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복 전 의원이 보는 `變化`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이렇게 되면 한미간의 관련 협정과 조약 및 그 밖의 제도와 장치들은 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정이 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의 근거가 없어지게 되고 또 수정을 하려고 할 경우에는 수정 내용에 관하여 한미간에 예측할 수 없는 협상의 고비가 있게 되며, 이 때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북한도 이 수정 내용에 관여하려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김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앞으로도 계속 남아서 지역안보의 균형자, 조절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안보의 균형자, 조절자로서 주한미군이 주둔한다면 한미연합사는 왜 필요하며 ‘작계 5027’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앞으로 일정한 시점에 가서 북의 김정일이 김 대통령에게 “우리가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해서 전쟁의 위험이 소멸되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는 왜 유지되고 있고 주한유엔군사령부는 왜 해체되지 않고 있으며, ‘작계 5027’은 왜 유지되고 있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왜 계속되고 있는가”라고 따질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작금 우리 사회 내에서는 주한미군을 하나의 ‘신관’으로 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반미감정의 표출이 조직적으로 심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번의 남북정상회담은 아마도 그 시기와 여건의 성숙 여부에 대한 ‘검증’의 기회가 박탈된 가운데 주한미군의 조기철수를 가속화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야말로 김정일의 고단수 노림 수에 김 대통령이 말려든 경우가 아니냐는 우려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국군은 국군대로 방위력 증강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내년부터 그 동안 IMF 사태로 인하여 지연시켜 온 8대 방위력 증강사업에 착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북한으로부터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이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남북의 정상 차원에서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 도대체 상호 군비감축과 통제는 외면한 채 무력증강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경우 우리 정부는 과연 어떻게 이에 대응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남북간에 효과적인 군비감축이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하에서 이번의 평양 남북정상회담으로 북은 남의 전력관리에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의 정상회담에 호응하고 나선 북한의 의도, 김정일의 의중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앞으로 있게 될 남북간 각료급 회담과 언젠가는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후속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거듭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검증’ 과정에는 또 다른 복병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것은 이번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다시 활성화되고 있는 남북대화가 잘못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 정부가 그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저자세로 북측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 다니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벌써부터 북한의 의도에 대하여 불안감을 갖지 아니 할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지난 27일 북측이 통보한 소위 ‘장관급’ 당국간 회담의 북측 대표단 명단이 문제입니다. 북측 대표단은 ‘전금진’을 단장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금진’에 대하여 우리 쪽 언론들은 그가 과연 ‘장관급’에 해당되는 인물인지를 놓고 설왕설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직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금진’은 사실은 ‘전금철(全琴哲)’이라는 가명(?)으로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에 거의 고정적으로 참가해 온 사람으로 그의 정체는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의 ‘대남회담 전문가’중의 한 사람입니다. 즉, ‘통일전선’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각료급 회담 북측 대표단은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주축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대표단에는 군 관계 인물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표출되는 북측의 대화자세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과거의 그 것과 달라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질문>
통일문제, 남북대화 그리고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소위 386 세대에 관한 논란이 끊임 없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잘 아시다시피 소위 386 세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산물입니다. 386이 무엇입니까? 나이는 30대이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지적 형성기를 경과하고 있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이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시대였지요. 이 때는 정치적 민주화가 경제개발의 강공 드라이브에 밀린 하위 개념으로 전락한 가운데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과 공권력간의 마찰 속에서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질 때였습니다. 386 세대는 이 때 공권력에 맞서는 대항 전투세력이었고 여기서 “적(敵)의 적과의 동침(同寢)”이라는 분단국가 특유의 역사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난무한 것이 NL이다 PL이다 하는 의사(疑似) 이데올로기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변모를 경험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1979년의 10.26과 12.12, 5공과 6공의 시대를 거쳐 소위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 시대에 와 있고 경제적으로는 최근에 와서 IMF 사태라고 하는 엄청난 홍역을 치렀습니다. 이 동안에 386 세대도 연령적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사회 전 영역에서 허리 부분을 장악하는 위치에 와 있습니다.

