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한달 동안 우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월드컵행사가 끝났다. 1954년 이래 5차에 걸친 월드컵 출전에서 14번 싸워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한국팀의 소원은 한번이라도 이겨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16강에 진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서전에서 폴란드를 누르고 대망의 1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강호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 진출의 소망을 거뜬히 이루었다. 그런데 한국팀은 내친김에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랐으며 계속하여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도달했다. 이제 독일만 제압하면 당당히 결승전에 올라 세계 최강의 영광에도 도전 할 참이었으나 이 꿈은 아깝게도 무산되고, 3, 4위전에서 터키에 아깝게 졌지만 그래도 세계 4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구라파의 쟁쟁한 강팀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혜성처럼 4위에 오른 한국팀의 약진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축구팀이 올린 이러한 공전의 대성과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과 용병술, 그리고 선수 한사람 한사람이 그 동안 쌓아올린 각고의 훈련의 열매였다. 그들에게 격찬을 아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번 월드컵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사기를 올려주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특히 오랫동안 독재체제 밑에서 억눌렸던 젊은이들에게 마음껏 자기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정부의 주도가 아닌 시민사회의 자발적 역량을 결집시키는 귀중한 경험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무서운 힘과 무한의 기쁨이 솟아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 세계 4위에 오른 데 따른 직.간접적 경제효과도 엄청 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차분히 반성해야 할 점도 있다. 첫째, 정실 인사의 폐단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에 대해 가한 첫째 메스는, 선수 선발에 있어서 선후배 관계, 연고주의와 외부압력을 단호히 배제하고 철저히 능력위주로 기용하는 일이었다 한다. 그 결과 48년 동안 월드컵에서 1승도 하지 못한 팀을 불과 1년 반의 훈련으로 세계 4위로 끌어올리는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축구 뿐 아니라 모든 운동에 있어서, 아니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정실인사는 고질병으로 나라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이 고질병을 어떻게 고치느냐가 우리의 큰 과제로 남아있다.
  
또 월드컵 한달 동안 그토록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악마"들의 응원열기에 우리들은 신명이 났었지만 외국인들은 겉으로는 희한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외국 기자는 서울시청 앞 광장을 새빨갛게 덮고 밤새도록 소리소리 지르는 엄청난 인파에 압도되어, "축구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열광하는 광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알쏭달쏭하다. 이러한 현상은 애국심의 표출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 하면 오래 쌓인 열등의식에서 나오는 발작적 현상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언론과 정부에 있다. 처음부터 언론은 지나치게 선동적이었다. 어떤 방송인은 심지어 "민족의 염원 16강의 꿈을 이루자"고 외였다. 16강 진출이 어찌 "민족의 염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스페인을 이기고 4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을 "단군 이래의 경사"라고 했다는데 이것도 일종의 실언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전통적으로 축구의 명문으로 알려진 구라파나 남미의 여러 나라에도 축구광들이 있어서 소란한 응원도 하고 난동도 부린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경기장 안에서나, 경기장 밖이라도 일정한 한정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처럼 축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덩달아서, 전국적으로 인구의 7분의 1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광장에 쏟아져 나와 밤을 새워가며 광분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경우 경기장 안에서는 매우 뜨거웠어도 경기장 밖에서는 좀더 자제되고 성숙한 응원을 하면서 그런 좋은 성적을 올렸더라면 더 멋있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생각은 현장감각 부족 때문일까? 
  
또,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16강 뿐 아니라 8강을 거쳐 4강에 오르고 4위를 차지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위상이 그 만큼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들떠 있는데, 이는 지나친 흥분이다.  불란서나 중국이 16강에 못 올라갔다고 위상이 손상된 것도 없으며, 미국이 독일에게 패했다고 독일보다 못하거나 약한 나라가 아니다. 세네갈이 스웨덴을 꺾고 8강이 됐다고 스웨덴보다 좋은 나라가 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브라질이 우승했다해서 그 나라 위상이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도 아니다.

축구의 승리로 그 축구팀의 위상은 분명 그만큼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어디까지나 축구요 하나의 경기에 불과하다. 경기에 이기면 신나고 지면 분한 것이다. 그 이하도 아니지만 그 이상도 아니다. 2차 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사령부는 일본인들의 재기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3s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다 한다. 3s란 sports, screen, 그리고 sex 이다. 국민전체가 영화나 섹스를 즐기고 스포츠에 열중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위하면서 자국의 위상도 오르는 줄 착각하게 되고 다루기 쉬워진다는 논리였다.
  
또 이번 월드컵은 일본과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이다. 일본은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서 남한과는 어물어물 슬쩍 넘어가고 말았지만, 북한과는 아직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기 위한 절차를 남겨두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 마당에 일본과 공동주최로 월드컵 행사를 치렀다는 것은, 북일관계 정상화 교섭에 있어서 북한의 입장에 도움은 못 줄 망정 훼방을 놓는 결과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행사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치렀다는 것이 과연 상쾌한 일이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행사는 남북분단사상 가장 큰 경사였던 6.15 공동선언의 2주년과 겹침으로써, 공동선언의 의의를 매우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자는 데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면서도, 북한의 적으로 남아있는 일본과 공동으로 치르는 월드컵에서는 하나로 뭉쳐서 세계 4위에 올랐으니, 이로써 우리의 위상이 매우 고양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치관의 심한 전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이 힘을 합쳐 외세의 굴레를 떨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위상은 진정으로 높이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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