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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넷째 이야기,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3)<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0)
정해랑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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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13  00: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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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1997년은 뜨거운 해였다. 하긴 남한 현대사 70여 년 중 뜨겁지 않은 해가 있었을까마는 이 해가 유달리 뜨거웠던 것은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양김 분열에 따라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귀결되자 보수야당세력에 대한 분노가 뜨거웠는데, 나아가서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으로 들어가자 그들에 대한 기대는 적어도 노동계에서는 완전히 접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전두환 노태우 구속이나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등에서 무섭게 변화를 몰아쳐 갔다. 김영삼의 이러한 몰아치기는 국민들의 지지를 불러일으켰고, 이른바 진보진영도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임기 후반기 가면서 노동법, 안기부법 등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등 수구의 본색이 드러나자 이제 우리의 대통령을 확실하게 뽑아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여 결성된 것이 건설국민승리21인데 사실 그에 못지않게 정권교체가 중요하다는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87년 선거에서 보였던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에서 후보단일화는 빠지고 비판적지지와 독자후보가 세 대결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와 달리 이번의 독자후보는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고 출발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었다. 

신돌석씨로서는 양측의 주장에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삼이 개혁을 어느 정도 했다지만 실제로 수구세력의 품에서 한 것이고, 그가 한 것을 기반으로 김대중이 개혁을 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훨씬 진전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적지지 측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이번에야말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김영삼이 개혁을 하는 듯하다가 노동법 개정 날치기 통과에서 보이듯 결국 그들은 수구와 한패이다. 김대중도 그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95년의 지방선거에서 지역등권론을 주장하면서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계 복귀를 주장한 것을 보아도 그는 철저한 개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이 김종필의 자민당과 연합해서 선거를 치르고 나면 개혁은 상당 부분 어려워질 게 뻔하다. 특히 노동개혁은 어림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양쪽 말을 다 들으면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전 조직 사람들과 함께 국민승리21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내는 김대중을 밀어서 조금이라도 전진을 해야지 무슨 독자후보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87년부터 그래왔듯이 아내는 신돌석씨에게 인텔리들 쫓아 다니면서 겉멋만 들지 말고 실질적인 운동을 하라고 했다. 당시에 직장을 다니던 신돌석씨는 저녁 시간 혹은 주말에나 시간 내서 지역에서 일을 도와주는 정도였는데 아내가 이렇게 핀잔을 주자 자연히 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상했던 것은 조철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의 성향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유연하고 정치적 쟁점이 있을 때 한쪽으로 쉽게 기울어지지 않는 점이 그의 성향이었다. 그런데 나쁘게 말하면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물론 조철구를 믿었기 때문에 전자로 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후배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는 상황에서 그가 나타나서 한마디 할 만한데 나타나지도 않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삽화-백소(白笑)]

그를 만난 것은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지 한참 지난 98년 5월경이었다. 그가 둘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장선우를 통해서였다. 셋이 인사동에 있는 조용한 술집에서 만났다. 신돌석씨는 오랜만에 만난 조철구가 너무 반가웠고 지금 정세에 대해서도 뭔가 듣고 싶었는데 조철구는 이상하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술을 마시며 근황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했는데 조철구가 자신의 근황은 말하지 않다가 드디어 입을 떼었다.

“신형, 나 대치동에 있는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신돌석씨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학원에서 강의한다는 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철구가 그런다는 것은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대치동에서 하고 있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장선우는 이미 알고 있는지 그냥 술잔만 쳐다보다가 술을 들이키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철구의 이야기는 이랬다.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단다. 조철구의 아내는 같은 학교 1년 후배였다. 같이 노동운동을 했다. 영문과 출신인 그녀는 노동운동하다가 신돌석씨가 수배되고 있던 때에 복학을 했다. 그때 이미 아이가 태어난 상태였다. 그리고는 졸업을 하자마자 선배가 하는 학습지 회사에 취직한 뒤 중역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녀는 직장을 다녔고, 아이는 처가에서 맡아 길렀다.

수배가 해제되고 그가 집에 들어가서 함께 살면서 노동운동단체에서 일하게 되자 아내는 처음에는 열심히 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의 차이가 심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조철구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도 아내는 듣는 둥 마는 둥하였다. 뉴스를 보고 조철구가 한마디 하면 대응을 안 하든가 어느 때는 왜 매사를 그렇게만 보냐는 식으로 말하였다. 자연히 조철구는 집에서 말을 거의 안 하게 되었다.

