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허영철 선생을 찾아 새로 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김제로 내려가는 길은 비와 눈이 섞여뿌리는 겨울답지 않은 날씨였다. 약속 장소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북도당 지도원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검거돼 5년간 복역한 경력이 있는 조영학 선생(74)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일시 : 2002. 1. 26
장소 : 김제시 한 음식점
대담 : 김치관 기자
사진 : 황기룡 객원기자
`평생을 창살 없는 감옥에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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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에서 만난 조영학 선생(왼쪽)과 허영철 선생.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 통일뉴스 : 허영철 선생님과는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요.
■ 조영학 : 그전에는 몰랐어요. 얼마전에, 오래 고생하시고 얼마 안돼서 출소하셔서 제가 댁으로 찾아가서 뵈었죠. 요새는 가끔 만나 뵈어요. 80이 넘으셨으니 저보다는 연장이시죠. 깊은 내력은 내가 잘 모르고. 고생을 많이 하시고 나오셨다고 하니까 선배님으로 찾아뵌 거죠.
□ 한국전쟁 시기에는 주로 전북지역 산으로 많이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 그러믄요. 비합법이니까. 정읍 밑에 자그마한 역이 하나 있어요. 철도 넘어서 하룻밤 사이에 변산까지 가고. 노령산맥 타고 넘어오면 그 철도를 넘으면 평야에요. 안내원이 있으니까, 소위 `선 요원`이라고 있으니까 가지 그냥은 못가죠.
□ 목숨이 왔다갔다할 때가 많았겠습니다.
■ 그때야 뭐 생사를 초월했죠. 죽음에 대한 건 뭐. 무기 아니면 사형이고 죽은 사람이 더 많아요.
□ 어떻게 구속 되셨는지요.
■ 전쟁 포로로 잡혔는데 나중에 그게 안되니까 폭도로 취급한 거죠. 그래가지고 일반 사법 경찰관이 와서 취조를 해가지고 군법회의에 넘겨서 군법회의에서 형들을 받고 그랬죠.
나는 유격활동을 했으니까 소위 `빨치산`이니까. 국군들이 토벌작전 할 적에, 대대적으로 사단 규모로 공격했잖아요. 그래서 죽은 사람도 많고 잡힌 사람도 있고.
□ 잡힌 뒤에는 어떻게 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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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때 빨치산 활동을 하다 구속 되었던 조영학 선생.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포로수용소에서도 엄청난 사람이 죽어나갔어요. 텐트 쳐놓고 지푸락 좀 깔고 거기서 자고 먹고 하니까 전부 이질이 걸려가지고 사체가 텐트 안에 소복소복 쌓이고 그랬는데 그나마 우린 젊어서 살았는가 봐요. 나이가 스물 너댓살 밖에 안됐으니까. 한번 이질 같은데 걸리면 대개 다 죽습디다. 약도 별로, 먹을 것도 시원찮고, 잠자리도 가마니나 하나 깔고 땅바닥에 자다시피 하니까, 살아 남겠어요? 노약자들, 몸 약한 사람들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32조 위반으로, 난 법학공부를 많이 못해서 모르는데 그렇다고 하데요. 나는 5년 받았어요. 비교적 작게 받았죠. 거기에서 곧이 곧대로 말한 사람들은 중형을 받고 조금 요령을 부리고 인내를 가진 사람들은 가볍게 받고.
□ 그러면 5년간 복역하시고 나오셨겠네요.
■ 그렇죠. 5년을 복역하고 나와서 내가 서른 살에 결혼을 했으니까.
그 뒤로 나는 사회운동 한 것은 없고. 항시 내 주위는 이사만 가면 따라 다니니까.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평생을. 창살없는 감옥이라더니 그말이 맞아. 그렇게 평생을 살았어. 근자까지 마찬가지죠. 사회활동 하는 것도 없고 무위도식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이젠 별 관심 없겠죠. 내가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 전쟁 전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 학생때는 운동을 했지. 나 이리 공업학교 거기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에 가서 공부 좀 하다가. 나는 미술은 아니고 국문학과. 그때도 학생운동을 한 셈이죠.
여기 김제에 와서 합법적인 일을 하다가 그 다음에 9.28때 같이 올라갔지. 그 역경을 다 이야기하려면... 몇 시간 이야기를 길게 해야 할거여,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그런 내 내력을 아무한테나 말하기도 뭣하고. 큰 자랑도 아니지만.
