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pbpm@chol.com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에 온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한 주가 더 흘렀다. 인터넷을 이용해 고국의 소식을 대충 접하고 있는데, 그 동안 가장 반가웠던 소식은 북녘에서 경의선을 연결하는 공사가 다시 시작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남북한 사이의 철길이나 도로 연결에 관해 1996년부터 큰 관심을 가졌던 터라 적지 않게 흥분이 되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새로운 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흘 전인 1월 29일 부쉬 대통령의 국정 연설 (the State of the Union Address)을 듣고 이에 관해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라지만, 연초에 덕담 한 마디 없이 전쟁 얘기로 시작해서 특히 북한과 이란 그리고 이라크를 들먹거리며 위협적이고 호전적인 내용의 연설을 하는데 분을 참기 어려웠다. 밤늦도록 TV 채널을 돌려가며 해설 방송을 듣다가, 다음날엔 신문에 실린 연설 전문을 꼼꼼히 읽을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그는 크게 두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는 지구상의 모든 테러 조직을 없애 버리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화학무기나 생물무기 또는 핵무기를 지니려는 정권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계획을 밝혔다. 첫째는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망을 개발하고 구축하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국방 예산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반공과 냉전의 시대를 접고 반테러와 확전의 시대를 열다
 
이 연설에서 부쉬는 북한과 이란 그리고 이라크가 `악의 추축 (Axis of Evil)`을 이루고 있다며 미국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공언했다. `악의 추축`이란 제 2차 세계 대전 때 침략 국가들인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3국 동맹을 일컬은 `추축 (Axis)`이란 말과, 1980년대 신냉전 때 레이건 대통령이 경쟁국 소련을 가리킨 `악의 제국 (the Evil Empire)`이란 말을 합쳐놓은 것이니, 북한과 이란 그리고 이라크는 `전범 국가들의 침략성`과 `소련의 흉악성`을 겸비했다는 뜻일까.
 
아무튼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나라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며, 지금까지의 전쟁은 시작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함으로써, 전쟁의 대상과 기간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을 내비쳤다. `반공과 냉전의 시대`를 접고 `반테러와 확전의 시대`를 열어 젖힌 셈이다.
 
한편, 1월 30일자 {뉴욕 타임즈}의 해설대로, 부쉬가 연설할 때 받은 "우레 같은 박수는 그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유를 의회로부터 받은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야당의 반박이나 반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인기 절정의 대통령에게 맞선다는 것은 정치적 도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에 이어 민주당 대표로 나선 게파트 의원도 연설 첫머리에 "이 자랑스런 나라가 21세기의 첫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치르고 어떠한 부담도 질 것"이라며 부쉬에게 힘을 실어준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나 의회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테러를 뿌리 뽑겠다는 명목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일 각오를 다지고 있고, 거의 모든 국민은 애국심을 앞세워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개인이나 시민 단체들이 여러 가지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모양이다. 벌써 몇 몇 분들이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나에게까지 소식을 전하며 동참을 요구하거나 이에 관한 글을 부탁해왔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는 "지금 운동권에서는 올해나 내년에 전쟁 위기가 닥쳐올 것 같아 무척 고민을 하며 이에 대한 대책에 몰두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전쟁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안타까움도 묻어있었고, "소름 끼치는 한반도 위기"를 알리기 위한 강연회나 시국 토론회를 갖자는 제안도 담겨있었다.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내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예방을 위한 몸부림으로 항의 시위를 벌이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리고 "부쉬가 대통령으로 있을 앞으로의 3년 동안 한반도 전체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견뎌야 할지 막막하다"며 "정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날이 오면 1986년 2월 필리핀에서 수녀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탱크가 마닐라의 중심 도로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던 것처럼, 우리도 휴전선이든 삼팔선이든 건너가서 그렇게라도 공격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도 있었다.
 
이런 분들의 평화를 위한 고민이나 다짐에 깊은 경의를 보낸다.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라크, 유고,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한 줌의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를 없애겠다고 전쟁을 치르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죽였다. 전쟁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전쟁이 일시적 보복 수단은 될지라도 결코 궁극적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어떤 이유로도 테러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무슨 명분으로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의 확대보다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이 미국 전략의 핵심
 
그런데 나도 `전쟁 불감증`에 걸려 있는지 모르지만, 미국이 북한과 이란 그리고 이라크에 대해 쉽게 폭격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 아무리 `오만한 세계 유일의 초깡패 국가`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명분도 없이 제 멋대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국방부가 늦어도 1980년대부터 세워온 전쟁 시나리오를 보면 그 핵심 대상 지역이 중동과 한반도였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요, 한반도에서는 반공을 앞세워 소련과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란이나 이라크를 상대로 폭격을 하면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 때문에 고조되고 있는 아랍 민족주의와 반미 감정에 불을 지를 게 뻔한데 함부로 전쟁을 확대할 수 있을까?

북한 역시 아무리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북한의 맞은 편에는 통일의 상대인 남한이 있고 뒤에는 아직은 든든한 후원자인 중국이 있는데, 쉽사리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까?
 
