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들의 분열은 강경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나타났습니다. 강경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노선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성계를 지도자로 하고, 이방원이 실질적으로 총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경개혁파에는 과전법을 입안한 정도전, 조준 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건개혁파는 이렇다 할 지도자나 구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개혁의 폭이나 속도에 대한 관점에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왕조를 바꾸는 식의 급격한 개혁에 대해서만은 반대한다는 데에 공감했습니다. 온건개혁파는 정몽주, 이색, 길재, 문익점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강경개혁파가 옳은지, 아니면 온건개혁파가 옳은지 흑백논리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온건개혁파는 워낙 색깔도 많은 차이가 나고 자체 구심도 없어서 그 뒤의 역사를 떠맡을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3대 충신으로서 3은의 하나로 불리는 이색은 `옛 법을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다`고 주장한 적도 있을 만큼 개혁을 뒷걸음질치게 하려는 보수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몽주를 비롯해 온건개혁파가 모두 그러한 보수적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강경개혁파의 독주를 가로막으려고만 했을 뿐 다른 대안을 내놓을 능력은 없었습니다.
 
온건개혁파는, 그 시대의 의식 수준으로 볼 때 왕조를 바꾸는 이른바 역성혁명은 민중들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점을 활용하여 강경개혁파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창왕을 몰아낸 뒤 왕이 된 공양왕은 공민왕의 먼 친척인 왕요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왕이나 창왕과는 달리 왕손이 아니라는 구실을 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온건개혁파는 이제 정통성 있는 왕손이 왕이 되었으니 고려 왕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개혁을 추진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경개혁파 쪽에서 볼 때 고려 왕조는 이미 수명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의욕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면 껍데기뿐인 고려 왕조를 새로운 왕조로 바꾸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현재의 왕이 정통 왕손이냐 아니냐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강경개혁파는 자신들의 생각에 개혁파가 고분고분 따르기를 바랐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신망도 있고 능력도 있는 정몽주가 그들의 뜻에 동참한다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은 순풍에 돛 단 듯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는 정몽주에 대한 협조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원의 시조를 아무런 원칙 없이 시류에 따라 처세하라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명분에 거리낌 없이 소신껏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하는 데에는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의 권력욕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권력욕은 역사를 보는 데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권력욕 그 자체가 없는 사람은 있지도 않고, 그러한 사람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입니다. 그것보다는 권력욕 그 자체만을 위해 역사에서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가, 아니면 권력욕이 역사 발전과 서로 결합되느냐 하는 측면을 구별해 내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내 정몽주는 이방원의 제의를 거절했고, 선죽교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들의 싸움이 죽음까지 불러왔다는 것은 그때 이들 사이의 갈등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방원은 정몽주만 동조해 준다면 보수적이기까지 한 온건개혁파들을 제거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몽주가 동조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일을 추진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이른바 역성혁명은 그 시대의 의식 수준이나 사회의 발전 정도로 볼 때 명분이 대단히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몽주를 죽여 없애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쓰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정몽주의 `임 향한 일편단심`은 임금을 향한 것도 아니고, 고려 왕조를 위한 충성심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 그가 옳다고 보는 정치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마치 아무런 사심이 없는, 오로지 충절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 한 그의 정치노선이 역사적으로 볼 때 반드시 옳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위해 어떠한 회유나 압력에도 무릎 꿇지 않고 죽음까지 마다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세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강한 쪽으로만 기우는 친일파나 해바라기 정치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의 정치노선이 지닌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발전에 대한 기여도를 중심으로 보아야지 지조나 충절의 차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머릿속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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