조영학 선생과의 차분한 만남은 후일로 미루기로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허영철 선생이 도착했다. 허 선생은 약속한 식당을 새벽에 들러 미리 확인을 해두었는데 인터뷰가 내일인 줄 잘못 알아 늦었다고 미안해 하신다.
조영학 선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허 선생은 저녁 식사에 북한산 들쭉술로 반주를 곁들인 자리에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약주를 드시는 등 시종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부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선거받아`
□ 통일뉴스 : 언제 출옥하셨는지요.
■ 허영철 : 70세 이상 고령자로서 만 30년 이상 산 사람들 골라내서 91년 2월 26일날 나왔어요.
□ 원래 고향이 김제이십니까.
■ 부안이예요. 6.25 이후에 가족들이 여기 김제로 이사왔어요. 처가가 여기 김제거든.
□ 춘추가 어떻게 되신지요.
■ 1920년 생이니까. 6.25때는 세는 나이로 31살.
□ 얼마전에 신인영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8.15때 평양에서 뵐 때는 건강하셨는데.
■ 골수암인가 그렇죠. 원래 그분도 부안 출신이에요. 원래 알았지. 신석정이라고 있죠. 시인. 오촌 조칸가 그래요. 시도 쓰고 노래도 좋아해.
47년에 부안에서 3.22사건이라고 있었어요. 1947년 3월 22일에. 그때 전국적으로 총파업이 있었고 동시에 부안에서 농민들 투쟁이 있었는데, 해방후에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거의다 좌익이었죠. 신석정 선생이 부안중학교 선생을 하다가 3.22사건 이후에 김제 죽산으로 왔어요.
□ 선생님은 구술 자료를 남기신 적이 있으십니까.
■ 뭐 별로 그런게 없어요. 정신문화연구원인가 박사과정을 밟는다든가 하는 분이 있어서 나한테도 와서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그걸 책으로 썼어요. 썼는데, 책을 낼 때 원고를 다시한번 보여주라 했는데 그만 내버렸어요. 굉장히 안좋은 데가 많이 있더라고요. 두어 번 두어 시간 만났죠. 여러사람들 걸 합쳐서 냈지.
□ 김하기씨가 쓴 `완전한 만남`이라는 소설에도 등장하신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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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83세인 허영철 선생은 만 3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 계시는 댁은 어떻게 되시나요.
■ 김제시내에요. 집이 뜯겼어요. 소방도로 난다고. 그래서 집을 사가지고 김제시내로 이사했어요. 아들은 교사고. 나하고 집사람하고 여기 있고.
□ 나오셔서는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 91년에 나와가지고 93년부터 아파트 경비했어요. 부안 가서 1년하고 김제에서 6년인가 작년 3월까지 했어요. 주변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 떴고. 나온 다음에도 여러분 떴고. 여기서는 별로 지방에 아는 사람 별로 없고. 나 살던 고향 부안에 노인정 같은데 가면 옛날에 알던 사람들이 있어요.
□ 사모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 건강이 뭐. 나이 많았으니까 벌써. 이제 여든 살 되었어요. 내가 여든 셋이니까 세 살 차이니까. 혼자 사니라고 힘들었고.
□ 사모님이 30년간 계속 옥바라지를 해오셨나요.
■ 찾아오고 편지도 하고. 해방 후부터 계속이죠. 해방 후부터 집에 못있었으니까. 아들하나 딸하나 남매 키우고.
□ 해방후부터 사회활동을 해오셨군요.
■ 해방후 계속, 46년 10월 인민항쟁이 있었잖아요. 그후부터 계속 합법생활을 못했죠. 계속 부안에 있었죠. 46년 소미공동위원회 꾸려지고 47년 소미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다음에는. 48년 대한민국 수립되기 전까지는 국가보안법은 없었어요. 군정 때는 주로 무허가 집회, 정당등록법 위반 이런 걸로. 또 무슨 사건이 있으면 형사문제로.
□ 6.25도 여기서 맞으셨겠네요.
■ 7월 18일에 대전에 완전히 내려오고. 7월 21일 전주, 김제에 인민군들이 내려오고. 그때 다시 합법적으로 했죠. 그 당시에 6.25전에 거의 폭압에 의해서 그동안 있었던 조직들이 전부 파괴되서 조직 수습하고. 나중에 50년 8.15를 기해서 전국적으로 인민군이 들어온 지역, 해방된 지역, 합법적인 지역에서는 지방정권기관들을 선거했어요.
