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부하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 2021년 지금까지 관련 분야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다. 우와, 도대체 몇 년이 지난 게냐.

그동안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과 비교한다면 꽤 많이 북을 방문했다. 놀러 가기도 했고, 결혼 1주년 기념 여행으로 공포에 질려있는(!) 아내를 데리고 금강산을 간 적도 있다. 물론 일하러 주로 많이 다녔다. 그리고 북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중국을 많이 다녔다.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지만, 참는다. 젠장.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당연히 북을 방문할 때, 혹은 북측 인사들을 만날 때 긴장한다. 수백 차례 북을 방문한 분들은 아마도 다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북을 방문할 때마다 떨린다. 물론 북측 성원들이 나에게 위협적인 언사나 행동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제풀에 움찔거리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왜 지금도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여전히 북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본능으로 인하여, 자신이 잘 아는 활동 범위가 아닌 새로운 환경에 진입했을 때 긴장할 수밖에 없다. 속된 말로(죄송) 내 나와바리가 아닌 곳에서는 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북은 나의 나와바리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내가 놀던(!) 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쫄았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놀러 가는 것이라면, 역시나 남의 구역인 일본이나, 중국 등을 찾았을 때도 같은 긴장감을 느껴야 하는데, 또 그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과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아 그럼 당최 뭐냐고.

참 표현하기 어렵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곳, 내가 최소한이라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북을 제대로, 많이 알지 못한다.

모르면 두려워지고 거부하게 된다. 무지가 적대를 낳고 결국에는 소멸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하게 된다. 남북관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비극은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발생했다. 상대의 의도,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현재 젊은 세대들의 혐북 정서가 걱정되는 이유이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일제 강점기와 곧 이은 분단과 전쟁이 무엇보다 큰 원인이었지만, 그 후에 상대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남북의 위정자들과 여기에 빌붙어 분단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왔던 다양한 세력들도 주요 원인이다. 그들은 반세기 넘게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여전히 일부 거대 언론들은 무책임하게 분단 장사를 하고 있고,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복무해야 할 이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분단을 파는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상호 이해의 길을 가로막고 있고, 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죽을 때까지 만날 수 없게 만드는 비인도적인 범죄를 남북 양 당국이 버젓이 저질러도 별일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죄다 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죄다 모른 척한다. 죄다 미쳤기에, 남북은 오늘도 각자 지들끼리만 안녕하다.

우리 사회에서 북을 제대로 알자는 운동,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꽤 되었다. 물론 그 말도 온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보지도 않고 만나보지도 않고 북을 제대로 알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오만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의 북에 대한 어이없는 주술과 기만에서 벗어나 그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지극히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한없이 고마운 일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한다. 북을 공부하는 것, 알고자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자료가 여전히 부족하고,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제한, 불허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벽은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재미없게 북을 가르쳤다.

아울러 어쩌면 제일 아픈 부분이기도 한데, 우리 사회에서 북을 연구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돈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였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연구자 중 ‘탈북’ 즉, 연구 분야에서 이탈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이러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여전히 모르는 북을 만나서 협의하고 협상해야 하는 나는 늘 두려운 것이다. 물론 나의 게으름도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북을 늘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나의 나태는 북의 만리마 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만들었다. 반성합니다.

안티 구라다·십쇄,『북한 사회』, 경진출판, 2020.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티 구라다·십쇄,『북한 사회』, 경진출판, 2020.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 『북한 사회』는 그런 면에서 고마운 책이다. 딱딱하고 무섭게만 여겼던 북에 대한 이모저모를 발랄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일종의 시리즈로 북을 알기 위한 책들을 펴내고 있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북한 실학운동’이라 표현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북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북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때문에 북은 딱 우리 인구만큼의 다양성으로 다가온다. 누구에게 북은 지옥이고, 누구에게 북은 미친 독재자의 땅이다. 또 누군가에겐 전쟁광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또 누구에겐 거지들의 소굴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중 현실의 북은 존재하는가? 과연?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일단 먼저 판단하고 북을 바라봤다고. 일단 북을 바라본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텐데, 우리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상을 설정한 다음 북을 바라봤다. 그럼? 다 그 상에 맞춰 보일 수밖에.

책은 북의 지리, 교육, 체육, 교통, 건축, 민족문화 등을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이에겐 ‘내가 왜 이런 걸 알아야 하지?’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양반들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이 살짝 궁금한 이들에겐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키득거리게 만드는 문장도 적지 않다. 일단 딱딱하지 않고 근엄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마음에 든다. 여기에 있는 내용만 숙지하고 북에 가도 ‘뭘 좀 아는 녀석이로군’이라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북의 단어 중 ‘사귐길’이 있다. 무슨 뜻일까? 우리는 ‘교차로’로 부르는 단어다. 저자의 생각처럼 나도 교차로보다는 사귐길이라는 단어가 훨씬 정이 간다. 그럼 난 친북일까? 남북 간 마음의 벽을 허무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며, 틈나는 대로 많은 ‘사귐길’을 만들어 나간다면, 그래도 희망이 조금은 더 가까이 오지 않을까.

여전히 답답하고 우울한 지금이다. 하지만 웃자. 억지로라도 웃으며, 길을 찾아보자. 누가 만들어주는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들지만 우리가 만들어가는 길. 더디지만 우리 힘으로 가는 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미약하나마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작은 노력일 것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끝내 가족 품으로 가시지 못한 채 눈을 감으신 박종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선생님은 내가 몸담았던 <민족21>에서 2001년 3월부터 2004년 5월까지 창간에 참여하시며 근무한 적이 있으시다. 이 미쳐버린 분단의 시대에 여전히 살아남아 서성이는 이들이 죄스러울 뿐이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 바란다. 남은 자들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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