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혁기자(bhsuh@tongilnews.com)



<연방제 통일론 시리즈> 차례
1. 연방제와 국가연합
2. 북한의 연방제 통일정책의 변천
1) 과도적 연방제에서 최종통일방안으로(1960-80)
2)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국가연합적 연방제안
3. 김대중정부의 통일방안
4. 남북한 통일방안의 비교 검토
5. 통일방안 합의(대내적, 남북관계 차원)와 전제조건(통일환경 조성)


2. 북한의 연방제 통일정책의 변천

1) 과도적 연방제에서 최종통일방안으로(1960-80)

(1) 1960년 과도적 `남북연방제`안


북한은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한 한국전쟁이 종전되고 난후 전후 복구에 전념하였다. 북한은 1954년 시작한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시작한 경제건설 5개년 계획을 성공리에 마무리하였다(5개년 계획 목표는 1년 조기달성). 그리고 1958년에 들어 북한은 농업집단화, 상공업의 국공유화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의 물적 토대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 1961년 제4차 노동당대회에서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공고화 하였다"고 자평하였다.
당시 북한의 전후 복구 및 경제성장은 남한과의 비교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북한은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대남우위에서 남북대화와 경제교류 등 적극적인 대남제의를 하였다. 북한이 연방제 통일방안을 처음 제시한 것은 이같은 사정에 연유한다.

김일성은 1960년 `조선인민의 민족적 명절 8.15 해방 15돐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에서 연방제를 통일방안의 하나로 제의하였다. 그가 제안한 연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김일성저작집 14권>, 243-244쪽)이었다.

북한이 당시 제안한 연방제는 대남 우월감에 기초한 제안이었다. 이같은 평가는 △당시 북한은 일차적 통일방안으로 남북총선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당시 북한 인구가 남한에 비해 크게 작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하며 △총선거가 불가능한 경우의 대안으로 제시된 연방제안의 배경도 "남조선의 경제적 파국 수습"을 위한 "경제문화교류와 호상협조"를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 당시 북한의 연방제안은 미국이나 유엔 등 "외부세력"의 간섭 배제를 전제로 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당시 제안이 절대적인 대남우위와 이승만 정부 붕괴 직후 혼란한 남한 정국을 고려한 선전적 의미가 개입되었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제안은 장면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2) 1970년대 `고려연방공화국`안

1960년대의 남북관계는 북한의 경제발전전략의 한계 상황과 그에 대비되는 남한의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강경노선의 실패와 박정희 반공정권의 장기집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초 중-소분쟁의 여파로 미국이 추진한 대소 공동전선 구축차원에서 동북아에서는 미-중, 일-중간 관계개선이 나타났고, 적대적 의존관계를 존재이유로 하는 남북한 정권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주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1971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외교부장 허담의 연설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연방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후 1973년 6월 23일, 김일성 주석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후사크 환영군중대회에서 `조국통일 5대 강령`을 제시하는 가운데 완전한 통일방도로서 `고려연방공화국` 수립이 포함되었다.
당시 `조국통일 5대 강령`은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정치 군사 경제 등 다방면의 합작, 교류 실시 △`대민족회의` 개최 △`고려연방공화국` 수립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등이었다. 이같은 내용은 위에서 말한 70년대 초 동북아의 데탕트 분위기와 남북한간 국력의 균형상태를 반영한 대남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이 제의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통일국가의 국호를 처음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한 유엔 가입을 제시한 것과 △이때의 연방제도 과도적 의미를 가지지만, 60년 총선거를 대신하는 의미 보다는 뉘앙스가 강해졌다는 판단이다. 이같은 판단은 `고려연방공화국`안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로 규정하고, `대민족회의`가 60년 연방제를 담보하는 `최고민족위원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대외관계에서의 공동보조", "정치 군사분야의 합작"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대민족회의` 개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북한의 대남제안은 남한정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소위 남조선혁명전략의 일환에서 전개되었으며, 치열한 당시의 외교경쟁에서 평화적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제고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3)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

1980년 북한 노동당 제6차 당대회는 북한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6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3대혁명노선에 입각한 `온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천명하였고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공식화 하였고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 하였으며 △연방제 통일방안을 최종적인 통일방안으로 확정하였다.

1970년대 북한의 평화적, 비평화적 방법의 대남정책을 전개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남북한간 경제력은 7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남한이 우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0년 동북아는 미국의 레이건 정권, 일본의 나카소네 정권 등 신보수주의정권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이후 미-소간에는 신냉전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시 북한 안팎의 이같은 객관적 상황은 북한 지도부에게 단기적으로는 북한식 통일노선이 실현되기에 어렵다는 점과 체제의 공고화가 긴요함을 동시에 말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제6차 노동당 대회에서 채택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기존의 연방제안과 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김일성 주석은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를 통해 연방제에 관한 △자주적 정책 실시 △경제적 합작 교류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등 `10대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이와 동시에 △남한 "군사파쑈통치"의 청산 △긴장상태 해소 및 전쟁위기의 제거 △미국의 "두개의 조선조작 책동" 저지와 한반도에 대한 간섭 배제 등 3가지 전제조건을 덧붙였다.

김일성은 이 방안을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방국가 기구로 최고의결기구 성격의 `최고민족련방회의`, 최고집행기구로 `연방상설위원회`를 그 안에 두어 남북한 각 지역정부의 지도, 연방국가의 전반적 사업 관할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지역정부는 연방정부의 지도 아래 독자적 정책을 실시하며, 연방정부는 대외적으로 블록 불가담의 중립원칙을 견지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북한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이 기존의 연방제안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이 제안이 △최종적 통일방안으로 제시되었으며 동시에 북한의 대남통일정책이 대화와 협상을 보다 강조하기 시작한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과 △위에서 말한 이유로 체제유지 및 강화 의도가 통일방안에 용해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상과 제도가 다른 두 정치·사회체제가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하나의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역사상 최초의 연방제안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북한이 과거에 강조하였던 한반도의 공산화, 무력노선의 수정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방안에는 체제 확산 보다는 체제 유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북한 지도부의 의중이 담겨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계속)

* 다음 번에는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국가연합적 연방제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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