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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 세기의 운명을 결정한 시간들<새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1)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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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04  12: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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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 해방 후 감옥에서 풀려나는 독립운동가들. 해방의 환희는 얼마나 갔을까?

 

한반도 한 세기의 운명을 결정한 시간들

해방 전후사는 보통 1945년 8월 15일을 전후한 때부터 1950년 6.25전쟁(또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의 5년여 기간 동안의 역사를 말한다. 해방 전후사의 핵심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부터 1948년 8월과 9월 남북한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전개된 한국 현대사 또는 한반도 역사를 생각하면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는 과정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이다.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결정적으로 굳혀 주었고, 지금까지도 한반도에서 냉전과 분단 구조가 해소되지 않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1990년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체제 변화 과정에서 있었던 것과 유사한 일들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올해는 해방 75주년이면서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기념하기에는 우리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해방이 곧 분단이었는데 그 분단 상황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분단을 지금까지 지탱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던 전쟁의 결과물, 즉 휴전협정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언제 평화협정으로 대체될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해방 전후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해방 전후사는 한반도의 한 세기를 결정한 운명의 순간이었다. 분단을 굳히고  지속시킨 것은 전쟁이지만 전쟁을 불러온 것은 분단이었다. 그런데 그 분단은 바로 해방 전후 역사 전개의 산물이었다. 해방 전후사를 복기함으로써 지금의 분단과 휴전체제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변화하고 발전해간다. 우리역사 또한 이러한 역사의 일반적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의 고대사는 한반도와 만주를 무대로 하여 시작되었고 고구려·발해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동북아의 강국으로서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여러 강국들과의 거듭된 투쟁 과정에서 고구려·발해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우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와 영역을 모두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통일신라, 고려를 통해 이들의 유산을 대부분 통합, 계승하였고, 주변의 강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한반도를 무대로 한 통일국가를 유지해 왔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과 근대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침탈당했을 때에도 한반도의 통일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이룬 그 순간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분단의 힘은 우리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분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어진 38선과 그것을 경계로 한 미소의 분할점령에서 시작되었다. 

   
▲ 38선에서 만난 미군과 소련군.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고 외세가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즘 세력의 추축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진영 사이에는 새로운 대립과 패권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전후 일정기간은 미국과 소련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었고, 미소가 협력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1946년 12월 말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은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선, 1946년 이후 미소의 대립이 깊어졌고,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남한의 점령군과 워싱턴의 국무부 고위정책 결정 당국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맥아더사령부와 하지의 남한점령군은 이승만·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해 이를 북한지역까지 확대하려 했고, 군부 또한 이를 지지했다. 반면, 미 국무부의 국제주의자들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남한의 현지 점령군이었던 미군정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다 남한 내부에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한 임시권력기관을 설치, 강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북한지역까지 확대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이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등 민주적 개혁조치를 통해 인민위원회의 기반을 강화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우익세력을 배척하고 좌익이 주도하는 한반도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이 또한 남한을 점령한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소 간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가동되었으나 미소 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남한 내부 우익들의 노골적인 반탁(모스크바 결정 반대) 투쟁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이후 미소 사이에 냉전대립이 깊어지면서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끝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자신의 이해 관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스크바 합의를 깨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겨버렸다. 소련은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과 한반도에서 손을 뗄 것을 주장했으나 미국의 주도 아래 유엔에서는 남한 단독선거(‘접근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정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강력한 반대투쟁이 남한 전역에서 벌어졌고, 제주에서는 4.3민중봉기로 일부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단선단정에 반대하던 김구·김규식은 남북정치지도자 회담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찾았고,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제안이 바탕이 되어 1948년 4월 평양에서 분단정부,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남북의 제정당사회단체들이 모여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이와 함께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김회담’을 비롯해 여러 남북정치지도자 회담도 열려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저지할 수 없었고, 7월 17일 제헌헌법 제정을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이북에서도 정부 수립 절차에 돌입하였고, 8월 25일 이북지역과 8월 21〜26일 이남지역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남과 북에 대한민국(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라는 두 개의 정부(국가)가 성립되면서 좌우 대립과 갈등이 남과 북 사이의 국가 차원의 무력 충돌로 상승했다. 남한 내부에서는 국가권력이 좌익세력과 인민에 대해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국가폭력으로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한반도 전체가 물리적 폭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내전 상태에 돌입했고, 남북의 갈등·대립은 결국 38선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전쟁’을 거쳐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과 함께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냉전 때문에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분단 때문에 일어난 6.25전쟁은 전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전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는 해체되었다. 세계는 시장경제 체제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되었고, 미중의 패권 경쟁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기 시작했지만 과거 냉전구조를 지탱했던 이념과 체제 대립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냉전구조는 아직도 건재하며 분단 상황도 전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왜,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시장경제체제로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냉전구조는 해체되지 않고 있으며, 남북의 분단 상황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사를 제대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구조는 흔히 말하는 ‘이념 대립’의 산물이 아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에 의한 영토의 분할이었고 민족공동체의 파괴와 분단이었다. 한반도의 냉전구조 또한 단순한 좌우이념 대립, 체제 대립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근본적으로 민족문제가 깔려 있다. ‘민족’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심한 반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남한에서 무슨 민족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구조의 가장 중요한 대립 관계는 남과 북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의 대립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현재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구조를 결정, 지탱하고 있는 두 축은 미국과 북한이다. 남한과 북한이 한반도 분단의 기본축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게 되면 한반도의 분단 과정과 유지, 나아가 현재의 분단 상황의 해결 방안까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 또한 이념적 통합, 체제 통합이 아니라 민족 통합이 될 수밖에 없다.(주1) 

   
▲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해방 전후사를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시각이 지극히 식상한 관점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 관점은 해방 직후 분단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식상한 사고로 치부되고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 면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으면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여 해방 전후사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보려 한다.     

그동안 해방 전후사를 포함해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는 큰 진전을 보았다. 필자가 대학 2학년 때인 1979년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1권)이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당시까지의 해방 전후사 연구와 인식의 최대한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학생들을 비롯한 이른바 운동권의 필독서가 되었고, 나아가 지식인과 일반시민들,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다. 1989년 6권까지 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대표적인 성과물이자 한국 현대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 수준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대중적인 역사서였다. 이를 두고 ‘좌파적 역사 인식’이라고 비판하던 보수집단(뉴라이트)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전2권, 2006)을 출간하기도 했다.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큰 성과를 거뒀고, 그러한 성과가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논문들은 실제로는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그러니까 1990년대에 많이 나왔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그러한 성과는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2000년대에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의 협소함이나 연구자들의 편향된 인식 때문에 한국 현대사의 깊이 있는 성과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지만 가급적 해방 전후사의 주요한 연구 성과들을 충실히 반영하려고 한다. 역사는 시각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가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전후 맥락과 흐름 속에서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이 요구된다. 필자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시각과 관점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이후의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반영하여 역사를 재구성해보려 한다. 

전체 내용은 제1부 해방 전야-해방을 준비하는 사람들, 제2부 한반도-강대국의 이해관계의 충돌지점, 제3부 해방의 그날, 제4부 혁명을 예방하라-1946년의 한반도, 제5부 인민정권-북한의 상황, 제6부 냉전과 분단 위기, 제7부 두 개의 정부-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8부 전쟁으로 가는 길 등으로 구성될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비평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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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와 관련한 논의는 도진순, 분단에 대한 연역과 통일의 전제, 당대비평, 1993년 3월호(136〜161쪽)를 참조할 수 있다.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저자 약력 추가: 오후 5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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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5-08 09:35:20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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