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한나라당 총재)


1. 인사말씀

존경하는 신명순원장님, 교수님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와 우리의 대북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지난 6월 분단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지도 벌써 거의 세달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남북관계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도 많았지만 우려와 혼선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회담의 감격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마음으로 최근 남북관계를 평가하고 앞으로 전망과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2.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평가: 긍정적 측면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세 달 동안 남북관계는 참으로 숨가쁘게 진행되었습니다.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두 차례의 장관급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도 있었습니다.

8.15 광복절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50년 전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반세기만에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를 눈물로 상봉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TV를 통해 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인간드라마를 지켜보면서 큰 슬픔과 함께 마음 속 깊이 분노를 느꼈습니다.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북한의 교향악단이 서울을 방문하여 우리 음악가들과 함께 협연을 했습니다. 남북분단으로 끊어졌던 경의선을 복원하기로 했고 임진강 공동 수방사업과 백두산·한라산의 교차관광도 합의했습니다. 투자보장·이중과세방지 협정 등 남북경협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실무협의도 곧 개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북한의 경제시찰단이 곧 서울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한이 이렇게 화해와 협력관계로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우리 민족의 명운이 걸린 남북문제 만큼은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결코 정략적 접근을 해서도 안됩니다. 이 문제만큼은 사심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어렵게 마련된 대화와 협력의 계기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자리잡도록 야당총재로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만약 남북관계의 기본원칙과 진행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저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건설적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수개월 우리 정부의 대북접촉을 지켜보면서 정부가 자신 있게 남북회담에 임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말을 아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안위와 나라의 장래가 걸린 남북문제인 만큼 분명한 문제점은 지적하고 정부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일각에서 말하듯이 남북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남북관계 발전에 발목을 잡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남북관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기 위한 야당총재로서 苦言이며, 나라와 국민에 대한 야당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3. 최근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의 문제점

이런 점에서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에는 많은 긍정적 발전이 있었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선 남북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문제는 아직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의 남북대립의 핵심은 군사적 대립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남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170만이 넘는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첨예한 군사적 대결구도를 해소하지 않고 남북간 화해와 평화를 말하는 것은 口頭禪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근 2차 장관급 회담에서 군사당국자 회담에 대해 약간의 진전은 있었지만, 북한의 소극적 태도로 볼 때 앞으로 과연 실질적 진전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남북관계가 지나치게 일회성 전시용 이벤트 위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느 정도의 이벤트도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실질입니다. 또 남북관계에서 감정적 요인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좀 더 차분하고 냉정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현실보다 기대가 너무 앞서 나가면 자칫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의 접근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산가족의 수가 수백만명에 이르고 7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만 해도 수십만명에 달하는 현실에서 1백명의 상봉행사는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이 아닙니다. 모든 이산가족을 상대로 생사확인, 서신교환, 그리고 면회소 설치 등의 제도적 접근을 해나가야 합니다.

경의선 복원도 상징적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아직 남북한간 인적·물적 자유왕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는 가운데 철도를 연결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철도의 복원이 남북간의 실질적 자유왕래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이 뒷받침하지 않는 상징은 남북관계의 현실에 대해 혼선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하면서 국군포로나 납북자들에 대해서 정부가 북한에 제대로 언급조차 않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비전향 장기수란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 남파된 간첩이 대부분으로 인명살상, 정보탐지, 사회교란 등 우리의 근본적인 법질서를 파괴한 자들입니다.

