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복 전 의원이 보는 `變化`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이동복 전의원,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 걸쳐 남북대화의 실무주역 중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70년대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대변인으로, 90년대에는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와 대변인으로 한 때 그의 이름은 남북대화의 대명사였다. 그는 15대 국회에서는 외무통일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6.15 남북공동선언이후 정부가 앞장서서 주도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안에서 급격하게,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무절제하게 진행되고 있는 대북인식, 북한관의 변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남북의 7천만 민족의 사활이 걸려 있는 대북정책의 운영은 정권 차원에서의 정치운용의 테두리를 떠나 초당적, 범국민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특히 `보수`의 입장에서 지난번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방문 이후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찬반 여론이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분식·희석되고 있는 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이동복 전의원과의 대담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해 본다.

<질문>
지난 6월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이 과정에서 남북간에 6.15 공동선언이 합의되어 발표된 뒤 남쪽에서는 대북정책에 관하여 많은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특히 김정일의 이미지가 하루밤 사이에 극에서 극으로 달라진 가운데 ‘보·혁 갈등’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최근 우리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사회에서 부각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구조는 특히 ‘보수’의 본질에 대한 왜곡된 개념 정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지금 특히 대북정책 추진과 관련하여 ‘보수’를 ‘수구’나 ‘반동’과 동의어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수’는 ‘수구’나 ‘반동’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보수’는 우리가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이룩해 놓은 것을 지키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개량할 것은 개량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자는 입장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맹목적으로 오늘에 집착, 일체의 개혁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수구’나 ‘반동’과는 혼동될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사회에서의 ‘보수’의 본질은 ‘개인’과 ‘전통’사이에 이루어지는 ‘타협’에 있어 왔습니다. 이 같은 ‘타협’은 반세기전 대한민국 건국이래 부단하게 진행되어 왔고 오늘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인’과 ‘전통’ 사이에서 그러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촉매’가 바로 ‘자유’였습니다. ‘사람’과 ‘전통’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관관계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질적 사상과 현상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 같은 상관관계를 ‘개인’과 ‘전통’간의 관계로 보지 않고 ‘집단’과 ‘전통’간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움직임입니다. 예컨대,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던가 과거 나치독일 시절의 ‘국가사회주의’ 같은 것들이지요. ‘집단’적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촉매’가 등장했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집단’을 ‘최면’시키기 위한 ‘주문(呪文)’인 것입니다.

‘전통’과의 상관관계를 ‘집단’과의 관계로 설정하는 데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요소가 ‘촉매’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종교’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현세’를 관리하는 ‘정치’와 ‘내세’를 지배하는 ‘종교’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빚어져 왔습니다. ‘종교’가 정치적으로 밀고 나와 ‘현세’의 영역을 침범할 때는 정교(政敎)간에 분규가 빚어져 엄청난 비극의 연출을 강요했고 그와는 반대로 ‘종교’와 ‘정치’가 ‘내세’와 ‘현세’라는 각자 영토를 지켜서 서로 침범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상호 보완성을 살려서 정교간 평화가 유지될 뿐 아니라 건전한 사회적 안정의 토양을 제공해 왔습니다. ‘보수’는 ‘개인’과 ‘전통’간의 상관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이데올로기’화 하여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수’는 ‘개인’과 ‘전통’ 사이에 자연스럽게 ‘타협’이 이루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이데올로기’화 하여 설명하려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써 ‘보수’의 의미를 일탈하는 것입니다.

