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나 냉방기가 없던 시절에 부채는 더위를 식히는 요긴한 물건이었다.
부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인류가 탄생한 시기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테면, 나뭇잎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단순한 행위가 곧 부채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부채가 ‘부치는 채’라는 뜻이니 그럴만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10세기 전후로 부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부채는 한국, 중국, 일본이 가장 발전했고 이후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
부채는 한중일의 주요한 외교물품이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일본과 중국에 많은 양의 부채를 교환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가 수입되기도 하고 조선의 부채가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부채의 종류는 너무 많아 열거하기 힘들다.
부채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방구부채와 접부채이다.
방구부채란 부채살에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의 부채로, 일명 둥근 부채라고도 한다. 접부채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다.

집안에서는 방구부채를, 나들이를 할 때는 접부채를 주로 사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편리함 때문이다.

그림이나 글씨가 들어간 부채는 휴대용 장식품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부채에 그림이나 글씨는 넣는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부채 안에 들어간 그림이나 글씨의 품격이 높을수록 명품이 된다. 요즘으로 치면, 명품 가방이나 고급시계와 비슷하다.

정조 때 문인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인 [경조잡지]에는 “단오에 부채를 서울 관원에게 나누어주는데, 부채 면에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부채에 그린 그림은 친구나 정치적 동료 간의 징표로도 사용했다.
실제 추사 김정희가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글을 보태어 ‘지란지교’의 의리를 다졌다.

이후 부채살에서 그림만 따로 떼어내 액자나 족자로 실용성을 없애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 정선/정양사/수묵담채/23*62cm/18세기. [자료사진 - 통일뉴스]

겸재 정선이 노년에 그린 부채그림이다.
그림은 금강산을 대표하는 절집 중에 하나인 정양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정양사는 금강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정선의 대표작 [금강전도]와 마찬가지로 둥근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마치 어안렌즈(물고기눈)를 사용해 사물을 본 것처럼 한 화면에 여러 풍경들을 담아내었다.
토산과 암산으로 이루어진 금강산과 정양사, 그리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있는 선비들을 모습을 한 화면에 그렸다. 최소 3개의 각기 다른 요소가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각각의 풍경이 따로 놀지는 않는다.
정양사를 앞쪽 좌측에 놓고, 또 다른 전망대인 천일대 선비들은 앞쪽 우측에 그려서 감상자의 시점을 확고히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보면 본능적으로 정양사나 천일대에서 금강산을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림을 따라 시점을 이동하면서 정양사에서 보기도 하고 천일대에서 보기도 한다.
그 뒤로 돌기둥 같은 금강대를 기점으로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여러 절집으로 구경하고 최종적으로는 향로봉이나 비로봉까지 시선이 확장된다.
그림 한 점으로 금강산 구경이 끝난 것이다.

물론 이런 풍경은 실제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각기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단일 시공간처럼 만들어내면서 탁월한 회화성을 발휘하는 조형법은 화성(畫聖)이라고 불리는 겸재 정선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화첩그림을 부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채용으로 그렸다. 또한 이 부채그림은 친구나 좋은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금강산을 다녀왔던 친구는 추억했을 것이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림으로 여한을 풀었을 것이다.

우리그림을 감상하는 통로는 한 공간에 고정시켜 놓고 감상하는 병풍그림이나 족자그림이 있고, 수시로 꺼내서 감상하는 화첩그림이 있다.
서양의 그림은 대부분 벽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이 직접 찾아가서 봐야 한다.

접부채는 휴대용 물건이다. 이런 부채에 그림을 그려 가지고 다닌다.
이것은 기존의 미술품을 소통하고 향유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휴대용 미술작품이 된 것이다.
부채그림은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든지 펼쳐서 감상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곧바로 보여줄 수도 있다.
또한 부채를 부치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림 속의 정취를 느낄 수도 있다.

부채그림은 미술을 일상으로 녹여낸 문화이다.
이는 선비들의 와유(臥遊)문화와 밀접하다.
와유(臥遊)는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금강산은 조선시대 신선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신선세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궁극적인 민본세상, 태평성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 민본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강산을 보고 싶어 했다. 관념과 현실을 통합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현실적으로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금강산에 올랐다 하더라도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을 가장 잘 표현했다.
이 작품을 본 수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된 금강산을 가슴에 품고 태평성대의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여름이면 신선세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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