부안도 8월 16일인가 지방정권 인민위원회를 리.면.군까지는 전부 선거하고, 그때 나는 군인민위원회 가서 선거 받으라 해서 선거 받고. 군인민위원회 대의원들 선거하는데 가서 선거를 받았어요. 군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하고 거기에서 위원장 선거하고 집행부를 선거해요. 그때 내가 부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선거를 받았어요.
9월달에 들어와서 9월 16일인가 도에서 소환되어 전주에 가니까 재직간부로서 학교를 가라고 그래. 그때 서울에 이화대학인가 하는데 학교가 있었어요. 정치아카데미라 해가지고. 거기가 내각 간부학교로 되어있었고. 또 도에 인민경제대학으로 거기 추천받아서 갔었어요. 9월 16일이니까. 그때 벌써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에요.
`장항에서 북으로 밀항 기도`
□ 간부학교를 다니셨는데 어떻게 구속되셨나요.
■ 거기가서 학교다니다가 인민군이 후퇴했잖아요. 과정이 좀 복잡해가지고. 학교를 거기가서도 갔었어요. 조선노동당 중앙당학교라는게 있어요. 전시라 놔서 동북 연변으로 기관들이 많이 가서 1951년 3월에 가서 6월까지 3개월 정도 있었어요. 다시 공화국으로 나와 가지고 황해도 장풍군에서 지방정권 일을 했어요. 장풍군이 옛날 장단군하고 개풍군하고 38선으로 끊어져서 양군이 이쪽하고 저쪽하고 합쳐가지고 장풍군이라고 했는데,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했어요. 거기서 있다가 다시 중앙당학교 본교에 가서 공부도 1년 하다가 54년에 여기 나왔어요. 통일사업하러. 광주에서 한 1년 가까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55년 저기 충남 장항에 있다가 붙들렸어요. 7월 하순경에.
6.25 전에만 해도 저기 갔다왔다고 해서 간첩 그런게 없었어요. 6.25 전에 간첩사건이라는 것이 성시백이라고 북에서 나와 가지고 정보수집한 사건이 하나 있었고, 그 다음에 좀 애매한 김수임 사건이 있고. 그런 외에는 왔다갔다 많이 했어요. 김구선생도 남북연석회의 갔다오고. 근데 이번에 나오니 실제 간첩과는 관계없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라고 해가지고 무기를 받았죠.
□ 광주와 장항에서 어떤 임무 같은 것이 있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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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군 인민위원장, 개풍군 인민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남쪽으로 왔다가 구속되었다는 허영철 선생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장항에서 배를 구해가지고 갈려고 그랬어요. 당시에는 배로 오고가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57,8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그 무렵부터는 무조건 저기서 내려온 사람은 사형을 구형하게 되어 있어 검사들이. 그리고 61년 군사정권 수립된 다음 해에 그 이후에 반공사상이 그렇게 강화됐지 그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거든.
충남 홍성에 재판소가 있었어요. 대전지방법원 지청인가 되는데 그때 무기이상 하면 합의부가 있어 가지고 거기서 1심재판을 받았어.
□ 가족들도 여기에 계시고 전향공작도 심했을텐데요.
■ 확고한 신념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잘못했어요. 전향자와 비전향자를 구분해가지고 따로따로 취급하고 비전향자라고 해가지고 갖은 거시기하고 그랬는데, 차라리 그냥 그런걸 따지지 않고 전향권고하지 않고 살았으면 오히려 서로 이렇게 되었을 것인디. 서로간에 우리 같은 민족끼리. 우리 같은 사람은 지금 당한 고생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원망스럽고 그런 건 전혀 없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많이 당한 사람들은 그런 거 생각하지 않아요?
