪽, 86〜88쪽

1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996, 292쪽

16) 임영태, 『대한민국사 1945〜2008』, 140쪽

17)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208〜212쪽

18) 임영태, 위의 책, 212〜213쪽

19)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207〜208쪽

20) 임영태, 위의 책, 216〜217쪽

21)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620쪽 참조.

2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620〜637쪽 참조.

23)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638쪽

24) 임영태, 『대한민국사 1945〜2008』, 141〜142쪽

25) 장준익, 『북한 인민군대사』, 한국발전연구원, 1991, 464쪽; 염인호, 『한국전쟁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역사비평사, 2010, 240〜241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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