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한국 현대사에서 중간파 정치세력을 이야기할 때 ‘비극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게 된다. 극단적인 좌우 이념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중간파는 설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중간파 정치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있다. 여운형은 중도좌파를, 김규식은 중도우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두 사람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과 함께 남북협상을 시도하며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중간파의 노력은 실패했고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도 평탄치 못했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중 정치인이었던 여운형은 해방직후부터 테러에 시달리다가 끝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세력에 암살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한때 미군정이 이승만을 대신한 정치적 대안으로 고려하기까지 했던 김규식은 임정주석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계속해서 테러 위협에 시달렸고, 한국전쟁 중 이른바 북한의 ‘모시기 공작’에 따라 북으로 끌려간 상태에서 1950년 12월 북한 만포진 근처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정치적 운명이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두 사람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역경의 과정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을 따랐고 이후 혁신계로 활동하면서 모진 시련을 겪었던 봉강(鳳崗) 정해룡(丁海龍, 1913〜1969)의 해방 후 생애와 집안 이야기를 그린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가 지난 6월에 출간되었다. 늦었지만 책 소개를 겸해서 독후소감을 간략히 적어 본다.
소설의 주인공 봉강 정해룡은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통일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봉강과 그 집안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국 현대사는 진보적 의식을 갖고 올곧은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노선을 따랐고 이후 일관되게 그러한 길을 걸었던 봉강과 그 집안사람들의 삶 또한 기구했다.
봉강 정해룡의 영성(靈城) 정(丁)씨 가문은 역사가 있는 집안이다. 봉강의 13대조인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출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명문거족은 아니지만 정말 ‘뼈대 있는’ 애국자 집안으로, 후손들은 정경달의 나라 사랑과 애민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봉강 정해룡은 보성의 3천석 지주의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해방 후 노비들에게 땅을 주어 내어보낸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일제 강점기 민족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과 가난한 빈민 구휼사업에 힘쓴 독립 운동가였다. 봉강은 인촌 김성수가 추진하던 보성학교 설립에도 큰돈을 희사했고, 1938년 고향마을에 양정원이라는 사설교육기관을 만들어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일제말기 상당한 재산을 팔아서 만주의 무장투쟁 단체와 연계를 갖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자 했다.
해방 후 정해룡이 선택한 길은 여운형 노선이었다. 소설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승만이나 김구가, 계급 독재에 집착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의회를 통한 평등 실현에 기운 사회주의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여기는 것도 봉강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봉강은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봉강의 그런 전제에 가장 가까운 것이 몽양 여운형이었다.”(106쪽)
몽양의 좌우연합노선에 공감한 봉강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에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과 좌우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 중간파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오랜 테러에 시달리던 몽양 여운형이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분단이 가시화되자 그는 낙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봉강과 그 집안 또한 그 회오리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봉강의 6촌 이내 친족 8명이 학살되거나 처형당하고 30여명이 옥고를 치르는 비극이 휘몰아쳤다. 봉강 또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봉강 정해룡은 인민군 치하에서 희천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그 자리가 죽음의 자리임을 알면서도 그는 ‘보복 살인’을 막기 위해 그 일을 피해가지 않았다. 소설에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좌우 합작을 바랐던 것은 이런 전쟁이 날까 두려워서였소.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지 간에, 분단 노선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요. 전쟁이 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분단 주도세력은 모두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만 것이요. … 내가 이번에 나서는 것은 어느 한편의 승리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요. 이 시대의 패배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요. 뒤에 내가 숙청되거나 처단될 것이 자명하니까, 내가 이번에 나서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실패가 예비된 것이요. 그러나 무릅쓸 수밖에 없소.”(304쪽)
목숨을 걸고 인민위원장이 된 봉강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위원회는 힘을 쓰는 기관이 아니라 덕을 베푸는 기관이 되어야겄소. 내 주위에도 분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가 많소. 그렇지만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 내 지시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보복이나 살상을 한 자는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305쪽)
시절이 어수선할 때는 독인(毒人)이 아니라 덕인(德人)이 맡아야 한다는 소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소설에는 ‘덕의 정치’ ‘덕인’의 중요성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작가의 생각이자 봉강 정해룡의 사상적 바탕이다. ‘유교사회주의자’ ‘선비사회주의자’라는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봉강에게는 유교적 인문주의와 서구적 사회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봉강은 인민군이 패퇴 후 죽음의 위기에 놓였지만 평소에 베푼 인덕 때문에 살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승만 정권 아래서 그의 삶이 결코 평안할 수는 없었다. 1957년 12월 이른바 ‘근로인민당 재건 기도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그래도 봉강은 조봉암이 처형당한 ‘진보당 사건’에는 엮이지 않았다. 하지만 4.19혁명 후 혁신정당 활동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5.16쿠데타 후 재차 체포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그는 여전히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1960년대 봉강 정해룡은 3천석 지주에서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궁핍한 처지로까지 내몰렸다. 막내아들 길상은 학비가 들지 않는 목포 해양고로 진학했다. 단지 졸업장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가혹한 연좌제 상황에서 취업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봉강은 덕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봉강은 1969년 만 56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봉강 정해룡이 서거한 이듬해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노력해 ‘우국지사 봉강’의 추모비를 세웠으나 시절이 시절이라 세워지지도 못한 채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1995년 서거 26년 만에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일은 그를 오랫동안 사찰했던 경찰관이 앞장섰다. 여기서도 봉강의 인덕이 빛을 발한 셈이다.