그전에는 가족들 면회도 시켜주고 편지도 자유롭게 받아주고 했는데 61년 군사정권 수립 후에는 일정기간 교도소 있는 사람을 전부 대전으로 집결해 놓고 비전향자들 따로 분리해서 놓고, 8월인가 9월까진가 서너달 편지도 안넣어주고 면회도 안시켜주고 그랬어. 그후에 면회는 안시키고 편지만 넣어주자 이렇게 결론이 났는 모양이더만요. 편지하는 것도 엽서에다가 80자로 한정해서 한 자만 틀려도 안돼. 자연히 생활이 어렵게되면 격하게 서로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1971년 적십자회담 있고, 72년에 7.4공동성명인가 나오고 그래서 우리는 좀 나아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해 8.15 전후해 가지고 전향공작을 강도 높게 시작했어요. 그때부터는 일체 면회도 안들여 보내주고 면회를 시켜주는데 조건이 있어요. 가족들 와서 전향권고 한다는 조건. 그러니까 사회에서 살기 힘들고 그러니까 와서 전향을 권하고. 관에서 그러지 가족이 와서 그러지 복잡했죠. 우리집은 그러진 않았어요.
□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켜보시면서 감회가 남다르셨을 텐데요.
■ 그렇죠. 그때는 우리야 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민족이 누구나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죠. 나도 송환될 때 경희대학굔가에서 봤어요. 그런데 나도 가고 싶은 마음이야 그런디 실제 그 아내되는 사람이 5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자식들 가르치고 같이 갈 수는 없고 그런데 나만 거기가서 잘 지내겠다고 간다는 것이. 전주에도 한 분 있고 과수원 관리하면서.
□ 아드님도 계신데 어떻게 나오셔서 수위를 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 지금도 할 수 있으면 해야죠. 작년 여든 두 살 이러니까. 주민들은 상관없는데 회사가 용역회사거든 그런데 나이 많아서 혹시 사고라도 나면 자기네들이 책임진다고 어려워해서.
작년에 3월달에 나와가지고 집에 있을라니까 심심해서 저기 백산면에 밭을 몇백평 얻어가지고 콩도 좀 심고 고구마도 심고. 그런데 여기서 거리가 한 십리 넘으니까 다니기가 불편해서. 콩은 잘 안나가지고 안됐는데 고구마는 심었는데 밑이 잘 들어가지고.
`다시는 우리 민족끼리 전쟁은 없어야`
□ 북한이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거치고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 하는데요. 북한의 실정이나 통일에 대한 입장은 어떠하신지요.
■ 내가 54년에 저기서 나왔거든요. 그때 아주 50년에 전쟁 시작해 가지고 53년 종전까지 여기서는 상상할 수 없이 다 그냥, 면 소재지, 큰 동리는 남은 것 없이 다 부숴져 버렸거든요. 53년에 정전되고 나니까. 여기서 이승만 정부때지, 정전반대 휴전반대하고 막 그랬잖아요. 그런데 거기서는 빨리 휴전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다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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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전쟁은 없다고 들은 것이 신심이 되었다는 허영철 선생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그때 인제 6.25전까지 소련과 조.소문화협정이 있어요. 다른 특별한 군사동맹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런데 조.소문화 협정이 서로 경제문화교류에 관한 협정인데. 그 후에 군사동맹까지, 만약에 어느 나라가 외국으로부터 침입당하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어 있거든. 중국이 정말 그때 49년 10월달에 혁명을 해가지고 50년 바로 여기 나왔으니까, 1년도 못돼가지고 조선전쟁에 참가한 거여. 중국하고도 조.중동맹이 되어 가지고 군사문제까지도 되었으니까. 미국은 중국하고 소련하고 다 가담해 가지고 전쟁하면 큰 전쟁이 되기 때문에 전쟁은 없다고.
그런데 그후에 많이 정세가 변했지. 1960년대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은 뒤에.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쿠바에서 철수해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저기서 판단하기를 만일 큰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련이 과연 도와줄 것인가. 그래가지고 4대군사노선이 거기서 나온 것이요. 자체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해가지고. 그랬는데 그 후에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사회주의 하면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하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지만. 지금도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간단하지 안잖아요. 이라크나 어디 중동과 전쟁하는 것처럼 탁 치고 나올 수 있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남북이 이렇게 접해 있는데 미군이 3만 5천인가 있고. 일본 오끼나와에도 있고. 지금도 전쟁 일어나면 우리나라 같은데는 간단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것 다 무릅쓰고 전쟁을 미국에서 도발한다면 모르지만, 미국은 가끔가다 심심치 않게 얘기하데.