이들도 돌려보내는 마당에 전쟁터에서 자기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포로된 사람과 납북된 선량한 시민을 외면하는 정부가 과연 정부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이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으면 쉬운 문제든 어려운 문제든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심지어 통일부장관은 국군포로가 없다고 발언하여 큰 물의를 빗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만약 제가 김정일위원장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에게 반드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김위원장도 이 문제만큼은 통크게 결단을 내려 이들과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수개월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지가 어딘지 분명치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남북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이끌고 나가겠다는 청사진을 소상히 국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 상당수 국민들이 도대체 정부가 남북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 또 이 나라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런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혼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사회 내부의 갈등과 혼선은 더욱 깊어지고 이는 정부의 정책추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대북정책 추진과정도 보다 투명해져야 합니다. 대북정책의 주요결정이 과연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투명하지 않게 결정된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대북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국민의 합의를 모으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남북회담이 북한의 의도에 지나치게 끌려다닌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회담전략이나 협상의 우선순위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회담의 의제도 우리측의 희망사항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 북한의 페이스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회담 일정도 북측 요구대로 결정과 변경을 반복합니다. 외교관례와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일방적 양보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가능한 한 참고 인내하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는 좀더 의연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할말은 하고 지킬 것은 지켜 남북관계를 보다 호혜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남북관계는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지속되고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정부는 야당과 남북관계를 긴밀히 상의하겠다고 여러 차례 표명했지만 지금까지 한두번 통일부장관의 의례적 설명을 들은 것 외에는 진지한 협조요청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최근 본인의 방북문제로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정부는 저와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오히려 언론에 전혀 사실무근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정략적, 기만적 태도로는 남북문제에 대한 긴밀한 초당적 협력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보다 성의 있고 정직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우리 언론의 대북보도 자세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 언론의 대북보도와 관련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우리 언론의 대북논조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일부언론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6월 평양 정상회담시 북측이 우리측 일부 언론사 기자의 입북을 마지막까지 거부했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와 함께 북측은 우리 언론사 사장단을 초청하여 "통일과 민족단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합의문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남북한의 언론이 비난과 비방을 자제하고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실의 정확한 보도는 언론의 기본적 책무이며, 합리적 비판과 비방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남북문제는 우리 국민의 안위와 한반도의 장래가 걸린 문제인 만큼, 언론은 당연히 다양한 견해와 건전한 비판을 제시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먼저 언론인 스스로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4. 대북정책의 목표와 과제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분단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어렵게 마련한 관계개선의 계기를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정착으로 이어가는 일입니다. 우리 국민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 편히 살면서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상호 공존·협력하는 한반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명확한 목표의식입니다. 변화의 시대일수록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의도하지 않았던 곳으로 내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북정책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입니다. 이를 위해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과제가 급선무입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 문제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한반도 전체에 걸쳐 남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일입니다.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도 충족되어야 하지만 더 나아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욕구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경제난 재건과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의 실현이야말로 우리의 대북정책의 당면과제입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보장되고 남북한 주민이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될 때 통일은 긴 밤 끝의 새벽처럼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1) 평화문제: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이 한반도 평화의 핵심

현 시점에서 남북한간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역시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입니다. 세계에서도 가장 첨예한 군사적 대치구도를 그대로 두고 진정한 평화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와 교류·협력은 병행해서 추진되어야 하며, 교류·협력이 긴장완화의 효과를 수반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군사적 조치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야말로 쉬운 일, 가능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하며 이를 통해 신뢰가 구축됨에 따라 점차 어려운 과제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직 남북간에 아무런 군사적 신뢰도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비축소 등 소위 구조적 군비통제 조치들을 바로 다루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상호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기존경계와 관할구역을 존중할 것을 분명히 천명해야 합니다. 특히 지난 1990년대 초반 이후 북한이 정전협정체제를 조직적으로 훼손해왔고 작년에는 급기야 서해 경계선 문제로 해상충돌까지 일어났던 사례를 감안하면 남북간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는 기존경계의 존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존합의도 준수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와 함께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 개설, 부대이동과 군사훈련의 통보, 군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등의 소위 `운용적 군비통제`(operational arms control)가 실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치들이 실천되어 신뢰가 구축됨에 따라 남북간 적대적 대결구조의 해소를 위한 단계적 군축도 검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핵·미사일·생화학무기 등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문제도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우방국과 긴밀한 공조체제는 여전히 유용합니다.

이와 함께 공격용 무기의 배치제한 구역을 두거나 전진배치 병력의 감축 내지 후방이동을 통해 쌍방의 기습공격 능력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도 강구되어야 합니다.

휴전선에 170만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고 서울이 북한의 대규모 방사포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 현실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가운데 평화를 말하기는 이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조치들이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남북한간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안보문제: 확고한 억제력은 남북관계 개선의 밑받침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안보는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확고한 억제력은 우리의 남북관계 개선노력의 디딤돌이지 결코 걸림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힘이 뒷받침될 때 우리는 자신 있고 유연한 외교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우리정부가 북한의 근거 없는 반발을 이유로 방어용의 정례적인 군사훈련인 을지-포커스 훈련을 대폭 축소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안보문제에서조차 남의 눈치나 보는 태도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에 대해 할 말은 하고 지킬 것은 지키는 태도가 절실합니다.

