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가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밤비
 - 백거이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
 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
 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질투하지 마! 알았지? 질투하면 안 돼!’

 엄마가 동생과 함께 운동을 하니 언니가 왜 나와는 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나 보다!

 세 모녀의 침묵이 흐르고,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운동 기구 돌아가는 소리만 쓸쓸하게 들린다.

 앞으로 언니는 어떻게 될까? ‘질투’가 마음 깊이 응어리지지 않을까? 그 응어리진 검은 마음은 언젠가 동생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불쑥 불쑥 틔어 나올 것이다.

 저럴 때는 그냥 두면 되는데!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엔 ‘질투’라는 응어리진 검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질투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 씨앗은 몰래 몰래 자라고 이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만큼 커서 제 마음대로 불쑥 불쑥 틔어 나오나 보다.

 엄마는 그 업(業)을 끊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쌓인 업은 또 그만큼의 시간 동안 힘겹게 허물어야 사라질 것이다. 

 이제 엄마는 힘 센 그 업을 어쩌지 못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업을 전해주기 싫어 질투하지 말라는 조기 교육을 하는데, 오히려 딸들은 그 업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어버렸다.   

 가끔 학부모 교육을 가게 되면 나는 항상 같은 주제의 강의를 한다. ‘그냥 두면 돼요!’ 누구나 말로는 다 아는 ‘아이를 지켜봐 주고 격려하고 지지하면 된다’는 논지로 강의를 한다.

 그러면 학부모님들은 그게 ‘어려워요!’하고 합창을 한다. 나는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오랫동안 그냥 내 버려 둬봐야 한다고 조언해 준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항상 자신을 그냥 두지 말라고 다그친다. ‘시간은 금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금과옥조다. 우리는 헉헉대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 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냥 내버려 둬!’가 삶의 신조가 되었다. 이 신조가 가장 빛을 발한 건, 자녀 교육 같다.

 내게는 두 아들이 있다. 이제는 장성하여 둘 다 자신들의 삶을 가꾸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시골에 내려가서 완전히 자유롭게 자라게 한 게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삶 전체가 ‘그냥 내버려 둬!’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거이 시인처럼 담담히 ‘밤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거대한 우주의 운행 앞에 함께 담담하게 동참하는 백거이 시인. ‘자신’을 다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일 것이다. 

 백거이 시인의 이름 거이(居易)는 ‘편안함에 거하다’는 뜻이다. 시인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술의 힘으로 이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맞이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이(居易)’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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