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측의 군 통수권자가 서로 포옹하고, 양측 국방장관이 공식 대좌를 하는 상황에서 종래 우리 군이 지녀온「주적 개념」에 혼란이 생기는 것은 일시적으로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결코 그냥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국군의 날 연설을 통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철통같은 안보태세」가 긴요함을 역설했지만 왠지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글자 그대로 철통같은 안보태세의 확립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훈련과 예산지원, 군의 현대화 및 정신전력 강화 등 여러 조치가 흔들림 없이 이뤄져야 하는데도 지금 이 정부는 그보다는 「북한돕기」에 더 열중해 있다. 많은 국민들은 얼마 전 한·미간 연례적 방어훈련인 을지 포커스렌즈 연습이 갑자기 그 규모를 축소하고 외부에도 쉬쉬하는 식으로 전락돼버리는 사태를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됐었다. 군이 어리둥절해 있는 그만큼 국민에게 군은 지금 뭐가 뭔지 아리송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온 군에 있어 주적개념의 갑작스런 혼란 등은 곧 자기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사태이다. 당장 앞으로 일선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을 어떻게 시켜 나간다는 것인가? 군의 통수권자로 이 나라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는 마땅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다각적 검토와 심려가 있어야 하는데도 그런 쪽에 대한 강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 장병들을 향한 김 대통령의 연설은 6·15남북선언 이래 남북관계에서 이룬 일련의「성과」를 강조하고 미래를 낙관하는「홍보」에만 역점을 뒀다는 느낌을 주고 있을 뿐이다.
남북 평양 정상회담 뒤 김 대통령은「이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었다. 지난번 유엔 연설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이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는 커녕 「북한의 변화」와 「김정일 위원장의 선의」를 담보해주는 증표 또한 없는 현실이다. 나라의 안보와 국군의 앞날에 대한 이러한 불안과 의구심에 대해 김 대통령은 보다 확고하고 신뢰받을 만한 리더십을 보여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일보 20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