소설은 봉강 정해룡의 해방 후 삶의 궤적 중심으로 주변 일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흥미진진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려간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문학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소설의 작가는 기성작가가 아닌 원로 언론학자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다. 퇴직 후 세 번째 쓴 소설이다. 그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청소년기 때부터 시작된 봉강 집안과의 오랜 인연이 바탕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친구가 주소록을 들고 원등마을로 나를 찾아왔다. 대뜸 족보를 보자고 했다. 그가 택호로만 알고 있던 그의 5대 조모 ‘원등 할머니’가 우리 집안에서 출가한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그를 통해 그의 집안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화려하고도 기구했다. 그의 가족사 한 토막을 소설로 낸다.”(‘작가의 말’ 중에서)
여기서 말한 친구는 정훈상이다. 훈상은 봉강 정해룡의 동생인 정해진의 차남이다. 김민환 교수의 목포 해양고 동기다. 봉강의 막내아들 정길상도 김민환 교수의 목포 해양고 3년 후배다. 작가는 깊은 인연과 함께 집안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였다.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이 김민환 교수에게 정해룡 집안 이야기를 글로 쓸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민환의 친구인 정훈상의 아버지 정해진은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를 철학과를 나와 동경제대 대학원을 다닌 수재였다. 그는 해방 후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형 정해룡과는 노선에 차이가 있었던 셈이다. 부모의 월북으로 훈상은 아버지·어머니의 정을 느끼지 못한 채 할머니 윤씨의 손에 자랐다. 훈상은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으나 연좌제 때문에 선원수첩도 받을 수 없었다. 취직도 힘들었다. 암담하고 암울했다. 그는 1969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부모가 있는 북조선으로 보내 달라고 소송해 이겨 북으로 갔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아들 훈상이 북으로 가기 전 아버지 정해진은 이미 두 차례나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는 사실이다. 정해진은 1965년 8월과 1967년 5월 남파되어 형 정해룡을 만나고 갔다. 이 과정에서 정해룡의 큰아들 정춘상이 삼촌 정해진을 따라 월북했다가 돌아왔다. 안기부는 1981년 1월 ‘정춘상 가족 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정해룡의 큰아들 정춘상은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작은아들 정길상도 7년의 옥고를 치렀다. 봉강 집안사람들 37명이 중앙정보부(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었으며 그중 일부는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이야기는 소설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 집안의 이야기가 그만큼 방대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설책은 600쪽에 가깝지만 원래 완성 원고에서 상당히 상당 분량을 잘라냈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잘라낸 부분을 살려 내고 싶은 것이 작가의 바람이라고 한다.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바란다.
책을 읽은 이들 가운데는 박경리의 『토지』가 생각난다고도 하고, 최인훈의 『광장』과 비교하는 이도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연상하는 이도 있다. 봉강과 그 집안 이야기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기구한 내용이 많아서 제대로 펼치려면 대하소설이 필요할 것이다. 모두 맞는 이야기지만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인덕’ ‘화합’ ‘다양성’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 나의 독후감상이라면 감상이다.
사건과 이야기가 최대한 압축되었지만, 문학적 완성도 또한 높다. 스토리가 있고, 소설적 구성으로 보아도 수작이다. 제14회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것이 바로 문학적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깊은 감동과 여운이 있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