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魂─國旗·國歌·國號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다


조갑제(월간조선 편집장)


그런데 이 문제에 별다른 고민 없이 접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추석 다음날 발표한 「金正日 범죄 고발·규탄 선언문」에서 「뉘우침이 없는 全인류의 公敵인 反民族 전쟁범죄자 金正日을 국내법정과 국제사회에 규탄, 고발하고 서울방문을 저지하는 200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습니다. 金 전 대통령은 金正日을, 「통일의 파트너가 아니라 민족통일의 최대 장애물이자 통일과정에서 반드시 단죄되어야 할 민족반역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또 金大中 대통령이 민족반역자와 민족통일의 방향에 대해 합의한 것은 「위험한 사기극」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金泳三 전 대통령의 시각은 상당수 국민들의 생각과 울분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月刊朝鮮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방문자는 주로 30, 40代) 약 68%가 「김정일은 反민족적 범죄행위에 대해 시인, 사과,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이 언론에선 무시되고 있는 民心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의 선명한 노선과 민주산악회를 주축으로 한 대중운동이 이들 보수층의 울분과 결합할 때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의 金正日 비판에 대해서 『속이 다 시원하다』고 긍정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억눌려 있는 듯한 보수층의 언론자유 문제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은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아니라 金泳三 전 대통령이란 인식이 확산되면 한나라당에 대해 보다 과감한 행동을 촉구하는 압력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은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金大中, 金日成, 金正日 등 한반도의 역대 지도자들을 모두 독재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항상 선명성을 강조했던 그의 민주화 투쟁은 朴正熙의 죽음, 全斗煥 정권의 직선제 수용에 主요인을 제공했습니다. 頂上회담 직전 있었던 金日成의 죽음을 포함해서 金泳三 전 대통령은 그가 말한 바 한반도의 독재자들과 항상 대치점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결행한,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들도 金泳三 전 대통령이 퇴임 후 「한반도의 독재자 킬러」를 自任하면서 金大中, 金正日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 일관성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민주투사에서 대통령이 되었다가 다시 反共 재야투사로 돌아간 듯한 金泳三 전 대통령의 최근 行步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란 느낌마저 갖게 합니다. 외환위기를 불러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던 金泳三 전 대통령에게, 金大中-金正日에 의한 남북관계 드라이브는 일정한 역할을 부여한 셈입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의 대중운동이 거리로 나올 때 과거 민주화 투쟁시기에 있었던 장면이 再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운동에 공권력이 서툴게 개입하면 金泳三측은 金大中 정부를 親金正日 정권이라 공격할 것입니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金泳三 전 대통령의 浮上(부상)은 햇볕정책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金大中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그 말대로 金正日의 북한을 동굴에서 유인해 낸 다음 햇볕(경제지원과 자유의 바람)을 쬐어 외투(對南赤化 전략, 군사적 모험주의 등)를 벗기자는 전략입니다. 金正日을 동굴 바깥으로, 즉 남북교류 및 국제사회로 유인해 내는 데는 기계적인 상호주의가 아니라 일시적인 양보와 受侮(수모)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북한이 일단 햇볕을 받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햇볕(돈, 자유 등)에 대한 의존성 때문에 다시는 그 음험한 동굴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金正日의 북한을 동굴에서 끌어내는 데 남한 체제가 지불하고 양보할 수 있는 비용의 한계가 어디인가입니다.

▲국가보안법을 고쳐 한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사실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나(서독에선 금지).
▲주한미군이 南侵 저지용에서 평화유지군으로 그 성격이 중립화될 때 미국이 이를 수용할 수 있나.
▲헌법을 고쳐 북한을 主權국가로 인정함으로써 평화정착이란 미명하의 分斷고착과 그 국제화를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국체변경에 해당하고 헌법위반이 되는 낮은 단계의 남북통일 선언을 감행할 것인가. 한국 사회가 이를 용인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안보와 정통성, 즉 국가의 본질을 훼손하는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또는 對北굴욕정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는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연인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스트리킹을 한다면 관심을 받겠지만 自我가 부정됩니다. 金正日을 동굴에서 끌어낸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정체성·가치관·자주성·자존심·국기·국가·국호·헌법까지 양보한다면 비용 초과 사태로 해서 햇볕정책은 부도가 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남북 통일은 무장해제된 대한민국이 먹히는 통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金正日에 대한 전술적 양보는 있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 양보 같은 전략적·철학적 타협은 국가 自害 행위가 됩니다.

