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시풍속 도감』 , 보리 발행 / 홍영우 그림 / 135쪽/ 2020.10.20
『우리 세시풍속 도감』 , 보리 발행 / 홍영우 그림 / 135쪽/ 2020.10.20

큰 나룻배에는 족히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 

사공이 노를 젓는 맞은 편 뱃머리엔 갓 쓴 양반이 정좌해 있고 탁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가 하면 패랭이를 쓰고 등짐을 맨 보부상도 여럿이고 갓난아이를 들쳐안은 어미와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여인 등 그 행색만 보아도 각각이 생동하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양쪽으로 볏단을 무겁게 실은 황소 등에는 짐 한 보따리가 더 얹혀 있는데 정작 소는 생전 처음 타보는 나룻배에서 평온하게 강물만 쳐다보고 있다. 

한 배에 타고 있는 나귀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묵묵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본다.

재일 조선인 화가로 1995년 북녘에서 최고 영예인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홍영우 선생의 그림을 모아 보리출판사에서 만든 『옛사람들의 삶이 담긴 풍속화-우리 세시풍속 도감』 중 '장날'편의 '장에 가는 길-나룻배'(54-55쪽)속 풍경이다.

추수가 끝나고 김장도 메주 만들기도 다 끝난 세밑에 치러지는 혼인날 말을 타고 신부집을 찾아가는 신랑 일행이 통나무와 솔가지, 흙을 이용해 만든 섶다리를 건너는 모습도 이채롭다.

짐을 든 사람들과 신부를 태우고 올 가마는 다리를 이용하지만 신랑을 태운 나귀와 쌀섬을 진 황소는 이번엔 차가운 개울물에 몸을 적셔야만 한다.

빨래터에 나온 아낙네들은 이 광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아이들은 개울 건너 제 마을로 찾아오는 신랑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반갑게 맞이한다.

'풍경과 세시풍속' 편의 '혼례'(42-43쪽)라는 제목으로 실린 옛 고향 풍경이다.

책은 홍영우 선생이 남긴 소박하고 아름다운 필치의 풍속화 80점에 자세한 설명글을 붙여서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 우리의 옛 삶을 정겹게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풍경과 세시풍속 △장날 △전통놀이 △음악과 춤으로 주제를 나누어 125쪽에 걸쳐 세시풍속을 소개하고 1년전 세상을 떠난 홍 선생의 그림세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쇠장 [사진제공-보리]
쇠장 [사진제공-보리]
씨름 [사진-보리제공]
씨름 [사진-보리제공]

장날에 맞춰 열린 김천 쇠장의 면모를 한폭에 담은 '쇠장'은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국가보존작품으로 소장되어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으로 화면 가득 쇠장의 소와 송아지, 그리고 튼튼한 소를 고르기 위해 이빨이나 뿔, 털 빛깔, 몸집 등을 꼼꼼히 살펴보는 농부들과 소장수, 거간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단옷날부터 추석까지 놀이로 즐겼던 씨름판의 모습을 그린 '씨름'에는 우승자에게 돌아갈 황소가 꽃목걸이를 걸고 나무에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경기를 하는 씨름선수와 심판,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과 구경꾼들, 멍석 깔린 주막에서 막걸리잔을 들고 씨름 관람에 열중하는 이와 좌판 주변에서 물건 흥정에 여념이 없는 이들까지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단원 김홍도를 방불케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떠나온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아버지의 고향마을을 꿈꾸듯 거닐었다.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누구보다도 우리 땅과 우리 전통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며 살아왔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로 얼룩진 모습이 아닌, 소박한 우리 겨레의 정서가 오롯이 남아있는 모습을 찾아 하나하나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다."

책의 맨 앞쪽에 있는 홍 선생의 글이다. 

1939년 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그림 그리는 일을 동무삼아 어린시절을 보냈고 스물네살이 되던 해 우리 말을 처음 배운 홍 선생이 일본에서 살면서 우리 겨레 특유의 해학과 흥이 담긴 그림을 그리는 일과,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유를 잘 설명하는 듯 하다.

홍 선생은 지난해 10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도서출판 보리에서 홍 선생의 1주기를 기리며, 50여 년 동안 재일 동포 미술계에 발표해 온 그림들을 가려 묶어 처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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