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3월 함경남도 북청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전쟁이 터졌고, 잠시만 피했다 돌아오리라 여겼던 피난길은 남겨진 가족들과의 영영 마지막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먼저 아버지를 따라가라며 “오늘 집안을 대충 정리해 놓고 내일 따라 가마” 하셨다. 그렇게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필자인 이병웅 전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의 가슴 아픈 현대사이자 남북화해와 평화를 위한 분투의 여정이었다. 거제도 수용소에서 부산 국제시장으로, 베트남 전쟁터에서 평양을 거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판문점 남북적십자 회담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어머니! 보고 싶은 어머니,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늘 걱정하시며 사신 줄 압니다. 어머님의 소식을 전하여 들을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를 이해하여 주세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어야 할 자리에 있는 제가 내 가족만 먼저 만났다고 하면 그분들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줄 것 같아서 꿈에도 보고 싶은 어머님이시지만 눈물을 머금고 뵙지 못합니다. 어머님에게는 불효자요, 인륜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인 줄 압니다마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 이럴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들 병웅아 우리는 못보고 가는대(가는데) 섭섭해 하지 말고 마음노구가거라(마음 놓고 가거라) 우리도 니 사정을 알기래서(알기에) 섭섭해 안니하고(안하고) 도라가개스니(돌아가겠으니). (중략) 이곳 어머니를 잘 이해 달라는 것 마지마으로(마지막으로) 통일을 이해서(위해서) 더 조운이를(좋은 일을) 마니하여(많이 해) 달라고 어머니 간절한 부탁이다. 어머니부탁이다 아들 병웅에게 보낸다.”

▲ 이병웅,『한 번 쓴 편지 - 남북대화의 현장 이야기』, 하다, 2019. 3.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50년, 난리 통에 왕진가방 하나만 들고 어린 아들과 함께 혈육하나 없는 남쪽으로 내려온 부친은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의원을 하며 개척교회 장로로 봉직했다. 진료를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

“언제 고향에 돌아가지?”하며 때때로 눈물을 보이던 아버지는 주변의 재혼 권고에도 거절하며 그렇게 고향과 가족만을 그리다, 1959년 봄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저자 역시 이런 부친의 영향으로 일생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

갑작스런 부친의 소천 후 가족 하나 없이 남겨진 그는 함께 피난을 내려왔던 고향 어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폐종양을 심하게 앓아 좌절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간부후보생 장교시험에 합격해 소위로 임관한다.

이후 정훈장교로 복무하다 1966년 월남 파병 비둘기부대 공보장교로 발령받아 주월 한국군 최초로 군악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8년간의 군복무 후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공채시험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남북대화업무에 참여하게 된다. 1971년이었다.

그 해 9월 한반도는 벅찬 흥분과 기대로 뜨거웠다. 8월 20일 남북 적십자사 간 공식접촉이 1953년 7월 휴전 이후 판문점에서 처음 이뤄졌고, 9월 20일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자리에 저자도 수행원의 일원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당시는 지금 돌이켜보면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분단 이후 처음 만난 남북은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눌러야 한다는 대결의식이 강했고, 이는 발언이 순서 선점이라는 ‘유치한(!)’ 경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첫 만남이니만큼 첫 발언은 북이 아닌 우리가 먼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첫 인사로 생각했던 북한 적십자회 서기장 김태희가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우리 측 김연주 수석대표는 북측의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 기본 발언문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대한적십자사를 대표하여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지난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께서는 오랫동안 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렇게 남북이 1분 이상 서로의 발언문을 동시에 읽어가자, 북측에서는 “김 선생! 김 선생!”하여 큰소리로 불렀지만, 김연주 대표는 아랑곳없이 끝까지 발언문을 읽어갔다. 결국 회담의 역사적인 첫 발언은 기록상 남측이 먼저 한 것으로 되었다.

