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사정/선유도/종이에 담채/27.3×40㎝/1764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거센 파도가 일렁이고 자욱한 안개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바다에 조그만 배가 가로지르고 있다.
뱃사공은 물살을 이기려고 온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데 앞쪽의 두 선비는 편안하게 바다를 관조하고 있다.
배에는 싣고 다니기 난감해 보이는 물건들이 실려 있다. 책상과 책, 화병, 수석 따위도 엉뚱하지만 한술 더 떠 두루미가 위태롭게 수석 위에 앉아있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되지 않는 아련한 공간이 펼쳐진 이 작품은 심사정(1707~1769)이 58세에 그린 '선유도'(1764)이다.

선유(船遊)는 우리말로 ‘뱃놀이’이다.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는 이유는 그 행위가 곧 ‘풍류’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뱃놀이는 풍류의 결정판이었다.
뱃놀이는 유유자적한 풍류로 음주(飮酒)와 시작(詩作), 시창(詩唱) 등이 따랐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생과 악공 등이 배에 함께 올라서 춤과 노래, 반주 음악을 제공하였다.
뱃놀이에 관한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혜원 신윤복의 [주유청강]이 있다.

풍류는 힘들고 고통스런 도심의 실천에 따른 보상

<참고>

1. 풍류(風流)

바람 ‘풍(風)’자와 물 흐를 ‘유(流)’자가 합쳐져서 된 풍류라는 말은 단순한 바람과 물 흐름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자연이기 때문에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풍치가 있고 멋있게 노는 일’ 또는 ‘운치가 있는 일’로 풀이한 사전이 있는가 하면, ‘아취(雅趣)가 있는 것’ 또는 ‘속(俗)된 것을 버리고 고상한 유희를 하는 것’으로 풀이한 학자도 있다.
또한 풍류를 자연과 인생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삼매경에 대한 미적 표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한편 “그 사람은 풍류가 없어”라든지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하였다면 멋도 없고 음악도 모르고 여유도 없는 옹졸하고 감정이 메마른 틀에 박힌 꽁생원쯤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풍류란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 여유, 자유분방함, 즐거운 것 등 많은 뜻을 내포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2. 인심도심(人心道心)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밀히 하고 통일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라는 것과 『예기(禮記)』「악기(樂記)」 편의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함은 하늘의 본성이며,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본성의 (타고 난) 욕망이다.[人生而靜天之性也感於物而動性之欲也]”라는 것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서경(書經)』에 나타난 인심도심(人心道心)은 요(堯)·순(舜)·우(禹)의 도통(道統) 계승을 상징하는 치인(治人)을 위한 요결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인욕천리(人欲天理) 문제와 함께 언급되면서 이학(理學)의 주제로 부각된다. 인간의 마음 특히 지각(知覺)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시켜 해석해 냄으로써 치심(治心)의 문제로 정립된다.
이 문제는 조선 성리학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로 심화되는 한편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의 발전적 논의를 거치게 된다. 인심을 생리(生理)·생존(生存)의 마음으로, 도심을 도의(道義)·의리(義理)의 마음으로 보아 마음[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을 전제로 인심으로 하여금 도심의 명령을 듣게 하는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실천적 심법(心法)으로 정립된다. ([위키실록사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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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간단하게 이해하고 있는 풍류는 ‘내면의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즐거움’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심도심론’에 있다.

선비는 철학자이자 정치인이다.
내적으로는 수기(修己)를 통해 군자를 추구하고, 외적으로는 치인(治人)을 통해 민본정치를 구현하고자 한다.
‘인심도심론’에 따르면, 선비가 군자를 추구하고 치인을 하더라도 생리, 생존욕구나 호리피해(好利避害)-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피해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인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지극한 도심(인의예지)으로 인심을 다스리고 평온하게 할 뿐이다.

군자는 인의예지를 체화하여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또한 치인을 위해서는 부정한 돈과 부패한 권력을 멀리해야 한다. 흔히 강제가 아닌 자발적 청빈, 청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다는 말처럼 돈과 권력 앞에서 인심을 제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지탄과 고립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결국 미약한 도심에게 힘을 실어주고 칭찬하는 사기(士氣)가 필요하다.
나는 ‘풍류’를 바로 이러한 힘들고 고통스런 도심의 실천에 따른 보상으로 해석한다.

▲ 혜원 신윤복/주유청강-뱃놀이를 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그렸다. 대금을 부는 악사와 기생이 함께 동승했다. 기생에게 담배를 물려주며 다정하게 구는 선비의 모습이 특이하다.
이런 뱃놀이문화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호수나 강가의 유람선 문화가 그것이다. 또한 어릴 적 연인들이 배를 타며 놀았던 문화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청빈, 청렴, 지조와 절개의 보상으로 즐거움을 찾는 ‘풍류’에는 돈과 권력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그래서 풍류를 규정할 때, 유유자적과 풍류를 결합시킨다.
유유자적(悠悠自適)은 여유(餘裕)가 있어 한가(閑暇)롭고 걱정이 없는 모양(模樣)이라는 뜻으로, 속세(俗世)에 속박(束縛)됨이 없이 자기(自己)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지냄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속세의 속박은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심사정의 삶은 평온했다

현재(玄齎) 심사정하면 떠오르는 영상은 ‘불우한 선비화가’이다.
기행을 일삼던 ‘최북’, ‘김명국’이나 불행한 삶을 살다 자살한 ‘고흐’같은 반열에 놓고 입방아를 찧는다.
나는 이러한 화가의 불우한 삶이나 기행을 상품화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화가는 별나라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 그냥 전문성을 가진 예술가일 뿐이다.
사실 화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은 특별하다. 사연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도 있듯이,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사연을 들으면 소설책 몇 권은 나올 것이다.