아내는 집안 살림을 불려 나가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아내가 일하는 직장 사람들은 대표부터 거의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재산 증식과 자녀 교육, 건광 관리 등에 관심을 두고, 여가 생활하듯이 운동에 대한 지원을 했다.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부동산이나 주식을 통해 큰 돈을 번 사람들, 정치권에서 잘 나가게 된 사람들, 교수나 언론인 등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요즘 많이 회자되는 강남 좌파였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아내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철구에게 그런 사람들처럼 살 수 없냐는 이야기였다. 왜 그 고생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고, 경제적으로 빈궁하냐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조철구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그러다가 아내는 결국 미국을 가겠다고 하고 조철구더러 자기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3년 동안 돈을 보내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다니던 회사가 엘에이에 지사를 두는데 책임자로 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속마음은 아들 교육을 미국에서 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조철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의 결심은 확고했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철구는 결국 동의했고, 아내가 출국하기 직전부터 노동운동단체 일을 정리하고 주변의 선후배를 통해 학원 강사 일을 시작하였다. 논술 강의였다. 잘 할 줄 알았던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버벅대기 일쑤였다. 학원을 운영하는 후배가 좀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때려칠까 하다가 몇 군데를 다니면서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이제는 좀 안정이 되어서 신돌석씨에게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미국에 가서 지사 책임자가 된다든가 자녀를 거기서 교육시킨다는 것 등은 너무나 먼 나라의 일이라서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왜 이런 일을 다 결정되고 나서 이야기하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공장에 다니던 때 파업을 하고 자신이 위장취업자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자 아침에 급하게 와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와는 무엇을 상의한다는 것보다는 알린다는 사실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마 장선우 등 학교 후배들과는 결정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신돌석씨가 아는 장선우의 성격으로 보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신돌석씨는 역시 거리가 있는 사람인가? 노동자 출신과 인텔리 사이의 거리감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벽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자신이 그런 환경에 대해 이해하기 곤란하니까 논의하기도 그랬을 것이다.

역시 노동자 출신과 인텔리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돌석씨 주변에는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동창 중에 그런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창이라고 해도 그런 친구들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봐 왔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조철구는 다르지 않은가? 조철구가 신돌석씨에게 준 영향은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무언가?

   
▲ [삽화-백소(白笑)]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끝났다. 그런데 2000년에 들어가면서 조철구는 갑자기 학원을 그만두고 충남지역의 금속노조로 일하러 떠났다. 아마도 그때 이혼을 한 모양이었다. 기러기 아빠로 몇 년 살다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무튼 다시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신돌석씨로서는 세세하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을 고뇌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뒤 그는 암에 걸리고 누이동생한테 갔다. 신돌석씨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아내나 아들이 오지 않았냐고 물으니 누이동생은 화를 참지 못하면서 한번 오겠다고 말만 하고는 안 온단다. 조철구의 아들 사랑은 유별났다. 그는 아들을 전자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이름이 그런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자기 유전자를 받았다고 해서 유 자를 떼고 전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들과 노는 것은 확실하게 하였다.

그가 아들 사랑에 유별난 것은 불행한 가정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서 큰집에 입양되었다. 당시까지는 있었던 일이었다.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었겠는가? 그는 공부를 꽤 잘 해서 광주에서 일류 고등학교를 나온 뒤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러 가려고 해도 큰집이 싫어하였고, 큰집을 들러서 어머니한테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1980년 5.18 때 수배되자마자 그는 만사 제쳐 놓고 어머니를 만나러 시골로 갔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때를 이야기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를 때 그는 보이지 않게 눈물을 훔쳤었다. 큰집에 아들을 빼앗기고 딸과만 살던 어머니는 그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던 시기에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신돌석씨와 현장에 같이 있을 때 그는 술 마시면 간혹 어머니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그 사연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노래자랑대회를 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임금도 적고 노동환경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회사는 자기 나름대로 노동자들에게 뭔가 해주려고 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노래자랑대회도 하고 탁구대회도 열고 배구대회도 하고 했었다. 노래자랑대회 때 프레스반 대표로 조철구가 뽑혔다.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노래 실력은 입사하자마자 회식 이후 회식 때마다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고르는데 신돌석씨는 첫 회식 때 불렀던 ‘울어라 기탓줄’을 부르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철구는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때는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자기가 하겠다는 걸 굳이 다른 걸로 바꿀 이유는 없기 때문에 그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곡이 잘못 된 것 같았다. 당시에는 노래방 기기가 없었고 밴드가 와서 연주하는데 키를 잘못 맞추었다. 신돌석씨가 꽃다발을 준비해서 뛰어 올라가 볼에 입을 맞추면서 응원했는데 결과는 안 좋았다.