이렇게 웃지 못 할 남북 간 에피소드는 그 후에도 많았다. 남북을 오가며 회담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당시 북한을 방문하는 대표단원들에게 양복과 구두를 새로 맞춰주어 우리가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고, 북측 방문단이 내려올 때 우리를 깔보지 못하도록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판문점을 찾아, 판문점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통일로)의 긴급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 등 건설사 회장들도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박 대통령의 지시로 여러 건설사가 각 구간을 나누어 초고속으로 도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북한 역시 다르지 않았다.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250여km를 보수 공사하는 데 1백만 명이 동원되어 변변한 장비도 없이 길을 만들어냈다. 당시 남과 북은 상대를 의식해 회담용(!) 고급 수입차를 급거 투입해 비포장도로를 오갔다. 대형차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를 달리다 전복되어 수행원들이 크게 다치기도 했다. 당시는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회담에 차질을 줄 것으로 생각해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1972년 7·4공동성명이 만들어지는 현장에도 저자는 함께 했다. 1971년부터 남북 간 비밀접촉에 참여한 그는 7·4공동성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함께 했고 이제 관련 당사자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유일하게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는 이가 되었다.

1971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간 첫 파견원 접촉 때 수행으로 참여한 이후 저자는 1982년 대한적십자사 총무, 기획관리국장,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1992년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총재 특보, 1992년~2004년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에 이르기까지 33년 동안 ‘남북적십자 현장의 산증인’으로 헌신해왔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이지만 회담장에서는 ‘원칙주의자’로 통했다. 1998년 3월 베이징 적십자대표 접촉 때는 옥수수 지원 문제를 논의하다 북측이 상식에 어긋나는 요구를 하자 “인민들이 굶어 죽는데 그런 허튼소리나 하려면 당장 돌아가라”고 일갈해 북측의 요구를 일축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1월부터 대한적십자사 총재 특보로 열 차례의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치러냈다. 회담 수석대표로 일하며 면회소 설치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해낸 인물이기도 했다. 민화협에 우리 사회의 진보, 보수, 중도 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만큼, 이들의 다양한 입장과 의견을 수렴하여 취지에 걸맞은 단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당시 민화협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북측을 설득해 함께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미 오랫동안 적십자회담 등을 통해 그를 잘 알고 있던 북측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민화협에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2000년 민화협 2기가 출범하며 공동의장 겸 수석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그는 이후 민화협이 수차례 남북공동행사를 치러낼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2018년까지 공동의장을 역임하며 민화협을 지켜왔다. 그 공로를 인정하여 민화협은 2018년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고문으로 위촉했다. 여전히 그는 ‘민화협 맨’이다.

2002년 9월 금강산, 저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로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상봉장에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이산가족이고 모친이 생존해 있음을 확인한 북측이 그를 배려해 어머니를 모셔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11살 때 헤어진 후 52년 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있어. 가족의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수시로 찾아오는 분들과 나와 친분이 있어 비공식으로 북의 가족사항을 알 수 없겠는가 부탁해 오는 분들도 많은데, 그 많은 분들이 남북 간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공식으로 만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기관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게 아니겠어. 공적인 일을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사적인 일을 앞세울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없었던 거야.”

그렇게 먼발치에서 62세가 되어버린 아들은 87세가 되신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물로 쓴 편지를 어머니께 전했고, 어머니는 그런 그를 이해하고 답장을 보냈다. 어머니는 죽은 줄 알고 50년 동안 제사를 지내온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전하셨다. 그렇게 모자는 영영 또 다시 이별했다.

분단의 고통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저자. 혈육의 정이 얼마나 애절한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자신을 다그치며 눈물로 참아야 했던 실향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땅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삶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더 빛난다.

그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 이 땅의 평화가 가능했음을, 그리고 여전히 어렵지만 우리는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음을 느낀다. 늘 건강하시어, 어리석은 후배들에게 지혜를 주시길.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끝내 고향을 찾는 날을, 가족들을 만나는 날을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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