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의 시대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탁월한 색채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원래 감성이 뛰어난 민족은 색채감각이 뛰어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흰색 옷을 입었다고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옛날의 색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신분의 표징이기도 하고, 지배층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무나 색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역사에도 색을 통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염색은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특별한 날에는 화려한 색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결혼식, 돌잔치, 상여를 장식하거나 굿을 할 때는 무제한의 색이 허용되어 사람들의 색에 대한 욕구의 숨통을 열어주었다.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 발전한 나라이다. 색을 규정하는 것도 여기에 준했다. 색은 천한 것이라고 여겼고, 선묘, 필력, 먹의 농담은 고급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는 말이다. 그림에서 색채는 최소한으로 사용되어야 격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조선의 선비들은 현실의 색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관념의 색을 추구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관념 덩어리이다. 미술도 허구이자 관념이고 색이나 구도, 명암, 선묘 따위도 관념이다. 문제는 그 관념의 세계가 무엇을 추구하는 가이다.

색상은 자유와 자신감, 풍요를 뜻한다. 거기에 비해 흑백 따위의 무채색은 절제와 권위와 깊이를 드러낸다. 일제 식민지시대나 군사 독재시절에는 통제를 목적으로 색을 제한하고 흑백 따위의 무채색을 강요했다. 사람들에게는 검거나 흰 교복 따위의 무채색을 강요하면서도 통치자들은 화려한 요정에서 총천연색의 옷과 음식, 물건을 가지고 놀며 자유를 만끽했다. 시대의 발전은 곧 색의 해방이었다. 흑백TV는 칼라TV로 바뀌었고, 단색 일변도였던 건물이나 옷, 가전제품, 자동차는 화려한 색으로 치장을 하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색은 자본과 만나 향기 없는 꽃이 되었다.

우리는 색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한 사람들은 자유롭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 쉼 없이 눈을 두리번거리는 나약함이 숨어있고, 짙은 화장 속에는 외로움이 묻어 나온다. 자유는 위장되었고, 자신감은 물질의 척도와 비례한다. 색은 충분히 해방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통과하고 정제되지 않으면 허영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색을 소비하는 시대가 아니라 자신만의 색을 창조하는 시대로 가야한다.

재일동포의 조선화 - 초봄

▶초봄
김강영(재일작가)/민족화/145.5*97/1990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재일 동포 김강영이 그린 <초봄>이란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1993년 일본에서 있었던 `코리아통일미술전`에 해외동포 자격으로 출품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다. 화집에는 `민족화`로 소개되어 있지만 민족화란 북한의 조선화를 뜻한다. 이 작품전에는 북한의 조선화가 모두 민족화로 소개되고 있다. 아마 통일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합의했을 것이다.

북한미술을 소개하는데 재일 동포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로 보이는 이 작가의 작품이 북한 조선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작품의 방식도 `민족화`로 소개하고 있고, 화면구성이나 채색법 따위가 조선화와 거의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작품의 내용이다. 작품의 내용은 교복을 입은 총련계 여학생이 이른 봄날 매화나무 아래에서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는 감상자를 교양 하거나 정치적인 의미를 전달하고자하는 의도가 비교적 배제되어 있다. 화면 윗부분을 꽉 채운 매화의 표현과 중앙의 넓은 여백, 바닥에 떨어진 몇 개의 꽃잎, 낮은 채도의 붉은 색조와 파란색조의 대비는 상당히 서정적이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준다.

특히, 여고생쯤으로 보이는 소녀의 맑고 깨끗한 얼굴표정과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초봄에 피는 매화의 이미지와 단정함을 잃지 않은 여학생의 느낌이 잘 어울린다. 색상을 사용했지만 절제된 느낌이고,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는 여백은 여학생의 생각만큼이나 깨끗하고 넓어 보인다. 여학생 대신 조선의 선비를 그려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작품에는 일본에서 한복을 입고 조선말과 글을 사용하는 재일 동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여학생의 얼굴은 누가 봐도 우리의 귀여운 옆집 동생이나 서글서글한 누나의 얼굴이다. 일본에 살고 있지만 그대로의 우리 얼굴과 표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표현은 우리 민족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재일 동포의 실제 처지는 꽃을 감상하는 여유를 가질 만큼 한가롭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는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하고, 두 개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민족의 현실은 이들을 절망시키고 있을 것이다.

통일을 방해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인 시대는 지나갔다. 통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릇된 욕망덩어리이다. 전쟁과 폭력과 살상무기와 협박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저 유치한 욕망일 뿐이다. 꽃을 꺾어 소유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가슴속에 풍성히 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작품 속의 소박하고 단아한 여학생의 눈빛은 붉은 매화보다도 뜨겁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