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걸쳐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된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해 헌신한 박한식 미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의 회고록이 최근 발간됐다. 책의 제목이 그의 삶을 그대로 말해준다. “평화에 미치다”. 45년간 미국에서 정치학을 가르쳐온 세계적인 석학이자, 남북관계의 고비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한반도 평화의 초침을 돌리고자 했던 통일운동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 빛난다. 회고록을 통해 박한식 교수는 남북갈등, 남남갈등, 북미갈등을 비롯한 현안을 역사적으로 심도 있게 성찰하고 있다. 대가의 간절한 이야기에 우리는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직 책을 읽지 못했지만, 출판사에서 소개한 글 중 마음에 남은 구절이 있다. ‘분단 이전의 고향을 떠난 이산 1세대는 모두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이 당시 시대정신이었듯, 그리하여 이 땅에 독립이 찾아왔듯,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박 교수의 호소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시대정신은 통일일까?

과문한 탓이겠지만, 현재까지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소리친 이들 중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현재까지 내건 공약 중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아예 들리지 않거나, 곁가지로 보일 뿐이다.

사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해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한다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했을 뿐이다. 부디 현재 대선후보들도 헌법이 명령하는, 주권자인 국민이 명령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가슴에 깊이 새기길 바랄 뿐이다. 아울러 각 대선 캠프에 몰려들 수많은 인재와 호걸 중 적어도 한반도 문제, 남북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박영희,『만주 6000km』, 삶창, 2021.4.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박영희,『만주 6000km』, 삶창, 2021.4. [자료사진 - 통일뉴스]

『만주 6000km』는 부제 ‘박영희의 항일 역사 기행’에서 알 수 있듯, 연변 조선족자치주 연길에서 시작하여 용정-도문-화룡-량수·훈춘-동녕 삼차구-수분하·목릉-밀산-목단강-해림-동경성 발해-하얼빈-흑하·치치하얼-장춘-길림-유하-집안-단동-심양-대련-여순에 이르기까지 뜨겁고 치열했던 항일투쟁의 여정을 따라간 기록이다.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 동북3성 거의 전역에 걸쳐 선조들의 항일투쟁 흔적이 남아있다. 이젠 비록 터로만 남은 곳들도 있지만, 그들의 뜨거웠던 정신은 고스란히 읽는 이의 마음에 새겨진다.

여전히 중요하고 새겨야 할 말이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항일투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가끔 회자 될 뿐,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들릴 뿐이다. 사실 이는 젊은 세대를 크게 탓할 일도 아니다. 해방 이후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아니 오히려 분단체제에 안주하며 기득권과 안녕을 누려온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나. 아니, 우리의 자랑스러운 항일의 역사를 온전히 계승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한 적이 있는지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리며, 혹독한 자연환경과 일제의 간악한 탄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을 제대로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다. 또한 그들이 결코 꿈에도 원치 않았을 분단을 끝장내고 온전한 광복인 통일을 이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도 오늘 우리의 의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후손으로서,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박영희의 책은 어찌 보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 선조들에게 전하는 통렬한 반성문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오랫동안 동북3성 지역을 다니며 그곳에 서려 있는 선조들의 피와 눈물을 추적했다. 글의 곳곳에서 저자의 오랜 경험과 그곳에서 얻은 성찰과 지혜가 엿보인다. 아울러 여전히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도 보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숨 쉬고 있는 분단의식, 북을 향한 맹목적인 적대의식, 약자에 대한 차별, 강자에 대한 굴종을 새삼 확인하는 씁쓸함도 피할 수 없다.

매년 3·1절을 기념하고 8·15를 경축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바랐던 세상을 우리는 아직 만들지 못했다.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통일’을 호명하지 못했다. 수백 번 반성하고 반성할 일이다.

저자와 함께 항일투쟁의 흔적을 따라가며 어쩔 수 없이 드는 아쉬움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우리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습성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념과 정파를 둘러싼 끊임없는 분열의 모습이다.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선조들은 이념의 차이, 정파의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했다. 한마음이 되어 일제에 항거해도 부족한 때에 뜻이 다르다고, 내 편이 아니라고 서로를 증오하고 부정했다.

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그대로 겹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찌 일사불란한 통일이 가능하겠냐만, 마치 우리 민족의 습성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열과 대립은 이 땅에서 늘 반복되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분열과 대립보다는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 공영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젊은 세대들이 ‘통일보다는 먼저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바람이 담겨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1년 넘게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일터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것임에도 북을 방문해 북측 인사를 만나기는커녕, 중국에서의 만남도 어려운 상황이다. 답답한 마음과 함께,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작은 만남이라도 결코 사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

저자의 책은 기행문이자,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들과의 만남, 먼저 간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중국에서의 그 치열했던 항일의 역사를 간직하고 또 다른 만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남북의 만남이다. 이유 불문하고 우리는 만나야 한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통일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만나야 한다. 3·1절을, 8·15를 남북이 함께 기념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난제들을 함께 풀어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이 땅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더이상 부질없는 대립과 적대를 끝내고, 우리 후손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그들이 당당히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역사’가 잊히고, ‘민족’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비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켜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은 존재한다.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늘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하지 못한 의무와 책임도 기억해야 한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36년 2월 18일,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한 나라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석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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