우리는 어디까지나 다시는 우리 민족끼리 전쟁은 없어야지. 또 남이고 북이고 어디 하나가 침략당한다고 한다면 자연히 남북이 거시기 하게 되고, 결국 가서는 우리 민족의 불행해지는 거 아니여. 그래서 어찌됐든 전쟁은 없어야 돼. 그래서 6.15 공동선언은 반드시 우리가 받아드리고 우리 민족이 지켜서 어떻게든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지. 남북이 통일이 못되고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내가 정전 후에 거기서 여기 나오기 전에 앞으로 전쟁은 없다고 들은 것이 내가 그동안에 쭉 살아오면서 상당히 신심이 돼. 그 후에 여러번 위기가 있었잖아요. 아무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해. 외부에서 어떻든 우리민족끼리만 전쟁 안하려 하면. 그런데 지금 남쪽에서 그렇게 못하잖아요.
□ 작년에 부시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회담 하면서 많이 어려워지지 않았습니까.
■ 대통령이 마음대로 못하잖아요. 미국 그때 가 가지고 한 나라 대통령을 디스 맨(This man)이라 칭하면서. 그리고 지금 남북이 아프간에서 아무런 긴장된 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할 수 없이 동원령 내리고, 그러니까 자주성이 없다는 거죠.
□ 올해 북쪽에서 지난 22일에 3대 제의와 3대 호소를 했습니다. 남쪽에서는 어떻게 포용할지도 관심거리입니다.
■ 그렇게 해야죠. 여기서 반대하는 층도 있으니까. 어떤 정권이 들어서던 통일관련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야죠.
부시가 된 다음에 좀 어렵기는 어려웠지만 미국이라고 저기다 선심쓰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자기들도 다 타산해봐 가지고 이렇게 해서 되겠는가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저쪽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 신문이나 TV는 보십니까.
■ 테레비 신문은 봐야죠. 컴퓨터를 내가 한달쯤 우체국에 다니면서 하루에 두시간씩 배웠고. 인터넷도 들어가죠.
□ 요즘도 집회에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 사회안전법인가 보호관찰법인가 그게 있어요. 내가 91년에 나왔는데 2년씩 갱신하거든요. 다섯 번인가 갱신했어요. 또 금년에 와서 갱신해요. 그런데 그게 있어 가지고 무슨 정치단체에 가담하면 안된다. 같이 그런 법에 걸린 사람끼리 회합해도 안된다. 이런 거 있어 가지고. 재작년 송환될 때 전주 고백교회에서 초청을 했거든요. 기자들도 모이고 그랬는데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해가지고 한번 싸웠더니 경곤가 뭔가 해가지고. 근데 뭐 서울 같은 데서는 거의 안받아요. 우리는 촌에 있으니까. 며칠 전에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드만. 가면 좀 일러주고 가라고. 근디 그 사람들만 탓할 수가 없어. 우리가 혹시 서울가서 나타나고 그러면 이 사람들한테만 어디 간 줄도 모른다고 독촉하고 그러니 자연히 말단에 있는 사람이 어쩌겠어요.
한 몇 년 전에는 독일에서 왔어. 인터뷰 좀 하자고. 또 어디좀 같이 다니자고 그러드만. 그래서 그런 건 어렵다고 했더니 경찰서에 가서 자기들이 데리고 좀 다닐란다고 얘기를 했는 모양이여.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직접은 가타부타 말 못하고 나한테 와서 앉아있는 거여. 그 사람들 오면 나갔다 해 가지고는 하루종일 숨바꼭질 하다가는 하하하... 그런데 그것도 법이 우스운 것이 우리가 99년에 마지막으로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전부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이 없어요. 그때 나와서 북에 안간 사람도 보안관찰법이 적용 안되었어. 근디 먼저 나온 우리만 계속 10년이 넘었는데 끌고 있어.
`할말 다하고 당당하게 살아`
□ 금강산이나 아리랑 축전에도 좀 다녀오시죠.
■ 딸이 미국에 있으니까 바로 나온 다음에 초청장을 보내서 여권신청을 했드니 안돼. 법무부 장관 허가를 받아야 한다나 어쩐다나. 금강산도 가보고 싶고 중국같은 데도 여행비도 싸고 그러니까 가보고 싶지만 안돼.
권낙기 선생이 가는 것은 통일연대 소속으로 해가지고 배정을 받은 거여. 권낙기 선생은 두 번이나 갔는데 임방규 선생은 한번도 못갔거든. 이번에 금강산 가는데 학생, 교사, 이산가족 이런 사람들은 보조금 준다고 하드만. 많이 나아졌죠.