金正日을 동굴에서 끌어내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게 먹히면, 그 비용이 대한민국의 체력에 부담이 될 정도라면 모처럼 끌어낸 야수에게 조련사가 잡혀먹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햇볕정책이란 말 속에는 기본적으로 속임수, 유인책이란 이쪽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과연 金正日이 속아줄 것인가.
▲남북자주 노선을 노골화할 경우, 南北合作으로 비쳐져 미국·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金大中 대통령의 이념·노선에 대한 한국 보수층의 불만과 의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언론의 지지는 계속될 것인가.
▲5년 단임제 대통령제의 공식이 되어버린 후반기의 경제악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2002년 大選에서 자신의 정책을 계승할 후보자를 당선시킬 수 있나. 金正日에게 너무 많이 해준 약속과 지원이 차기 정부와 국민들의 부담이 되지 않을까.
▲동굴에서 金正日을 끌어내는 명분으로 내세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가 한국의 안보구조 해체로 歸結(귀결)될 가능성, 일종의 국가적 自殺행위의 위험성은 없는가.
▲세계사적으로 檢證된 바 없는 논리, 즉 主敵의 체제유지력(군사력 등)을, 一方的 경제지원으로써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 적중할 것인가. 적중하지 않을 때 일어날 대혼란을 과연 레임덕에 걸린 대통령이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2002년 大選 구도가 「金正日이 지지하는 후보 대 金正日을 반대하는 후보」로 정립될 때 선거는 평화적으로 치러질 수 있나.
▲1류 국가인 미국·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3류 國家群인 중국·러시아·북한과 친해질 때 한국의 미래가 後進할 위험성은 없는가.

이런 일대 모순과 고민을 가져다준 것은 남북공동선언의 제2항입니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진행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金正日과 대화, 교류, 협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가 反민족 전쟁범죄자라고 해도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책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경찰이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인질범과 대화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金正日과 통일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통일이란 같은 이념과 체제下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金正日과 KAL 858편 유족들이 평화공존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金正日과 수십만 정치수 수용자들이 오손도손 같이 살 수 있습니까.

통일 논의의 상대가 아닌 金正日과 통일의 방향에 대해 합의했다는 사실은 大모순입니다.
더구나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통일의 방향에 대해서 남한 국민들이 전혀 모르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案」과 북한 주민들이 모르는 「연합제案」을 연결시켰습니다. 남대문 시장의 아줌마들까지도 통일방안을 훤히 알도록 한 뒤 통일논의를 해야 하는데, 암호 풀기 같은 통일협상은 사실상 밀실거래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저널리즘의 본분을 무시하면서까지 정부 편을 들고 있는 언론이 있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는 그런 언론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主見(주견)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세력이 튼튼하고 거대합니다. 이들은 일상적인 국정과 언론을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맡겨놓다가도 선거판에선 그 많은 머릿수를 무기로 삼아 나라의 큰 방향을 굵게 결정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남북한의 역학관계는 기본적으로 수령중심 체제의 腦髓(뇌수)인 金正日과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만들어 내는 시민사회, 즉 유권자들 사이의 대결입니다. 우리 유권자들의 약 80%는 확고한 反김정일 노선의 지지자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근의 金正日 신드롬은 金正日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파격적인 행동을 자주 하는 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건국-호국-근대화-민주화의 全과정에서 영욕이 엇갈리는 역정을 그려가면서 그래도 조국을 이 정도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한국의 주류 시민사회(보수 중산층)는 결코 金正日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50여 년간 한국민들이 만들어낸 것은 두 개의 市場이었습니다. 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정치시장으로서의 선거, 그리고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제시장이 그것입니다. 金大中의 對北정책이 아무리 언론의 지지를 받아도 종국에 가서 이 두 시장의 追認(추인)을 받지 못한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북한에 거금을 투자한 회사의 가치가 시장에서 곤두박질 칠 때 아무리 정권이 등을 떠밀어도 그런 무모한 투자를 계속할 수 있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金正日은 누구보다도 한국민에게 저지른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金大中 대통령을 속일 수 있을지는(또는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 사회의 거대한 주류세력과 시장의 메커니즘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旗를 앞세워 함께 입장하는 바람에 태극기가 사라졌습니다. 북한의 人共旗도 빠졌으니 잘 된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잇는 한반도의 유일 合法 정부의 국기와 민족사의 이단 세력인 북한의 인공기를 상쇄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을 국가에서 단체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남북한 입장 선수단의 숫자를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한국은 전체 인원의 4분의 1만 입장하게 만들고, 북한은 모자라는 인원을 채우기 위해 지원요원까지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下向평준화가 통일과정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한국은 북한과 같은 수준의 3류국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국기·국가·국호 같은 것은 주권, 자주성, 자존심, 즉 국가의 혼을 상징합니다. 민족통일이란 美名下에서 태극기, 애국가, 대한민국을 행사장·공문서에서 밀어내려는 북한의 책동에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말려들고, 언론은 맞장구를 칩니다.

주체의 나라를 자칭하면서 우리를 식민지로 보고 있는 金正日은 대한민국의 魂을 빼버리면 우리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은 無主物(주인 없는 물건)로 변한다고 오판하고 있을 것입니다. 刑法엔 無主物을 가져가는 행위도 「점유 이탈물 횡령죄」로 처벌대상이 됩니다만, 한반도에서 일단 통일정부를 쟁취하는 정권은 一民族 一國家로서 국제적 승인을 받게 돼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억지·거짓말·선동·사기·테러까지도 눈감아 주고 받아주는 것이 포용이고 평화며 민족주의라고 자기를 속이려는 위선자들은 간교한 북한 정권의 밥입니다. 간교함은 위선을 삼켜버리지만 正直 앞에선 무력해집니다.

남북의 올림픽 선수단은 각기 태극기와 인공기를 들고 함께 입장했어야 옳았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분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정직성이요, 내일의 통일을 기약하는 성실한 자세였을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삽시다. 감사합니다.

월간조선 2000.10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