심사정의 할아버지 심익창은 당시 왕세자였던 연잉군(영조)을 시해하려다 역적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죽었지만, 아버지와 심사정은 살아남았다.
역적 집안의 자손으로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이를 두고 심사정의 삶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 겸재 정선/죽서루-세 명의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하지만 당시 심사정의 상태는 요즘으로 치면, 친일역적의 자손이거나 몰락한 재벌 3세의 처지와 비슷하다.
가문과 개인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심사정은 역적의 손자로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또한 이러한 처지를 한탄하거나 거부했다면 더욱 큰 화를 당할 수 있었다.

심사정은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그림만 그렸다고 전한다.
죽었을 때에는 염을 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심사정의 기록을 살펴보면 의아한 구석이 많다.
역적의 자손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겸재 정선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또한 전성기를 누리던 청나라에 들락거리던 돈 많은 중인들과 교류하면서 중국에도 명성을 날렸다.
심사정의 정치적인 삶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런 심사정을 두고 누가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인가.

[선유도]란 작품을 순전히 심사정 개인의 정서를 표현했다고 가정해 보자.
거친 바다는 역적의 자손이라는 현실일 것이다. 힘겹게 노를 젓는 사공에게 심사정 모습이 투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연하게 바다를 관조하는 선비 중 한명이 심사정일 가능성이 높다. 또 한명은 자신의 마음이나 작품세계를 알아주는 벗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배 위에는 생뚱맞게 서책과 괴석, 화병, 두루미 따위가 그려져 있다.
이런 기물은 철학, 신념, 지조, 풍류 따위의 상징이 붙어있다. 이런 기물들이 청나라 명품이고 사치스런 취미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걸 그대로 해석하면 어려운 현실과 달리 심사정의 삶은 내면적으로 초연했고 외부적으로도 화려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작품이 자신의 이상적 가치를 드러낸다면, 최소한 심사정은 이러한 삶을 추구한 것이다.

화가의 개인적인 삶과 작품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현재 심사정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 화가 중의 한 명이다.
선비화가란 말은 학문을 하는 선비가 미술작품 활동을 할 때 붙이는 말이다. 선비는 그야말로 철학자이다. 조선시대 선비는 이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과 실천을 통합시키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비화가는 철학을 공부하고 내면화한 것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풍류에 관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선비화가로 불리지 않는다. 그 이유 중에는 철학적 삶과 작품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심사정은 ‘조선남종화’를 완성한 대가로 인정받는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가 있다.
작품을 창작한 양(量)과 남아 전해지는 양(量)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훼손과 유출이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심사정의 작품은 100여점 이상 남아 전해진다. 이는 심사정의 작품을 고이 간직하고 후대에 전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심사정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심사정이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힘든 붓질로 연명했는지, 아니면 유유자적한 풍류의 삶을 살았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는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정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행(奇行)을 일삼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간 화가들의 모습을 좋아한다.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유유자적한 풍류의 세계를 그린 작품과는 달리 화가는 흥청망청하고 부패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 끼리 어울리면 생활하고 노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서로가 충돌하고 불편해지고 결국 적대적으로 변한다.

서양의 다빈치, 피카소, 달리, 모딜리아니, 세잔 같은 화가들도 삶과 작품세계가 거의 일치한다. 인본주의 철학에서 개인의 도덕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개인의 도덕성보다 새로움의 창조와 같은 영웅적인 행위나 성과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철학이나 미학을 가진 화가들은 자신의 몸이나 삶, 재주를 상품화 시키고, 홍보용으로 사용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 또한 작품 내용도 대중의 허영을 자극하거나 부자들의 여흥이나 편안함을 주로 표현한다.
심지어는 기부나 봉사의 행위마저도 작품 값을 올리거나 홍보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삼재(三齋)에 속하는 선비화가들의 삶에는 특별한 사연이 별로 없다. 이에 반해 중인 출신의 김홍도, 신윤복, 평민이었던 장승업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특이한 면면이 많다.

▲ 심사정/겸현신품첩 (謙玄神品帖) 중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종이에 채색/25.0cm*18cm/​​서울대학교 박물관-심성이 평온해야만 그릴 수 있는 작품이다. 심사정은 이러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자료사진 = 심규섭]

심사정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유유자적한 풍류와 관련이 있다.
남종화의 특성이 그러하듯 심사정은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고 그 속에서 소박하고 담백한 풍류를 그렸다.
그렇다면 현재 심사정의 삶도 그의 작품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심사정의 삶은 다른 선비들의 삶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역적이었던 할아버지처럼 욕심을 부리면서 정부에 반기를 들기 않았고, 현실의 고통 때문에 아우성을 치지도 않았다.
또한 오원 장승업처럼 그림을 팔아서 큰돈을 벌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비였던 심사정은 겸재 정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을 파는데 인색했고 주저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만큼만 팔았을 가능성이 높다.

심사정의 [선유도]에는 유유자적한 풍류의 삶이 담겨있고, 가난하지만 단단한 화가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좁은 배에는 서책이 상징하는 철학과 매화병과 수석이 상징하는 신념이 들어있다. 이는 곧 심사정이 추구했던 내면의 세계일 것이다.
거친 바다와 파도라는 현실에서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의 중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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