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통의 노동자지원운동

50년 전 전태일 열사 항거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의 한국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 일환으로서 전개된 영화 ‘어머니’ 상영운동을 돌이켜보면서 지금의 노동운동에 대한 뜨거운 기대를 밝히고자 한다.

영화 '어머니' 포스터.  1978년 11월 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영화 '어머니' 포스터. 1978년 11월 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1978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투쟁을 그린 영화 ‘어머니’가 일본전국에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상영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한민통이다.

1973년 8월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일본본부(한민통)가 결성되었다. 결성시 상임고문, 83년 의장에 취임한 배동호 선생은 1989년 서거할 때까지 일관하게 한민통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애국론' 1986년판. [사진제공-한민통]
'애국론' 1986년판. [사진제공-한민통]

배동호 의장은 1975년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에 게재한 ‘애국론’에서 “민중이 자기들의 인간적인 근본적 요구와 역사적 사명에 대한 책무감에 깊이 각성되고 그 실현을 위해 단결하여 궐기할 때, 그들의 자주 지향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에너지는 능히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 “지금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민중의 힘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발양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과제는 없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항거로 자주적인 노동운동이 싹튼 시기에 민중의 위치와 역할을 명확하게 밝힌 애국론의 견해는 지극히 선구적이었다.

한국노동운동을 옹호하고 나아가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에서 노동자지원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던 배 의장의 지도아래 한민통은 1970년대 후반부터 국내 민주화운동과 연계아래 일본에서 한국노동자지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78년 한민통에 국내 민주인사로부터 비밀리에 연락이 왔다. 독재정권의 탄압 하에서는 출판할 수 없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일본에서 출판해 달라는 의뢰였다. 한민통은 이 요청을 쾌히 승낙했고 당국의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가져온 원고는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는 제목으로 78년 11월13일 일본어판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전태일평전' 일본어판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 1978년 출판. [사진제공-한민통]
'전태일평전' 일본어판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 1978년 출판. [사진제공-한민통]

집필자들의 안전 보호를 위해 철저하게 보안에 힘써 저자와 번역자의 이름도 가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어 번역은 민족시보 고 송인호 주필이 담당했다. 저자명은 ‘김영기’, 번역자는 ‘이호배’이다. ‘김영기’라는 필명이 조영래 씨 등 당시의 민주인사의 이름에서 한 글자 따온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번역자 ‘이호배’라는 이름도 배동호씨와 송인호씨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영화 ‘어머니’ 상영운동

일본어판 전태일 평전을 일본사회에 널리 알리는 한편 한국노동자의 투쟁을 보다 광범위하게 홍보하는 방법으로서 평전의 영화상영운동을 배 선생이 제기했다. 무척 규모가 큰 운동 제기는 한민통 활동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그 실현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경험한 적도 없고 전문지식도 없는 극영화 제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재정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영실행위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등이 긴급하게 논의되었다.

영화제작에 관해서는 당시 김경식 문화국장의 진두지휘 아래 진보적인 연극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카이의 모임’의 조언과 지원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촬영감독 나카오 슌이치로 씨를 중심으로 재일동포 김덕철 씨가 촬영을 담당했다.

상영실행위원회는 중앙추진위원회 아래 한국민주화운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일본인이 각 지방에서 조직화하게 되었다. 중앙추진위원회에서는 일본의 국회의원, 교수,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많은 저명인사들을 영화의 추천인으로 조직하고 각지에서 조직된 실행위원회에는 노동조합, 청년 여성단체, 반전평화단체, 반차별단체 등 각계각층, 다종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특히 전국조직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총평)와 부락해방동맹이 실행위원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재정수입의 기본은 영화감상 관람료로 충당하기로 했다.

영화 제목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전태일’ ‘불꽃’ ‘결사의 호소’ 등이 후보로 올랐다. 토론 결과 아들 전태일 열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한국노동자의 어머니’로 분투하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가 영화 전면에 나오는 것이 좋다는 판단아래 ‘어머니-분노는 불타오른다’로 되었다. 제목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이미지와 겹치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어머니’ 상영으로 한국어 ‘어머니’라는 단어는 일본에 널리 퍼져 일본인이 잘 아는 한국어의 하나가 되었다.