‘혁신’이나 ‘진보’는 ‘전통’과의 관계를 ‘집단’과의 관계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 용어들입니다. 따라서 ‘혁신주의’나 ‘진보주의’는 이미 개념적으로 ‘개인’을 무시하는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미를 함축한 표현들이기도 합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문제도 바로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세계무대에 등장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주의’는 이미 하나의 실패한 ‘이데올로기’로써 역사적으로 엄청난 찬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벌써 잊혀진 이름이 되어 있는 만큼 이 것을 가지고 우리 사회 안에서 ‘보수’ ‘진보’ 타령을 벌인다면 이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북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주체사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이 것은 ‘종교’ 가운데서도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비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주체사상’이 왜 사이비인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주체사상’에는 동전처럼 양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전과는 달리 ‘주체사상’의 양면은 상호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한 면에는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주체사상’의 ‘주인’은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명제가 많은 사람들을 ‘주체사상’으로 끌어 드리는 끈끈이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주체사상’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상극적인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해서 각자가 자기 운명을 직접 결정하려고 하면 세상은 ‘오가잡탕(五家雜湯)’의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각자의 운명을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것이 ‘주체사상’의 진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즉 ‘수령론’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개인’은 ‘집단’에 의하여 치환되어 버립니다. ‘개인’은 ‘오가잡탕’이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그 대신 ‘인민대중’이라는 이름의 ‘집단’이 운명 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집단’의 의사 결정은 ‘수령’과 ‘당’이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것은 종교 가운데 사교(邪敎)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한 편의 ‘사기극(詐欺劇)’임이 분명합니다. 이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북한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이 이미 ‘진보’나 ‘혁신’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기극’인 북한을 상대로 이른바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사회가 내부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 이 나라의 경제개발을 주도했던 권위주의체제 시대의 한 부산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권위주의체제 시대에 이 나라에는 제도권 밖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던 반체제세력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이들 반체제세력의 ‘적’은 제도권 안의 권위주의체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또한 마키아벨리의 권력이론의 신봉자들이었습니다. 즉, “적의 적은 친구”이고 “적의 친구는 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적’인 권위주의체제의 ‘적’인 북한은 오히려 ‘친구’이고 ‘적’인 권위주의체제의 ‘친구’인 미국은 오히려 ‘적’이 되는 전도된 관념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은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1987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6.29 선언에 따라 대통령직선제가 부활된 뒤 과거에는 제도권 밖에 위치했던 소위 ‘반체제’ 세력의 일부가 1989년의 소위 ‘3당 통합’ 때 김영삼(金泳三)씨를 따라 ‘민주자유당’에 참여함으로써 제도권 안으로 진입했을 뿐 아니라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정부·여당의 핵심부에 포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29 선언 이후 제도권 안으로 자리를 옮겼으면서도 김영삼씨와 함께 ‘3당 통합’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했던 일부 구‘반체제’ 세력은 1997넌 제15대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金大中) ‘야권 단일후보’의 기치 아래 모여 “50년만의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1998년에 출범한 지금의 ‘국민의 정부’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들은 금년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 대거 정치권 안으로 진입한 소위 ‘386 세대’와 함께, ‘보수’를 매도하고 ‘진보’를 표방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북관, 대북인식의 전환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경우 이들 구‘반체제’ 세력의 인사들이 북한의 동조세력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의 하나는 지난 날 이 나라에 군림했던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깊은 나머지 상대적으로 이 나라 권위주의체제의 ‘적’인 북에 대해서는 보다 ‘관대’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경험을 통해 정립된 종래의 북한관, 대북인식이 우리 쪽 권위주의체제에 의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스스로의 북한관과 대북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코끼리와 장님들에 관한 인도의 우화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라는 코끼리의 실체에 관한 기존의 인식은 이를 수용할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들의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독자적인 북한관과 대북인식을 새로이 형성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인도 우화에 나오는 장님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는 탓에 각자가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던 코끼리의 부위를 코끼리의 실체로 인식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북한이라는 코끼리는 영리한 코끼리입니다. 코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코를, 귀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귀를, 다리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게는 다리를, 상아를 향하여 오는 장님에는 상아를 만지게 해 주고 그 결과로 북한이라는 코끼리의 실체를 놓고 이들 장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즐길 뿐 아니라 남쪽 사회를 분열·이간시키는 데 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 같은 북한의 장난,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일부 세력이 이 같은 북한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지금 이 사회에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지금도 여전히 이 나라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보수’ 성향의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들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결시킬 수 있는 지도세력이 없습니다. 