저래가지고 김대중이 어렵겠드만 인척까지 연루되어 가지고. 처음있는 것은 아니지만 묻혀지고 그런데 파헤쳐져 가지고 그렇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남북 문제 만큼은 역사에 남을 거여. 재벌치고 정주영이 잘 했고. 역사에 뺄 수 없을 거요. 소 천마리 몰고 하하하.
□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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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소원은 통일이 빨리 되었 으면 좋겠다는 것.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
징역을 1955년에 가 가지고 91년에 나왔어요. 만 36년. 그런디 그 역사 속에서 뭐 누구를 원망스럽거나 내 자신이 그런 것은 없고 그냥 징역 살면서도 재판정에서 할말 다하고 살았거든 내가 정당하게 얘기 다하고 살았으니까 조금도. 만약에 내가 비굴하게 그랬으면 징역 살면서도 상당히 심적 고통이 있었고 그랬을 거여. 그렇지만 내가 재판관한테도 8.15 해방 후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 반드시 독립시키기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집행하기 위해서 했고. 나중에 그거 안되고 유엔에서 단정(單政) 했길래 저기서 공화국 수립하고. 통일하기 위해서 노력한 거니까 정당하죠.
그래서 나 붙들려 가지고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나 그러는 거여. 그런 얘기를 합의부 판사 셋이 앉아서. 당신들이나 나나 삼팔선에서 누가 총을 먼저 쏘는지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전쟁이란 정책의 연장이다. 누가 6.25전에 평화적인 정책을 쓰고 누가 전쟁 도발적인 행위를 했는가 정책을 따져보자 해가지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우리는 지지하고 그 사람들 반대한 것, 49년 6월달에 조국통일 호소문 쭉 얘기했어 53년 제네바회의에서 우리가 제기한 평화 통일안. 그런데 주심판사가 나중엔 그냥 그만 하자고. 나는 재판하고도 판사가 선고할 때 인간적으로는 동정이 가는데 나는 대한민국 법관이라 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갈 때 정리한테 자기 방으로 데리고 오라고 해서 한참 이야기하고 뭐 오래 가겠냐고 좋은 일이 있겠죠 그러고. 그런 것들이 징역사는 과정에서도 당당해지고.
□ 건강은 어떠신지요.
■ 건강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어요. 교도소 안에서 고혈압, 당뇨기 이런 것이 많은데 혈압 높아서 혈압 터지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혈압이 별로 안 높으데요. 오래 한 36년 이렇게 사니까 가끔가다 병이 나고 하긴 그랬지만 그렇게 큰 병은 안 앓았어요. 그러고 그 안에 있으면 다른 게 없어요.
자기 건강 유지하기 위해서 제일로 운동이 부족하니까 새벽같이 일어나서 틈만 나면 운동하고. 하루에 30분까지 시킬 수 있다는 수형규정이 있는데 해석이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30분까지 시킬 수 있다는 것은 30분은 시켜야한다 적어도. 그런데 저들은 5분도 시킬 수 있고 10분도 시킬 수 있다 그거요. 손가락은 옛날 작업장에서 다쳤어요.
사람이 죽는 것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운이라고 할까 같이 이렇게 한발자국 건너 있는데 한쪽에서는 유탄 날아와 가지고 쓰러져 금방 죽고. 사경을 몇 번 넘었는데도 사는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고 그래요.

▶김제 시내에 80세의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는 허영철 선생의 집 앞에
걸린 문패(왼쪽)와 거실 장식장 모습 [사진 - 통일뉴스 황기룡 객원기자]
1월 28일 김제를 떠나기 전에 인사차 들른 허영철 선생 자택에서는 교사로 일하고 있는 허 선생 아들이 부모님 집을 수리하고 있었다. 이날도 허 선생은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고 선물로 들고간 북한산 강계머루주를 잘 드셨다. 장항에서 오래전부터 알던 경찰 끄나풀 때문에 체포되게 된 경위며 최근의 남북민간교류까지 두루 이야기꽃을 피웠고. 허 선생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이해를 보여주었으며 뚜렷한 주견을 이야기했다. 기자의 눈에는 그가 감옥에서 지낸 만 36년이라는 긴 세월도 그의 삶을 단절시킬 수는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역사와 함께 한 그의 삶처럼 그가 추구해온 평화와 통일도 이 땅에서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