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현실이 더 극적이고 소설이나 영화 같아서 소설이나 영화가 뭇사람의 눈길을 끌 수 없는 시기도 있다. 최근 촛불집회와 정권교체가 그랬고,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급진전이 그랬다. 역사의 격변기를 건너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다.

그 같은 시기가 어찌 최근 뿐일까. 해방과 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산업화와 통일운동, 분단과 압축성장의 속살을 파고들면 한 인간과 한 가족, 한 지역과 남북한, 그리고 한반도와 온 세계가 심한 몸살을 앓아온 흔적들은 역력하게 아로새겨져 있을 터.

“작년 여름 남편의 44년 만의 무죄판결을 내 귀로 듣고 법정을 나오면서 비로소 나도 이제 내 몫을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당자 만이 아니라 집안 자체가,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반세기 가까운 오랜 세월을 유죄의 그늘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 고경숙,『별들의 감옥』, 개미, 2020.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경숙이 첫 소설집 『별들의 감옥』(개미) 서문에 쓴 한 대목이다. 남편 임헌영은 잘 알려진 문학평론가이자 ‘문인 간첩단 사건’(1974년)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1979년) 사건 등으로 도피와 감옥 생활을 거듭했고, 2018년 44년만에 ‘문인 간첩단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40대에 문단에 발을 얹”었다는 늦깎이 소설가 고경숙의 단편소설들이야말로 격변의 시대를 건너온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누가 보더라도 소설가 자신이고 주인공의 남편은 바로 임헌영 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문학계 조류와는 결이 다른 리얼리즘의 전형인 셈이다.

임헌영 평론가는 최근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소명출판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거대담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시대가 됐다”며 “거대한 제국주의 문화가 거대담론을 서서히 거세시키는데 진보적인 지식인까지도 거기에 은연중 동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마치 거대담론을 다루면 문학이 아닌 것처럼, 정치를 다루면 문학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흔히 말하면, ‘문학적인 것’, ‘문학성이 있는 것’ 그렇게 말한다”고 비판했다.

고경숙의 단편소설 <푸른 배낭을 맨 남자>에서 세영의 남편 현우는 추석에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푸른 배낭을 챙겨 도피길에 오르고, 기관원들은 “이 총이 보이거든 문부터 열어!”라며 들이 닥친다. 여기서부터는 정해진 스토리 대로 남편의 행방을 캐는 정보원들은 “네 남편은 빨갱이”라며 은신처를 불라고 닦달하고 세영의 직장까지 찾아와 강제 휴가에 들어가게 된다...

주로 70,80년대로 설정된 군부독재의 ‘빨갱이 사냥’ 과정에서 운동가의 부인이 겪는 구체적 일상과 심적 갈등은 일제시대 애국자들을 잡아가둔 서대문형무소로 당사자가 끌려가 겪은 <5박 6일> 간의 협박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보다 극명하게 본인의 시각을 담게 된다.

혹독한 시련기를 겪은 작가의 시각은 <어머니의 천국>에서 두 아들을 북녘 땅에 둔 어머니의 심경을 그려내고, 문제아 상담에 나섰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두 번째 실수> 등에서 소재와 주제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두번째 실수>는 <새가 된 아이>, <별들의 감옥>과 더불어 심각한 청소년 문제를 다뤘고, 문제의 심각성 만큼이나 주인공과 특별한 관계에 놓인 청소년들의 감옥행이나 자살로 마감되는 비극적 결말을 담고 있다.

<봄바람 부는 날>이 고난의 시절에 그나마 한 줄기 희망적 틈새를 보여줬다면, <그 여름의 귀환>은 광우병시위가 한창일 때 이제는 주인공의 딸이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고난과 역경은 좌절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고문과 투옥으로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의 짙은 그늘을 안고 사는 주인공이 대학생 시절 자신의 제자들을 감옥에 보낸 표독한 여 교수를 요양원으로 찾아가지만 그녀는 건재하고 여전히 ‘빨갱이’ 타령인 것이 현실임을 작가도 잘 알고 있지만...

과거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숨겨진 그늘임을 알기에 작가가 들려주는 소설보다 더한 현실을 담은 소설은 아직도 아린 마음 없이는 읽어내려가기 어렵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내려놓기 또한 어렵다.

작가의 남편 임헌영 평론가는 부인의 소설집에 관한 질문에 “거의 그대로”라면서도 “사실보다 훨씬 가볍게 그려졌다. 훨씬 심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소설 속 주인공 집안과 달리 아들은 대학을 나왔고, 고등학교 때 지하써클 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작가는 “기울어진 마당을 대책 없이 달려오면서도 우리에겐 읽기와 쓰기의 희열이 있었다”며 “이젠 나도 얼마 남지 않은 사는 날들을 오직 쓰기에 바치고 싶다”고 소설가로서의 평범한, 그러나 과거에는 온전히 꿈꾸기 어려웠던 바람을 밝혔다.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작가가 선보일 ‘내 몫’의 글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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