그가 그 노래를 고집한 것은 5.18 직후 남도에 내려가 몰래 어머니를 보고 돌아설 때를 연상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나중에 해고되고 난 뒤 들었다. 평생 자식 걱정으로 살면서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을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훔치시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눔아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지 왜 그랬어? 하긴 세상 꼬라지 보면 화도 안 났겄냐만... 어여 가, 순사 올라.”

그러면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면서 눈물만 훔쳤다고 한다. 그 어머니를 뒤로 하고 광주로 갔는데 친구들이 그를 보자마자 빨리 여길 떠나라고 했다. 결국 그는 광주에서 나와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나중에 상황을 듣고는 평생 그때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암 걸린 걸 알고 불과 몇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장례식장에 아내가 왔다. 신돌석씨도 이전에 알았기 때문에 반가움에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가끔씩 눈물을 훔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냉랭하였다. 조철구가 그렇게 사랑하던 아들은 왜 안 왔는지를 물었을 때 그녀는 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슬픈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해서 신돌석씨를 화나게 하였다. 아무리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신돌석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호통을 쳤다. 그녀와 신돌석씨는 동갑이었다. 58년 개띠라고 하면서 서로 허물없이 지낸 때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형수라고 하였다. 갑자기 화를 내자 그녀는 당황하였고,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신돌석씨를 밖으로 끌어내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정말 화가 났다. 평생을 불의와 싸우면서 살았던 사람이 한때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냉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조철구가 암에 걸린 것이 학원 다닐 때에 과로한 것과 그 몇 년에 걸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신돌석씨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에게 더욱 화가 치밀었던 것이었다. 자신보다 더 화가 날 사람도 있는데 왜 자기가 설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조철구는 신돌석씨를 그 모든 것을 상의할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죽어가면서도 신돌석씨를 찾을 정도로 평생 동지로 생각했다고 봐야 한다. 두 사람의 환경이 다르다 보니 상의할 일이 있고 아닐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걸로 속 좁에 생각하는 것은 사나이답지 않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이럴 때 사나이 어쩌구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역시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꼰대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자 쓴웃음이 지어졌다.

   
▲ [삽화-백소(白笑)]

택시가 신돌석씨 동네의 정자나무가 있는 로터리에 도착했다. 이미자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모정’이었다.

  낯선 타국 바다 건너 열 세 살 어린 네가
  오직 한번 꿈에 본 듯 다녀간 이 날까지
  기다리던 스무 해 모진 목숨은 백발이 되었네

이런 가사 내용이었다. 조철구는 이 노래를 아주 가끔 불렀는데 그때마다 시선이 저 멀리를 응시하곤 했었다. 2절 끝에는 ‘생전에 못다한 자식의 도리 어머님 영전에서 흐느낍니다’로 끝난다. ‘비 내리는 고모령’도 그렇고, ‘모정’도 그렇고 조철구의 한 많은 삶을 잘 전해 주는 노래였다. 

신돌석씨는 그가 어려운 여건을 이기고 끝내 노동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인텔리들이 중산층의 삶을 살기 위해 운동을 멀리한다고 해도 비난할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자신의 운동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졸렬한 생각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한 중산층의 전형적인 행태를 숨기고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계를 해야 하리라. 

조철구는 518 때 수배되었고, 이후에 518항쟁의 진상 규명을 위해 유인물 살포나 시위 주동을 해서 518민주화운동유공자가 되었고, 광주 518민주묘지에 안장 되었다. 신돌석씨는 광주에 내려갈 때는 조철구의 묘지를 꼭 들렀다 왔다. 매년 갈 것처럼 그러다가 그 뒤 띄엄띄엄 가곤 하였다. 올해는 코로나 여파로 광주에 못 내려갔다. 가을에라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돌석씨는 택시에서 내렸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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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6-13 08:23:31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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