이소선 어머니 편지. 사진은 영화 속의 어머니와 일본유명 배우 요네쿠라 씨.  1979년 2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이소선 어머니 편지. 사진은 영화 속의 어머니와 일본유명 배우 요네쿠라 씨. 1979년 2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당시 진보적이며 유명배우였던 요네쿠라 마사카네 씨가 영화 취지에 찬동하여 이소선 어머니에게 조언하는 민주인사 역으로 특별출연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영화 엑스트라로 한민통, 민주여성회, 한청 회원들도 다수 출연하여 조직 내의 노동운동 지원에 대한 기운은 더욱 높아졌다.

영화 ‘어머니’는 1978년부터 79년까지 2년간, 일본 전국 400군데에서 자주 상영되어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했다. 상영운동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한국노동자들이 놓인 처지를 알게 되었고 동시에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투쟁에 깊이 감동해 한국노동운동을 지원하자는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상영운동과 관련하여 이소선 어머니가 “내 아들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어갔습니다”, “내 아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내가 작은 몫을 맡아서 모자라는 힘이나마 전심전력으로 참여해온 우리들 한국의 억압받는 근로자들의 이야기가 외국땅에서 연극으로 영화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밤을 새워 울었습니다”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어머니’ 상영운동의 성과

‘어머니’상영운동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노동운동지원과 민주화운동지원의 큰 물결이 일게 되어 한일연대운동은 질, 양의 면에서 심화 확대했다. 또 일본인들 속에서 이 무렵부터 ‘일한연대’가 아닌 ‘일한민중연대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듯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입장과 관점에서 한일연대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 흐름은 한일연대운동으로 하여금 한국 진보세력이나 자주통일운동세력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영화 '어머니' 호평 속에 개봉. 1978년 11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영화 '어머니' 호평 속에 개봉. 1978년 11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상영운동으로 연대운동은 ‘풀뿌리운동’적으로 퍼져 일본각지의 ‘어머니’상영실행위회가 모체가 되어 많은 지역에서 한일연대조직이 결성되었다. 연대조직의 활동은 5월 민중항쟁과 6월 민주항쟁에 연대하는 행동으로 발전해갔다. ‘어머니’상영운동은 일본의 노동운동의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총평 의장이었던 고 마키에다 모토후미 씨는 영화 ‘어머니’를 본 후 “노동운동의 원점을 다시 한 번 배울 기회를 얻었다”고 감상을 말했다.

한민통의 어머니상영운동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한국노동자의 투쟁을 널리 국제사회에 알려 한국노동운동 옹호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노동운동에 기대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한민통의 한국노동자 지원활동은 애국론의 이론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배동호 의장의 훈도를 받고 해외에서 조국통일운동에 매진하는 한통련은 한국노동운동의 향방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호평연재' 1979년 1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호평연재' 1979년 1월 21일호. [사진제공-한민통]

전태일 열사의 결사의 호소부터 50년, 끊임없이 한국노동운동은 발전하여 지금은 두 개의 내셔널 센터를 가지고 200만 노동자를 조직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노동운동을 전력 다해 지원해온 한통련은 큰 기쁨과 긍지를 가진다.

하지만 한국노동운동은 실업자문제, 비정규직문제, 노동조건 개선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다. 이마에 땀 흘리는 노동자가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도록 노동운동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특히 한통련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달성과 노동자의 생존권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결코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주권이 침해되고 조국이 두 개로 분단된 상황에서는 노동자의 생존권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조국 분단으로 생활과 생존을 가장 위협받고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이며 민중이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완전한 주권 쟁취와 조국통일 실현이야말로 모든 민중의 흔들림 없는 생존권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전태일의 정신 계승과 발전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한통련은 전태일 열사 50주년을 계기로 한국노동자가 반외세 자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더한층 주체적으로, 더한층 강력하게 참여할 것을 절실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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