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심사정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호랑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1970년대 초 ‘한국명화 근대 오백년전’에 출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의 표지로까지 장식했을 정도로 유명했다.
어찌 보면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보다 유명했던 그림이었다.

이 작품은 1946년 미군정 시절, 도망가던 일본인의 짐과 고미술품을 미군이 압수해서 일본인이 운영했던 요릿집 지하창고에서 처박아 두었는데 그 속에서 발견되었다.
한 골동상인이 미군에게 고미술품에 대해 설명해준 사례로 받으면서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이 작품을 덕수궁박물관에 팔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맹호도/지본수묵/97*55.5cm/18세기/조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이 그림은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다.
상당한 공력을 들여 털을 묘사했다. 자세나 표정, 세부묘사는 호랑이의 생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끈질기게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그림은 상상이나 즉흥적으로 그리지 못한다. 상당한 준비기간과 습작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인 것이다.
마치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러 번 표구를 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심사정의 그림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작품 오른쪽 상단에 있는 제문에 붙어있는 연도가 문제가 된 것이다. 작품에 표기된 날짜는 1774년으로 심사정이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남종화의 대가였던 심사정의 화풍과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똑같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 심사정은 1707년에 태어나 1769년에 돌아가셨다. 단원 김홍도가 1745년생이니 38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다.
만약 심사정이 전성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가정한다면, 그보다 나이가 어린 김홍도가 심사정의 그림을 베꼈다는 말이 된다.
넉넉잡아 60세의 심사정이 이 작품을 그렸다면, 22세의 김홍도가 베낀 것이 된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의 필력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하다.
반대로 김홍도가 50세 전후에 [송하맹호도]를 그렸다고 가정하면 이미 심사정은 죽고 없을 때이다.
결국 이 그림에서 심사정과 김홍도의 연관 관계는 찾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정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는 김홍도의 습작일 가능성이다.
김홍도는 [송하맹호도]를 그리기 위해 여러 벌의 초본을 그렸을 것이다. 이건 미술창작에 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금방 이해된다.
여러 자세나 세부형태를 그린 많은 초본이 있었고, 이런 그림을 바탕으로 최종 완성 단계를 가늠해 보기 위한 초벌그림을 그린 것이다.
특히 호랑이 털의 묘사는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에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지 않는 이유도 초본이라는 심증을 더한다.
[송하맹호도]의 소나무는 스승인 강세황이나 친구였던 이인문이 그렸다고 추정한다.
또한 이 그림은 종이에 수묵으로만 그렸다.
완성작을 원했다면 굳이 종이에 그릴 필요가 없다.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것과 비단에 채색을 한 작품의 격은 차이가 확연하다.
다시 말해,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호랑이 그림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투자하는 공력에 비해 작품의 가치가 훨씬 못 미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 초본 중에 하나가 유출되어 심사정의 그림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인인 김홍도의 그림보다는 선비화가였던 심사정의 그림으로 만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완성작도 아닌 습작은 값어치가 현격이 떨어진다. 그럴 바에는 심사정의 그림으로 바꾸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둘째, 전문화원이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모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이 유행하지 못한 것은 따라 그리거나 흉내 내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문화원이 베껴 그렸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실력이 있다고 모두 유명해지거나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에는 철학과 미학, 조형 원리 같은 복잡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그에 맞는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은 기술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은 김홍도의 전매특허와도 같다. 김홍도의 재능을 물려받은 아들 김양기의 호랑이 그림도 아버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수준도 떨어진다.
독창적인 형상을 창조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그린 호랑이나 매 그림 따위가 인기가 높았다.
김홍도, 임희지가 합작한 [죽하맹호도]나 아들 김양기의 [맹호도]가 일본에서 발견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모사능력이 뛰어난 화원이 김홍도의 그림을 베껴 그렸고, 다시 화상들이 농간을 부려 심사정의 그림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김홍도나 심사정은 둘 다 중국, 일본에서도 유명했던 국제적인 화가였다.
이 둘의 결합으로 작품 값을 올려 보려는 잔머리를 쓴 것이다.

[맹호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시가 적혀있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獰猛磨牙孰敢逢 용맹스럽게 이를 가니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
愁生東海 老黃公 동해의 늙은 황공黃公은 시름이 이니
于今跋扈橫行者 요즈음 드세게 횡포스런 자들
誰識人中此類同 이 짐승과 똑같은 인간인 줄 누가 알리오.

이 시에는 그림 속의 호랑이가 어떤 상징인지를 보여준다.
일단 호랑이가 이를 간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그림 속의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를 갈아 맞서지 못한다’는 말은 전혀 호랑이답지 않다. ‘이를 가는’ 행위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라는 말처럼 분노를 내면화하는 일이다.
‘동해의 늙은 황공의 시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망해가는 조선을 의인화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요즘 드세게 횡포스런 자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쁜 놈을 뜻한다.
‘이 짐승과 똑같은 인간인 줄 누가 알리오’라는 구절과 연결하면, 호랑이의 상징이 곧바로 드러난다.
결국 ‘횡포스런 자들’, 즉 나쁜 놈과 호랑이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용맹한 것이 아니라 포악한 존재로 그려진다.
난세의 어려움을 포악한 호랑이에 빗대어 풍자를 하는 내용인데 그림 속의 호랑이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 글이다.

김홍도의 호랑이는 선비나 대인군자의 상징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전혀 무섭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호랑이의 상징이 나쁜 놈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
이건 지극히 일본 호랑이의 상징이다.

이 작품은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최초 주문자가 누구인지, 어떤 경로로 [맹호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자 한 것은 일본에서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귀족이나 부자들은 김홍도나 심사정의 명성은 알고 있겠지만 구체적인 생몰연대나 화법에 관해서는 모를 수밖에 없는 허점은 노린 것이다.
이 작품이 김홍도의 초본이든, 위작이든 간에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작이 만들어지는 것은 원작이 뛰어나고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단원 김홍도는 세상에서 가장 인문학적이고 지적인 호랑이의 형상을 창조했다. 현재 심사정은 몰락한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고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조선남종화를 개척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화가들의 예술세계를 흠모하고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일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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