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긋지긋한 역사의 반복이 시작될 기미가 보인다. 그 누굴 탓할 일도 아니지만, 왜 매번 이래야만 하는지 허탈한 마음이다.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자신했던 현 정부는 결국 ‘되돌리고’ 말았다. 미국 탓을 할 필요도, 북한 탓을 할 필요도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혼동한 것일까. 그 진정성을 이해한다 해도 결과는 초라할 뿐이다.

곧 4·27 판문점 선언 3주년을 맞는다. 2018년은 기적의 해였다. 이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일순간 환호와 무한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국민들이 보기에 당장이라도 남북이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냉철하게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정도였다.

아마도 정부 차원에서, 그리고 민간차원에서 3주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취지라 믿고 싶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치열한 반성부터 했으면 한다. 왜 지금 이처럼 참혹한 모습이 되었는지, 왜 남북은 다시 이리 차가워졌는지, 진지한 고민과 반성이 먼저 필요하다.

현 정부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분명 현 정부는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냈고, 매우 뜻깊은 남북 간의 ‘약속’을 만들어냈다. 또한 북미 간 만남을 이끌어 ‘싱가포르선언’이라는 의미 있는 합의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분명 평가받아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의 운명을 미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한 나머지,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오로지 미국의 눈치만 보느라 정작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했다. 그 후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다음 미국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유엔의 제재가 어떠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바뀐다? 물론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그렇다면? 정부의 존재 이유도 사라진다.

지금의 어려움을 오로지 우리 정부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정치권은, 기득권은, 아니 솔직히 말하자. 분단체제가 작동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력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우리 정부의 그 어떤 노력에도 협력하지 않았다.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 동의는 여당의 무능과 무관심, 야당의 거부로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정부 임기 내에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고, 이는 곧 판문점 선언 역시 여타 과거 남북정상선언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 확실함을 보여준다.

북한은 여전히 믿을 수 없고, 우리가 무언가를 먼저 주거나 양보를 하면 안 되고, 절대로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은 말려 죽이든가, 미국을 등에 업고 군사적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차고 넘친다. 아니, 그들이 기득권을 여전히 쥐고 있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의 인식도 남북화해,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민족’ 담론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도 속지 않는다. 지금까지 역사상 북한과 관련된 그 어떤 분야, 그 어떤 시도에 ‘대박’이 있었던가? 오히려 패가망신하지 않으면 다행 아니었나? 그 지겨운 ‘빨간 딱지’를 젊은 세대라고 모를까? 지금 청춘들은 당장 내일이 걱정이다.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개인의 생존과 북한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북한을 멀리 해야 생존의 가능성이 더 컸다. 더 이상의 사기가 안 통한다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로 국방비를 증액했고, 주한미군 주둔과 관련한 비용 협상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액수에 합의했다. 그게 성과라고 강조한다. 최근엔 국산 최초의 전투기 KF-21 보라매를 선보이며 자주국방의 빛나는 순간을 과시했다. 자주국방이라, 물론 역대, 그나마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의 정부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알고 있다.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국방비 증액을 통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는, 그래서 미국의 영향에서 조금이나마 주체적인 국가가 되겠다는 의지 말이다.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할 것 아닌가. 공감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한 살아가야 할 북한과의 충분한 소통과 관계개선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 북한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가 북한의 핵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호 우려스러운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그 막연한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실체로 만들어가자는 것이 9·19군사합의의 주된 내용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매우 아쉽지만 현 정부는 남북관계에 있어 그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평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은 조금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현 상황에서, 그리고 현재의 의지로 봤을 때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때문이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이뤄진 다음에 무엇을 기념하든가, 무엇을 축하하는가 하자는 말이다. 그리고 ‘우린 죽을 때까지 미국에 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든가, ‘이제 중국에 의지해야 한다’든가, ‘결국 슬기로운 등거리 외교’를 할 수밖에 없다든가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차원 나아가자는 말이다.