안보문제와 관련하여 한가지 지적할 사항은 바로 한미동맹의 문제입니다. 김대중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도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유지에 주한미군이 긴요하다는 데 우리와 입장을 같이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주한미군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특히 최근 우리사회 일각에서 반미기류가 확산되고 있고 마치 한미동맹이 한반도 문제의 자주적 해결에 걸림돌이 되는 냉전의 유산인 듯한 시각이 대두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미관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북간 군사적 대결구조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대북 억지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한미군 문제부터 불쑥 부각되는 것은 섣부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한미동맹은 앞으로 정상회담 합의가 충실히 이행돼 남북간 긴장이 해소되고 실질적인 평화가 구축되면 그 때 가서 환경변화에 적합하도록 조정해도 조금도 늦지 않으며, 당연히 그런 방식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한미동맹은 비단 한반도의 전쟁 억지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동북아 안정유지에도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만큼, 단순히 남북관계의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북아 전략의 일환으로 접근되어야 할 문제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3) 교류·협력 문제: 분명한 목표의식, 장기전략, 유연한 상호주의

남북한에 걸친 한민족의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서는 북한의 경제재건과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가 필수적입니다. 남북경협이나 각 분야의 교류·협력은 제대로 추진만 된다면 북한의 경제난을 덜고 북한주민의 삶의 질의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류와 협력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며, 장기적인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경제재건은 북한의 개방·개혁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북한주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를 원한다면 남북경협은 북한의 개방·개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무조건 지원만 하고 경제적 도움을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단순한 생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의 지원이 북한의 폐쇄억압체제를 오히려 연장하고 강화해 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대규모 경협이나 지원이 군사용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도 신중한 정부라면 당연히 요구해야 할 사항입니다.

신뢰란 개별 인간에게는 미덕이지만 국가간 관계에서 신뢰에만 의존하는 것은 때로는 무책임이나 경솔함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또 신뢰란 상대방의 우호적 제스처(goodwill)를 일방적으로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쌓이는 것입니다.

남북경협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시혜관계가 아니라 호혜적 상호이익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최근 우리사회 일각에는 상호주의 원칙을 마치 불신에 근거한 냉전적 논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호주의는 결코 냉전적 원칙이 아닙니다. 의식하든 안하든 인간의 보편적인 형평감각이나 정의감각에 부합하는 가장 상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물론 상호주의는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그 원칙과 정신은 남북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각 분야의 교류협력의 핵심은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의 실현입니다. 정부는 이를 목표로 북한과 협상해야 합니다. 우리 내부적으로도 우리 국민이 보다 자유롭게 북한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주민들도 최대한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북측에 요구해야 합니다.

과거 서독도 동독에게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동서독 주민의 자유왕래를 비롯하여 분단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요구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 양측이 자유왕래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상호불신의 제거와 신뢰구축의 첫걸음입니다.

5. 한반도 통일: 평화정착과 자유왕래의 실현이 통일의 지름길

새천년은 아시아시대라고 말합니다. 21세기에 세계발전의 축은 아시아로 옮겨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통일된 한국의 무한한 잠재력은 아시아시대의 주축이 될 것입니다.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 사회에 통일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6.15 공동선언이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천명하고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 연방제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갑자기 통일문제가 남북간의 핵심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 누구나 마음 깊이 품고 있는 바램이지만 소망이나 기대만으로 이루어지는 문제는 아닙니다. 통일하겠다고 억지로 상이한 체제와 제도를 연방이나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짜깁기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통일은 남북한이 평화공존의 틀 속에서 협력하는 가운데서 싹이 틀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와 협력이 정착되고 남북한을 단절하는 장벽이 제거되어 주민의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될 때 통일의 기회는 우리 앞에 소리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의 학생들이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명사십리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그날이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비행기로, 자동차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날이 먼 장래만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자유왕래가 실현될 때 우리는 통일이 방문 앞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한간 자유왕래의 실현이야말로 바로 통일의 지름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의 그날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내부의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깨끗한 정치를 뿌리내리고 경제를 튼튼히 해야 하며, 국민대통합으로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통일에 대비한 외교적 노력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물론 한국인이 이룩해야 할 과제이지만, 우리 주변국의 협조와 지지 없이는 어려운 것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국제사회와 우리 주변국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을 지키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외교를 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통일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실현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통일을 준비하는 바른 길입니다.

6. 맺음말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난 3개월 남북관계에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받아들이고 또 자신들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북한이 보여준 태도는 우리에게 분명히 희망을 주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 북한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대북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희망과 낙관도 필요하지만 희망섞인 기대에만 근거한 정책은 위험합니다. 확고한 안보태세와 강력한 억제력의 유지가 계속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북관계에 분명한 목표의식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맹국과 긴밀한 협조와 협의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입니다. 들뜬 분위기와 앞서가는 기대는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일을 다 이루려 하거나 단기적 성과를 과시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확고한 안보를 바탕으로 분명한 목표의식과 장기전략을 가지고 남북관계 개선을 꾸준히 추진할 때 한반도에도 분명히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야당도 당장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야당총재로서 정말 사심 없이 나라와 국민, 그리고 우리의 후손의 장래만을 생각하면서 한반도 전체에 걸쳐 평화가 보장되고 자유와 인권이 꽃피며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그러한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0.9.5 연세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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