이들 386 세대의 북한 체험 역시 특이했습니다. 우선 이들의 지적 형성기에는 우리 나라의 반공·안보가 최대·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의 정부가 추진한 반공·안보정책의 요체는 우리 국민을 북한, 그리고 공산주의로부터 완전히 격리·차단시키는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국가보안법이지요. 그러나 이 같은 정부의 정책은 당연히 부작용을 초래했습니다. 분단과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386 세대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색맹이 되어 특히 북한,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음성 체질’을 갖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역대 정부·여당은 정치적 격동이 있을 때마다 북한을 핑계로 하여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를 정당화·합리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386 세대에게는 정부·여당의 반공·안보정책은 권위주의체제 유지를 위한 구실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정부·여당의 반공·안보정책을 불신했고 북한은 이 틈새를 교묘하게 노리는 ‘통일전선’ 전략·전술로 386 세대를 공략했습니다. 북한은 그 것이 NL파가 되었건, PL파가 되었건, 캠퍼스내의 젊은 반체제 세력들을 무장시킨 혁명이론의 공급원이었습니다. 이른바 ‘반제 민족해방 인민민주의 혁명’ 이론이 대학가를 휩쓸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또 그들도 결국은 대한민국, 그리고 남북분단의 구도 속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체제의 아들딸들이었습니다. 이제 40대의 중·장년기에 도달한 386 세대는 국회에 진출하고 있고, 여야를 막론하고 각 정당·정파의 두뇌부에 포진하고 있으며 언론매체의 일선생활을 졸업하고 편집국의 데스크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북정책에도 이제 이들의 입김이 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겪어야 했던 경험의 결과로 북한에 관한 한 이들의 생각은 인도 우화의 장님들의 그 것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코끼리의 몸을 직접 만져 보려 하고 있고 또 직접 만져 보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의 관심사는 그러한 촉수(觸手)의 결과로 그들이 코끼리를 코끼리로 느끼느냐 아니면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느끼느냐입니다. 북한이라는 코끼리는 그들이 코끼리를 코끼리로 파악하지 않고 만져보는 부위, 다리면 다리, 귀면 귀, 코면 코, 상아면 상아, 복부면 복부, 꼬리면 꼬리로만 느끼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소위 386 세대의 북한 경험이 어떠한 결론으로 귀착하게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소위 386 세대 현상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세대라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어서 386 세대가 영원한 것이 아니고 386 세대의 뒤에는 또 이어서 올라오는 후계 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386 세대는 386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10년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그만큼 층이 옅다는 것입니다. 386 이후에는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세대가 청년기라고 하는 숙성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포스트 386 세대들은 과거 386 세대에게는 갈등의 원천이었던 경제개발의 열매를 먹고 자란, 그리고 자라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탈정치·탈이데올로기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인터넷, 컴퓨터, 증권시장, 전자상거래, 컴퓨터 게임 그리고 피부를 관능적으로 자극하는 음악과 춤 같은 것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앞의 세대들에게는 절대적이었던 가치들이 상대적 의미만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선거 때 투표도 하지 않습니다. 통일 역시 이들에게는 오직 상대적인 가치일 뿐입니다. 만약 이들에게는 통일이 부담으로 부각된다면 그들은 통일도 짐스러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엄청난 문화적 의식구조 변화를 겪게 되어 있고 따라서 오늘 우리가 걱정하는 386 세대 문제도 조만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때가 오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가 되면, 아마도 우리의 남북관계, 통일문제, 대북정책도 아주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질문>
지금 정부는 이번에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이 ‘햇볕정책’의 결실이라고 얘기하고 있지요.
이 같은 정부의 설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우선 이 문제는 ‘햇볕정책’이 좋은 정책이냐 안좋은 정책이냐를 가려 보는데서 화두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네요. 한 마디로 말해서 ‘햇볕정책’은 좋은 정책이지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 그리고 남북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선결적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것은 북한의 변화입니다. 북한이 완전히 공산주의를 걷어치우고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그러나 단 숨에 그렇게야 되겠어요? 그에 앞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변화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북한이 오늘의 중국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의 그러한 변화를 자극하고, 유도하고, 촉진시키는 정책은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햇볕정책’은 바로 그러한 북한의 변화를 자극하고 유도하는데 목적을 둔 정책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김 대통령도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만, ‘햇볕정책’의 ‘전도사’역을 자임한 임동원(林東源) 현 국가정보원장이 통일부장관 시절에 한 연설 내용을 보면 ‘햇볕정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방과 체제변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고 요컨대 “북한을 변화시켜 보자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북한이 이 같은 내용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엉뚱한 것입니다. 즉, ‘햇볕정책’은 “남조선 당국자들이 전부터 꿈꾸어 오던 흡수통일을 또다시 꿈꾸면서 교류의 간판 밑에 공화국 북반부에 부르조아 자유화 바람을 불어넣으려 하는 것”(김정일)이며 “화해·협력의 미명 아래 우리의 사회주의제도를 이질화시켜 저들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흡수통일시키자는 악랄한 반북 모략책동”(백남순)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북한 지도부의 어록으로 미루어보면 북한이 이번에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을 받아들인 것은 ‘햇볕정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 것은 ‘햇볕정책’의 부메랑 현상입니다. 정부측 설명에 의하면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전개되고 있는 양상은 이를 통해 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남의 변화’만 강요당하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북이 우리측 언론에 대해 노골적인 ‘길들이기’를 시도하고 야당 총재에 대해서도 사실상 ‘길들이기’를 시도하는데도 이를 문제 삼기는커녕 오히려 ‘양비론(兩非論)’의 그늘 아래서 우리만의 순치(馴致), 우리만의 변화만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심각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질문>
