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복(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며칠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42명의 남측 인사들이 지난 9일 북측이 김포공항으로 보내준 고려항공기 편으로 막무가내 평양 방문 길에 올랐다.

보도에 의하면 이들 방북 인사는 11개 단체 소속 인사 33명과 개별 인사 9명으로 돼 있다. 우리는 이제 이들 방북인사의 방북 이후를 걱정하게 됐다. 끝내 결행된 이번 이들의 평양 나들이에는 몇가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측면이 있다.

첫째로 지적돼야 할 점은 이번 조선노동당 잔치에 참가하는 남측 `하객` 이 북측이 일방적으로 가려내 지정 내지 지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당초 북측은 남측의 30개 단체(2개 정부기관, 8개 정당, 22개 단체) 와 23명의 개별 인사들 앞으로 평양방문 초청장을 보냈다.

여기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이같은 선택적인 지정과 지명의 근거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결국 북측이 초청했던 단체와 개별인사 중 19개 단체와 18명의 개별인사들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북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둘째로 지적돼야 할 점은, 우연하게도 이번에 방북 길에 오른 남측 인사들이 거의 예외없이 오랜 세월 동안의 반독재와 민주화투쟁 경력을 자랑하는 인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들이 조선노동당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조선노동당` 이라는 이름의 북한 공산당은 과거 냉전시대의 다른 공산권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반민주적인 독재 정당의 전형이다.

조선노동당의 당규만 보더라도 그 반민주성은 명백하다. 조선노동당 당규 제11조가 밝히고 있는 당의 조직원리는 철저하고도 무조건적인 상명하복(上命下服) 관계를 강조하는 이른바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다.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는 동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조직.운영원리라는 사실을 소위 `김일성헌법` (1998년 9월 5일 개정) 이 제5조에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반민주적 독재정당의 당창건 기념행사에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경력을 자랑하는 남측 인사들이 기를 쓰고 하객으로 참가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 남측 하객은 그들이 참가하는 조선노동당 당창건 기념행사에서 만약 `축사` 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떠한 내용의 축사를 할 것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짚어 보아야 할 점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에 즈음했던 6년 전의 조문파동과 이번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에 즈음한 방북파동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이냐는 의문이다.

야당시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조문 파동 문제를 가지고 끈덕지게 당시 김영삼(金泳三) 정권의 그릇된 대처를 시비했었다.

이 문제를 잘못 다룸으로써 남북관계를 후퇴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과연 김대중 정부는 이번 방북 문제를 잘 다루고 있느냐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엉거주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두 가지의 위험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국론의 분열이다. 방북의 결행으로 그 가능성이 이미 가시화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번에 방북한 인사들의 평양에서의 언행에 따라서는 남쪽 사회 안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갈등 증폭의 불씨가 댕겨질 소지가 없지 않다.

그 다음은 이번 일과 관련해 정부가 취한 조치에 대한 북측의 불만이다. 만약 북측이 이번에 정부가 취한 엉거주춤한 태도를 시비거리로 삼을 경우 정부는 이로 인해 6.15 남북 공동선언의 환상이 깨지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추가적 양보로 북한 달래기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바로 이 두가지 위험이 이번의 방북 초청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북측의 진짜 노림수였을 가능성도 있다.

중앙일보 200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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