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 영인본 세트. [통일뉴스 자료사진]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 영인본 세트. [통일뉴스 자료사진] 

최근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의 국내 출판을 계기로 반세기 이상 냉전적 대결을 뒷받침해 온 국가보안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개정·폐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 격돌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의외로 차분하다.

보수야당인 국민의힘에서 '국민의 판단에 맡겨도 충분하다'는 전례없는 입장을 내놓은 영향이 크다.

지난 22일부터 『세기와 더불어』가 예스24, 인터넷 교보문고, 알라딘을 비롯한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일제히 판매되기 시작되자 보수언론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을 들먹이며 목청을 높이던 상황에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우리 사회도 시대 변화와 높아진 국민의식에 맞춰 표현의 자유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하태경 의원은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통제해야 한다는 건 국민을 유아 취급하는 것이다. 이제 국민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다 적극 보장합시다"라는 입장을 개진하며 보수언론이 달군(?) '국가보안법의 위기'를 급격히 식혔다.

같은 날 국민의힘 박기녕 부대변인도 논평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이 향상된 현 시점에서는 국민에게 판단을 맡겨도 충분하다"며, 『세기와 더불어』의 출판을 직접 문제삼지 않겠다는 취지로 언급해 국가보안법 적용을 둘러싼 날선 공방을 예상했던 이들이 오히려 어리둥절해 하는 상황이 조성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김일성이 주인공인 허황된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거나 '김일성 회고록에 속을 사람이 어딨나'라는 등의 토를 달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북은 한류를 금지하더라도 우리는 북한 출판물을 허용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자"는 나름의 독특한 논거를 제시했다.

아무튼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이렇다할 주장을 내놓지 않고, 통일부도 며칠째 출판경위나 경과를 살펴본 뒤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검토하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과도 상당히 대비되는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간행물윤리위원회도 지난 28일 오후 임시 전체회의를 열어 『세기와 더불어』는 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76년을 이어온 끈질긴 분단의 역사에서 국가보안법은 분단체재를 유지해 온 핵심 장치이다. 

어디서 어떤 돌발적 상황이 벌어질지 속단하기 이르다는 위기감은 여전하다. 그래서 여전히 논란은 뜨겁다.

부장판사 출신인 주호영 국민의힘 대표대행(당시)이 27일 "성숙한 국민 의식을 토대로 책의 문제점들을 잘 판단할 거란 시각도 있고, 또 일부는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이적표현물 아니냐, 제지해야 되지 않냐는 의견도 없지 않다"며 "좀더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기존 당론과 다른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 21일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의 『세기와 더불어』 국내 출판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틀이 지난 23일 사단법인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NPK)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이 책의 판매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내 법적 판단을 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27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이 단체로부터 고발장이 접수되어 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아직 특별하게 나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먼저 NPK의 가처분 신청서는 회고록을 쓴 김일성 주석을 '유엔이 공인한 최고 죄목의 범죄자'로 규정했다. 

또 "(김 주석을)거짓으로 미화한 책이 제한없이 일반에 판매, 배포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불가침의 인격권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의 유일 정통성과 북한 정권의 비정통성, 자유통일의 당위성을 천명하는)헌법 제3조 및 제4조를 근본규범으로 하여 지탱되는 대한민국 헌정체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라고 해도 출판행위에 연계될 때엔 무제한일 수 없고,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까지 인정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NPK의 법률대리인인 도태우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일성 회고록은 대법원 판례에 법원이 인정하는 대표적인 이적표현물이며,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해하는 점을 알면서 판매, 소지 등이 금지되는 책"이라며, "이런 책을 유통시키면 북한 간행물 중 유통시키지 못할 책이 없게 된다. 가장 심한 것도 유통시키게 되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승균 도서출판 민족사랑방 대표를 대리하여 NPK의 가처분 신청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한 권정호 변호사는 30일 [통일뉴스]와 통화에서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 주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서 객관적인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이나 판단,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상의 자유 영역에 맡기고 출판을 허용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사회의 모습"이라고 밝혔다.

특히 "민족의 화해와 협력이 요청되는 평화의 시대에 북에서 국부에 해당하는 인물의 항일 역사기록을 출간하는 것 자체가 민족의 화해와 협력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남북관계가 꽉 막혀있는 상황에서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NPK의 가처분신청에 대해서는 "인격권이 침해된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 있고 헌법상 영토조항을 들먹이는 것은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논리"라고 하면서 "북을 평화통일과 교류협력의 상대방이라고 하여 이중적 지위를 인정하는 우리 정부의 해석은 배제하는 주장이어서 보존할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회고록이) 해방때까지 항일운동을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남과 북이 공유해야 할 민족의 공동자산이라고 할 수 있고 현재 남북관계에 부담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런 근거로 법원에 가처분신청에 대한 각하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법원이 『세기와 더불어』를 이적표현물로 지정한 일도 있지만 헌법재판소에는 위헌제청을 포함해 7건의 위헌소원이 들어가 있다"며, "이미 국가보안법 7조의 찬양·고무 조항을 폐지하자는 입법 개정안이 계류되어 있는 상태이고, 이적목적이 없다는 국민의 법 감정이 확인되었으며,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으면 허용해야 한다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확립된 법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평화협정본부는 3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기와 더불어』의 출판 및 판매행위를 보장하고 민족이 화해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평화협정본부는 3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기와 더불어』의 출판 및 판매행위를 보장하고 민족이 화해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가처분신청에 대한 결정은 재판부 재량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지만 5월 첫째주에는 1차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단체인 평화협정운동본부(상임대표 이채언, 이적)는 30일 정부서울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기와 더불어』의 출판 및 판매행위를 보장하고 민족이 화해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세기와 더불어』(8권 한 세트)는 지금까지 100세트 정도가 판매되었으며, 국내 언론 뿐만 아니라 외신들의 관심도 뜨거워 김승균 대표에게 취재요청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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