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속도시의 즐거움 
 - 최승호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없는 몸뚱이로 팔려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幻으로 배불러오는 욕정과
 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 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幻인 줄 알면서 나는 幻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幻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여름 방학이 다가오는데 다들 방학 없이 공부하자고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공부를 이리도 즐거워하다니?’ 아마 공부가 즐겁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공부는 자신을 가꿔가는 것이다. 자신이 크는 기쁨.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경이로움. 이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가 아닌 파편적 지식 암기를 해 왔다. 그러니 공부가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졸업식을 하자마자 교복을 찢고 광란을 벌인다. 해방이다! 

 하지만 녹녹치 않은 삶을 살면서 허망하다. 도무지 삶의 방향을 모르겠다. 그냥 남들 가는 데로 우르르 몰려간다. 

  그러다 죽음이 다가오고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허덕허덕 산 일생. 이것이 정말 인간의 삶일까? 

 나도 사는 게 너무나 허망해 일을 끊고 자유롭게 살아보았다. 그 텅 비었던 삶이 꽉 채워졌다. 충만! 사는 건 바로 이거야!

 술에 흠뻑 취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문학 공부를 하다, 데모를 하다, 순간순간, 삶의 비의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삶은 더 없이 신비롭고 마냥 신나는 것이었다.            

 아, 공부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해 왔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 모든 생명체가 더 나은 자신을 향하여 나아가듯.

 인간도 그런 존재다. 나를 가꾸지 않고 수단이 되는 공부만 해왔으니 우리는 사는 게 이리도 힘들었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정체되면 죽는다. 먹은 게 소화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머리에 들어온 지식을 쌓아만 놓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문학, 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뒤풀이를 하며 술과 함께 내 안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했다. 정화. 내 몸은 맑게 정화되어 갔다. 

 오랜 수행(?) 끝에, 자연스레 내가 가야할 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강의,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거울 속의 백발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라도 나의 길을 갈 수 있으니.  

 내가 자유롭게 내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돈에 구애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내 나이 또래를 ‘꿀 빠는 세대’라고 한다. 그때는 마음만 먹으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불쌍하다. 저렇게 아득바득 살아야 하나? 한평생 스펙을 쌓으며 귀중한 생(生)을 허비한다.   
 그들은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취해있다.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얼굴없는 몸뚱이로 팔려다니며/관능을 퍼덕거리는//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나, 관객이 있다/幻으로 배불러오는 욕정과/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눈 앞의 시간이/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幻인 줄 알면서 나는 幻에 취해/-/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기본 소득제를 반대한다. 그들은 ‘기본 소득제를 하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편다.

 인간을 몰라서다! 그들은 오랫동안 낙타가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꾸역꾸역 오로지 사막의 한 길만 오갔다. 

 사자가 되어 산천을 향해 포효 한 번 해보지 못했고, 아이가 되어 마냥 신나게 굴러가는 바퀴가 되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의 머리엔 노예의 정신이 가득하다. 다른 상상력이 끼어 들어갈 틈이 없다.   

 만일 누가 내게 강사료를 주겠으니, 인문학 강의를 하지 말라고 하면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창조적 존재인지는 경험해보아야 한다. 낙타가 등에 얹힌 짐을 다 내던져버리고, 속에 쌓인 울분을 다 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곤 텅 빈 자신 안에서 신명이 샘물처럼 솟아올라오는 신비로움을 체험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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