이에 나는 온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부쉬의 위협적이고 호전적인 국정 연설에 치를 떨면서도, 그 내용 자체에 흥분하기보다는 발언의 배경부터 냉정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첫째, 안보와 관련한 부쉬 행정부의 제 1목표는 테러 방지가 아니라 미사일 방어망(MD)을 개발하고 구축하는 일이다.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무력화하여 군사력에 바탕한 유일의 세계 지배 체제를 확실하게 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지난해 9월 11일 일어난 테러의 끔찍성을 과소 평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미국에서는 길거리에서나 학교에서나 동료 미국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10배 이상이나 많다고 한다. 무고한 미국인들이 개죽음 당하는 것을 진정으로 고민한다면, 바깥의 공격보다 안의 치안 유지에 더 큰 노력과 경비를 들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 집단과 이른바 `깡패 국가`들만 들먹이며 전쟁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 안팎에서 일어났던 미사일 방어망에 대한 반대 여론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 아닐까. 지난해까지 안에서는 야당과 국민이 반대했고, 밖에서는 중국과 소련 같은 경쟁 국가들은 물론 유럽 연합 같은 동맹 국가들까지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번 연설에서 부쉬는 북한과 이란 그리고 이라크의 위협을 얘기한 뒤 바로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망을 개발하고 배치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에 덧붙여 1970년대 소련과 맺었던 탄도탄 요격 미사일 (ABM) 협정을 지키지 않겠다고 얼마전 일방적으로 발표했는데도 안팎으로 큰 반발을 거의 받지 않았다.

따라서 부쉬가 온 세계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위협한 데 대해, 우리가 전쟁 방지만을 당면 목표로 투쟁한다면, 미국이 밖에서는 세계 여론에 귀기울이는 체하며 전쟁을 벌이지 않는 대신 안에서는 미사일 방어망 개발과 구축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둘째, 이와 관련한 부쉬 행정부의 다른 주요 목표는 국방비를 늘리는 것이다. 공화당은 오래 전부터 흔히 `군산 복합체`라 불리는 무기 제조 및 판매업자들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받으며 그들과 공생 관계를 맺어 왔는데, 냉전이 끝나고 더구나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안보 기구 및 국방비가 축소되는 바람에 그들의 일부는 파산지경에 이를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냉전 종식 및 민주당 집권으로 내리막길을 걷던 군산 복합체가 반테러 전쟁을 빌미로 활기를 찾게 된 것이다. 군산 복합체의 호황은 부쉬와 공화당 정권의 안정 및 재집권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 국정 연설에서 부쉬는 테러 조직을 소탕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데 한 달에 10억달러 이상 또는 하루에 3천만 달러 이상을 써왔노라는 일종의 비밀 사항까지 털어놓으며 국방 예산을 크게 늘리겠다고 밝힌 게 아니겠는가.
 
미국 의회는 대개 3-4월에 예산 심의를 하는데, 중앙정보국 (CIA)이나 국방부는 이 때 안보 분야의 예산이 깎이는 것을 막기 위해 연초엔 안보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거나 부풀리기 마련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국방부가 해마다 2-3월에 북한의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을 흘린 것도 이 때문이었을텐데, 이번 연설에서 전쟁 의지를 밝힌 것도 야당과 국민의 의혹이나 반발 없이 군사비를 늘리기 위한 술수가 아닐까.

올해 미국의 군사비는 1980년대 레이건이 소련을 상대로 `우주 전쟁`까지 계획하며 국방비를 늘리던 이래 최대의 증가율을 보여, 미국을 뺀 세계 모든 나라의 군사비를 합친 액수와 거의 맞먹는 4000억 달러에 이르게 될 전망이다. 참고로 4000억 달러의 규모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요즘 북한의 1년 국방비가 50억 달러 안팎이요, 남한의 국방비는 150억 달러 안팎이라는 점과 비교해보면 감이 잡힐 것이다.
 
셋째, 테러를 빙자해 긴장감을 조성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킴으로써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을 잠재우거나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특히 요즘은 미국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엔론(Enron)과의 정경 유착 파문이 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11월엔 중간 선거가 치러지는데 부쉬는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 전쟁으로부터 얻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그 때까지 외부의 위협을 빙자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이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곁들이고 싶다. 일반인들이 전쟁에 너무 무관심한 것도 문제지만, 운동권이 전쟁의 위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미국의 술수에 빠지게 되지 않을지 깊이 고민해보자고 말이다. 전쟁 방지에만 힘을 쏟음으로써 용산의 미군 기지 이전 문제를 포함한 주한미군의 본질적 문제가 소홀히 되지 않도록...

그리고 북한에 대한 부쉬의 호전적인 입장을 이용해, 남한에서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목소리를 높이며 정국을 주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끄는게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끝으로 위의 딱딱한 글에 재미 삼아 1월 30일자 {뉴욕 타임즈}에 소개된 기사 한 토막을 소개한다. 죠지 부쉬 대통령이 국정 연설을 한 29일 새벽, 동생인 젭 부쉬 플로리다 주지사의 24살 된 딸이 약국에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약을 사려고 처방전을 위조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내용이다. 작년에는 부쉬 대통령의 쌍둥이 딸들이 미성년자로서 술을 마셨다는 죄로 체포되었었다는 얘기까지 덧붙여진 기사다.
 
쌩뚱맞게 이 기사를 소개하는 이유는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빗대어 자기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고 세계를 지도하겠느냐고 빈정거리기 위함이 아니다. 현직 대통령의 딸들과 조카를 별로 심각한 범죄도 아닌 혐의로 체포할 수 있는 미국의 법적 제도와 관행을 본받자고 추켜세우기 위함도 아니다.

어쩔 때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만큼 매정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융통성이 전혀 없어 꽉 막혀 보이기도 하는 미국인들의 `합리성`과 `준법 정신`이 왜 나라 밖에서는 지켜지지 않는지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미국의 지도자들도 유엔을 존중하고 국제법을 따르게 되길 바라면서.(이 기고는 `남이랑 북이랑` 제35호와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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