그 동안 반세기에 걸쳐 빈곤과 분단, 그리고 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안보위협이라는 3중고(三重苦)의 악조건 속에서 ‘보수’ 성향의 국민대중을 이끌고 이 나라의 개발시대를 주도했던 기성세대가 그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를 둔 결과로 집단적으로 ‘도덕적 해이’의 깊은 늪 속에 함몰되어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설득력 있는 체제옹호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업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그 분의 정치운용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개발주도형 경제일변도의 정치운용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멍이 들었습니다. 획일주의와 권위주의의 그늘에서 향락주의와 편의주의가 기승을 떨고 국민들의 주인의식이 마비된 가운데 “내가 하면 연애, 남이 하면 스캔들” “남의 거짓말은 불가, 나의 거짓말은 무관”이라는 풍조가 보편화되었습니다. 결국 기성세대는 더 이상 신진세대에게 ‘모범’이 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1997년12월17일의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여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도 이 같은 상황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의미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사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처음부터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김 후보는 이번에 3전4기(三顚四起)에 성공했습니다. 세 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입니다. 김 대통령이 과거 세 번의 실패를 반복했던 것은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삼중(三重)의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의 장벽은 ‘지역’의 장벽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사상’의 장벽이었습니다. 세 번째의 장벽은 ‘신뢰성’의 장벽이었습니다. 대통령선거의 득표내용을 분석해 보면, 이번에도 김 대통령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구단주(球團主)인 김종필(金鍾泌)씨의 지원이 없었으면 당선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김종필씨는 스스로의 대권 도전을 사양하고 김대중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추대함으로써 김 후보의 세 가지 치명적 약점 가운데 두 가지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즉, 김종필씨의 선택에 따라 그를 추종하던 충청권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전통적인 반김대중 성향에도 불구하고 김 후보에게 표를 던져 ‘지역의 장벽’을 허물 수 있게 해 주었고, 역시 전통적으로 반김대중 성향인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도 김종필씨의 ‘견제’에 기대를 걸면서 김 후보에게 표를 던짐으로써 ‘사상의 장벽’을 허물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김종필씨의 행보는 이 나라 ‘보수’ 세력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이어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과도정권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5공’ 및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을 거친 시점에서 자민련을 이끄는 김종필씨는 이 나라 ‘보수’ 세력에 남겨진 마지막 ‘보루’이자 ‘등댓불’이었습니다. 그의 대권 도전 사양은 사실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영남’과 ‘호남’의 패권 싸움 구도에서 ‘충청권’의 힘만으로 ‘홀로 서기’는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의 주도하에 2000년에 끝나는 제15대 국회 임기중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는 ‘약속’을 대가로 하여 대권 도전의 날개를 접었던 것입니다.
‘충청권’에서는 이 내각제 개헌 약속을 믿고 김대중 후보에게 많은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보수’ 세력은 그들대로 김종필씨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공동정부’에 참가할 경우 정부안에서 특히 대북·안보정책 분야에서는 김 대통령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김종필씨는 비단 제15대 국회 임기중 ‘내각책임제 개헌’ 공약의 이행을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했을 뿐 아니라 정부안에서 김 대통령의 대북·안보정책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는 이 같은 김종필씨의 납득하기 어려운 정치행보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김종필씨는 아마도 재기불능의 정치적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보수’ 세력의 구심점이 아닙니다.

<질문>
혹시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나들이도 조금 전에 말씀하신 코끼리와 장님들에 관한 인도 우화와 같은 경우는 아니었을까요?

<답변>
글쎄, 그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답변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번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인하여 발생한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것은 남쪽 국민들 사이에서의 북한의 독재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미지가 하룻밤 사이에 ‘악마’의 그 것에서 ‘천사’의 그 것으로 둔갑한 것이 아닐까요?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과거 동서 냉전시대의 남북관계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사는 동안 비단 우리의 북한관, 대북인식이 냉전적 사고에 의하여 변질·왜곡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보다도 북한의 통치자들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미지가 사실과는 다르게 많이 왜곡·조작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북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들에게 북한사람들의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빨간 얼굴에 뿔을 단 모습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겠습니까? 이 같은 왜곡된 이미지 때문에 남북관계의 원만한 개선·해결이 불가능해진 점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한 뜻에서 왜곡된 북한관, 대북인식, 특히 북한의 지도자들의 왜곡된 이미지가 바로 잡혀지는 것은 건전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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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軍事世界」2000.8月號(通卷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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