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은 이와 같은 조치를 통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한편, 성균관을 중건하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유교교육을 부흥하고 신진세력의 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책은 당연히 민중들한테서는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성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에 위협을 느낀 권문 세족한테서는 끈질긴 방해를 받았습니다. 권문 세족들은 신돈이 밀어붙이는 개혁 정책이 언제 어디서 자신들에게 칼날로 다가올지 두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문 세족들은 기회만 닿으면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짜냈습니다.

마침내 신돈은 등용된 지 15년 만인 1371년에 왕이 되려 한다는 권문 세족의 모함에 걸려 처형되고 맙니다. 권문 세족의 끈질긴 방해와 압력에 견디지 못하여 신돈을 처형한 공민왕은 무기력하고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권문 세족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책이 실패한 것은 개혁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려 사회가 얼마나 원의 지배와 권문세족의 횡포 때문에 병들어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이 복고적 성격을 띠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신진세력을 규합하는 데 얼마간 장애가 되었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개혁은 단호하고 과감하기는 하였지만 전망은 대단히 불투명하고 복고적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권문세족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분쇄하여 고려 사회를 전기의 번영하던 사회로 되돌리겠다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전망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돈이 야담집 따위에서 요승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의 개혁이 실패하고 그가 권문 세족의 손에 숙청되었기 때문입니다. 권문 세족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악의적인 이야기를 꾸며냄으로써 신돈을 깎아 내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돈에 대해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가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권문 세족들이 사실을 철저히 왜곡했고, 시대 상황도 공식 기록 말고는 거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돈이 공민왕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등용된 핵심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공민왕이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신돈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돈이 제거된 다음부터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신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가다가 권문 세족의 덫에 걸려 제거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옛 말에 "이기면 관군이고, 지면 역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실의 투쟁에서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신돈처럼 이러한 말을 실감하게 해주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신돈은 무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요승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면밀히 살펴본 사람들에 의해 그는 복권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에 이긴 사람이 역사 속에서도 반드시 옳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오늘날처럼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잘못 평가된 역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5.16군사쿠데타나 12.12군사반란, 5.17군사쿠데타 등이 불과 2, 30년 사이에 역사를 후퇴시킨 쿠데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로잡아야 할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억울한 사람의 원을 풀어 주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억울한 사람의 원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왜곡한 자들이 현실의 문제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돈의 복권은 우리에게 역사 바로잡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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