이번에 이루어지는 이산가족 상호방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우리의 분단과 6.25 전란의 비극성을 부각시키는 상징성을 지니는 인도적 문제입니다. 더구나, 김 대통령도 누차 강조하신 것처럼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고령자들이 앞을 다투어 타계하고 있다는데서 그 절박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이번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각기 100명 정도의 이산가족이 참여하는 1회성 사업으로 전개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이제 두고 보면 아시겠지만 오히려 문제의 비극성만 더욱 부각시키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선 제도적으로 전 이산가족을 대상으로 하여 주소와 생사 확인, 제한 없는 서신교환, 면회, 상호 방문 그리고 당사자 희망에 따라 원하는 쪽으로 재결합시키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나올 때라야 하나의 해결책으로서의 의미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번에 100명씩의 이산가족을 상호방문시키도록 합의한 것을 가지고 큰 성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사실은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이 기본합의서의 교류협력분야 부속합의서에 담겨진 합의사항들을 이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그 것도 전시효과를 염두에 두고 정치적 계산에 입각하여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해결 시도는 해결방안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질문>
이번 제헌절 기념식에서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이 남북 국회회담의 재개를 제의한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남북회담의 대전제는 그에 앞서 남쪽에서의 의사통일입니다.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 이후 지금 대내적으로 여야간에는 대북정책을 놓고 심각한 입장차이가 노정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남북 국회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북측에 의하여 악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만 있을 뿐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관계 개선·해결에는 기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 차원에서는 남북 국회회담에 앞서 좁게는 여야간, 넓게는 국민적 차원에서 대화의 공간과 광장을 마련하여 대북정책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봅니다.

<질문>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남북대화에 참가했던 경험자의 입장에서 과거에 있었던 남북대화와 이번에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대화간에 차이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답변>
가장 큰 차이는 쌍방 대화의 주역인 쌍방의 최고당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 대화에 나서고 있는 쌍방의 최고당국자인 남의 김 대통령과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각기 상당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같은 자신감들이 어쩌면 양쪽 모두 ‘착각’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 대통령은 상대편을 설득해서 김 대통령의 페이스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김정일은 김정일대로 상대편인 김 대통령이 자기 뜻대로 요리할 수 있는 상대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같은 ‘착각’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6.15 공동선언에서 얼버무려 타협하여 봉합한 애매한 문면과 표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밖에 공동선언의 문면에 표현되지 아니 한 대화 내용이 표면화되는 과정에서 이 서로 다른 ‘착각’이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번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재개되는 남북대화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답변>
과거에도 항상 그랬었지만, 남북대화는 남북 쌍방에 다 같이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담은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고 부담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그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는 쪽에서 대화를 깨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동안의 남북대화의 역사는 이유는 어찌 되었던지 대화를 깨는 쪽은 항상 북쪽이었습니다. 남북대화는 불가피하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북의 개방을 강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개방은 북의 체제 변화를 자극하고 그 결과 북한체제의 안전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북대화에 임함에 있어서 북한이 긋고 있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이 있습니다. 그 것은 김정일체제가 위협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문제는 김정일체제는 위협하지 아니 하면서 북한이 감당할 수 있는 개방이 어디까지일 것이냐 하는데 귀착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 쪽에서 본다면 남북대화를 하는 목적은 김정일체제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북한의 변화를 자극하고, 유도하고, 촉진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변화가 수반되지 아니 한다면, 그리고 남북대화가 북한의 변화를 자극하지는 못하면서 김정일체제라고 하는 시대도착적 체제의 유지·강화에 역으로 이용당하기만 한다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상당한 반발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만큼 남북관계는 쌍방이 함께 움직이는 동태적 관계이지 어느 한 쪽만 동태적으로 움직이고 다른 한 쪽은 정태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용인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번에 이루어지는 남북대화의 지속성과 확장성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 있게 될 후속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있게 될 쌍방의 손익계산과 이에 입각한 자세조정 내용을 관찰하면서 내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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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軍事世界」2000.8月號(通卷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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