외교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에 마치 미국과 중국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고한다. 이 어이없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고, 결국은 상황 판단 잘 해서, ‘될 놈에게 붙자’는 발상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을 줄기차게 유포하는 지식인들도 그만 안 보였으면 한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세계 어느 국가가 우리의 운명을 책임져줄 수 있는가? 없다.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로 더더욱 살벌해진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더 넓은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정책방향과 협력 가능성, 향후 양국의 경쟁 결과에 대한 예측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남북관계의 운명이, 한반도의 운명이 미중 양국의 정책결정으로 끝나버리지 않도록 만드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미중이 아닌 국제사회의 수많은 주체들과 다자간 협력을 통해 미중이 우리 문제를 도와줄 수는 있어도, 결정할 수는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철 지난 미국이나 중국이냐 담론에서 제발 벗어나자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남북이 결정해야 한다는, 지금까지 입으로만 떠든 것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

이장훈, 『미국과 중국의 대격돌』, 세창출판사, 2021.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장훈, 『미국과 중국의 대격돌』, 세창출판사, 2021.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소개하는 책은 때문에 아쉬움이 크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답게 지루하지 않게 양국의 패권경쟁을 다룬다. 과거 대영제국에 맞서다 결국 세계대전까지 불러온 독일의 빌헬름 2세를 지금 중국의 시진핑과 비교하며, 국제질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을 상세히 소개한다. 기술전쟁, 군사적 경쟁과 양국의 서로에 대한 인식까지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마치 양국의 경쟁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국제관계를 깊이 있게 천착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중 간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일방적으로 중국이 위험하고 패권적이며, 중국이 국제질서의 패권을 잡는다면 커다란 재앙이 닥칠 것처럼 표현한다. 물론 저자는 미중 간 패권경쟁에서 당연히 미국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과거(한국전쟁)의 경험을 잊지 말고, 미국의 대 중국 포위정책에 편승해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정체성? 여기에서 말문이 막힌다. 이는 호주가 중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선택했고, 그것이 “미국과의 동맹 강화로 자유민주주의, 정치·경제·종교 자유, 인권, 법치 등 호주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호주의 외교백서에서 빌려온 저자의 표현이다. 저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호주 정부의 외교백서가 강조한 ‘룰에 기초한 국제질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은 미국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가 분명하다. 반면 중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외면해 온 공산당의 일당 독재국가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앞으로 한미동맹이 추진할 지향점은 ‘호주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미동맹은 피와 목숨으로 이어진 동맹일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라는 가치를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더 이상 미중을 놓고 좌고우면하지 말고 ‘호주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291~292쪽)

모르겠다. 난 저자의 이 ‘훈계’에 동의할 수 없다. 그동안 미국이 역사상 ‘룰에 기초한 국제질서’와 ‘자유민주주의’를 얼마나 숭고히 지켜왔는지도 모르겠고, 왜 호주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이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중국은 점점 더 안하무인이 되어가고 있고,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오직 미국만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우습다. 살고 싶으면 똑바로 줄 서자는 말을 아주 길게 300여 페이지에 가깝게 쓴 꼴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남북문제나 한반도 평화 문제에 있어 중국이 지나치게 관여하면 분노할 것이다. ‘북한이 중국의 속국’이기에 저런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 반대는?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 우리 정부가 상대적으로 약한 외교력과 국력에도 불구하고 미중 양국을 설득해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이뤄낸다면 무엇이라 할까. 미중 두 강대국이 ‘윤허’해서 가능했다고 할까?

대한민국을 향한 저자의 우국충정을 높게 평가한다. 저자는 분명 호주 모델이 ‘한국의 정체성’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친중 문재인 정부가 선택해야 할 단 하나라고 믿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 문재인 정부가 친중정책을 펼쳤는지는 당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무지한 나는, 한국의 정체성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편안함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 주체성, 자주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식한 나는 그렇게 믿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아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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