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진(중앙대학교 겸임교수, jsjpol@yahoo.co.kr)


최근 중국의 탈북자 강제연행 건이 논란거리가 되고도 있지만, 중국은 이미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탈북자 문제가 잘 드러내듯이 `중국변수`는 향후 우리의 외교적 선택과 입지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향후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의 협력문제에 있어 `중국변수`와 `미국변수` 사이에서의 우리의 `외교적 선택`은 아주 중요한 관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논하기에 앞서 여기서는 기왕의 일방적인 `중국위협론`을 재검토해본다. 

미국이 중국을 경계하는 근본적인 이유

사실 중국위협론을 구성하는 실질적 내용의 진위(眞僞)여부를 떠나, 분명 미국이 중국을 경계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명적이고 문화적인 바탕과 연결된다. 그것은 중국이 서구의 가치체계 및 정치사회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나름의 발전전략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류이데올로기 틀내에서는 중국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산업화를 지속하고 있다는 측면이 세계화의 추세속에 예외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이가 바로 헌팅톤이다. 알다시피 이념으로 인한 분쟁이 사라진 앞으로의 세계에서 분쟁의 원인은 이념이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문명간의 갈등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중요한 함의를 던져준다. 이는 미국이 탈냉전기를 맞아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탈무장과 같은 정책을 펴는 것은 오류이며, 오히려 미국은 문명적으로 다른 중국과 아랍국가들의 연합세력의 도전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정책적 시사점을 지닌다. 최근 강화되고 있는 일방주의(unilateralism) 기조 및 공세적 군사전략으로의 변화흐름은 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논거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주요한 도전세력이 될 것이라는데 `중국위협론`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른바 `중국위협론`의 동아시아 관련 부분을 검토해보자. 이는 최근 활발히 제기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도 작은 단서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작금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세계적으로 블록화 추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나온 자구책 성격을 갖지만, 동시에 지난 한 세기 이상 무비판적으로 진행되어 온 서양 일변도의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성찰(省察)을 담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는 지난 97년 말 아시아가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부각됐고 약점을 보완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세계화로부터 지역적 이해를 지킬 대안의 하나로 부상했으며, 지난 9·11 테러 이후 문명간 대립이 강조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또 2002년 유럽연합이 유로화를 본격 도입하자 동아시아에서도 경제 블록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는 실정이다.

헌팅톤의 경우, 냉전 이후 동아시아지역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는 이 지역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상호협력이나 평화구축의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동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다문명적 성격(multicivilizational nature)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공동의 안보와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동아시아 자신의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파악한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는 유럽과 달리 지역내 유력한 국제제도가 형성되지 않은 이유라고 설명된다.

"동아시아 공동체"론에 대한 헌팅톤의 주장과 반론

둘째, 동아시아 역내국가들은 중국에 `줄서기(bandwagoning)` 할 것으로 파악한다. 역내 다른 국가들은 물론이고 일본조차도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조짐이 보이면, 중국을 추종할 가능성이 많다는 식이다.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전망을 비현실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셋째, 향후 미국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중국과 필연적으로 갈등과 긴장 관계를 겪을 것이며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냉전상태에 돌입할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같은 헌팅톤의 주장은 타당한가? 첫째 논거인 "동아시아 내부의 불안정성"은 이 지역의 다문명적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냉전시대 양극질서와 이데올로기 대립이 유럽과 다른 질서를 동아시아에 부과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과거 100여년간의 서방에 의한 분할지배의 희생물이 되어왔던 역사적 경험, 또한 식민주의에 대한 민족해방운동과 그로 인해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의 탄생과 이와 다른 경로를 겪은 국가들의 탄생, 이로 인한 동아시아 역내의 이데올로기 대립 등 오랜 기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온 현실과 결코 유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이는 문명적 특성에 따른 그래서 장기적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크게는 국제환경의 변화, 좁게는 동아시아 역내국가들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질서가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논거인 "동아시아국가들의 중국 편승론"은 서구의 국제관계가 유럽국가들 국내정치의 구조인 다원주의를 반영해 견제와 균형을 지향하는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국가들은 아시아사회에 지배적인 권위주의의 전통을 반영하여 강한 나라에 줄서기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향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든 일본이든 러시아든 한 국가가 패권적 지위에 근접하려 할 때, 다른 국가들이 연합하여 그 나라의 패권을 견제하는 노력이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향후 등장할 수 있는 통일한국도 그러한 세력균형외교에서 나름의 조정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한나라가 패권을 장악하고 여타 국가들은 그 뒤에  줄을 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논리는 오직 "미국만이 동아시아 전역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논리의 변형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테판 왈트(Stephen M. Walt)의 논의가 잘 보여주듯 국가들은 외부로부터의 안보위협에 직면하게 되면, 그 위협세력에게 편승, 줄서기를 하기보다는 그 세력을 견제하려 노력하는 것이 훨씬 우월한 경향이며 이는 동, 서양을 막론한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균형과 줄서기 가운데 위협하는 국가를 견제하여 동맹을 맺는 균형의 행위가 일반적이며, 위협국과 동맹을 맺는 이른바 줄서기(bandwagoning)는 별로 관찰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셋째 논거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미·중 갈등론"이다. 국제질서에 있어서 국가들간의 갈등과 협력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요인은 될 수 있지만, 문화적 차이로 이를 설명하는 것은 단순하고 위험하다. 향후 미국이 맺어나갈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들과의 전략적 관계는 문화적 동질성과는 매우 다른, 아주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관계에 바탕을 둘 것이라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인 설명방식일 것이다. 예컨대 베이츠 길(Bates Gill)은 대 중국 관계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전면적인 봉쇄전략도 본격적인 관여정책도 아닌 관여와 무시의 혼합, 즉 "제한된 관여정책(limited engagement)"이여야 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 중국정책 딜레마

미국으로서는 그들의 이념에 반하는 새로운 `적의 원형`으로 중국을 지목하고 이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쉽지도 않다. 미국은 이미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관여(engagement)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기업가들 및 투자가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의 대 중국정책이 지닌 핵심 딜레마중의 하나이다.

요컨대 우리를 둘러싼 `중국변수`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닌 `외부`가 규정하고 재단하는 일방적 틀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특히나 논의의 자아준거성(自我準據性)이 절실한 부분일 것이다. 다음은 헌팅톤을 비판하며 `문명의 共存`을 주창한 하랄트 뭘러(Harald Muller)의 말이다.

"변혁과 위기, 곤경의 시대에는 두 가지 근본상황이 함께 움직인다. 불안이 증가하고 경계가 중요해진다. 적, 희생양을 찾는 욕구가 생겨나고 이 욕구는 한 점 망설임 없이 `낯선자`를 향한다. 적이란 무서운 위협이지만, 특히 시대가 사악할 때는 그만큼이나 그리운 대상이다".

사실 미국인들의 정체성 위기는 "적 혹은 위협의 부재(不在)"로부터 나온다. 건국당시 미국인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타자(他者)에 대한 대립항을 설정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해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