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도/을묘년 화첩-해암호취도/1795년/수묵담채/23.2*27.2/개인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망망한 바다에 울퉁불퉁 거친 바위섬이 떠 있다.
그 바위섬 꼭대기에 독수리 한 마리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워낙 작은 그림이고 수묵으로 쓱쓱 그렸기에 사실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바다, 기암괴석, 독수리라는 그림 속의 요소는 모두 강하며 자극적이다.
각각의 요소는 따로 그려도 독립적인 작품이 된다. 이런 요소를 세 개나 결합했다면 감상자의 관심과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작은 화면, 수묵만으로 그리는 한계를 극복하는 탁월한 조형방법인 셈이다.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추정하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설령 이 작품이 위작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화면 구성과 표현능력은 김홍도에 버금간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다와 파도는 현실, 사회적 공간을 뜻하고, 풍파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울퉁불퉁한 바위는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의 영원성을 상징하며, 독수리는 용맹한 신념을 가진 사람의 의인화이다.
이를 결합하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내용이 도출된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존과 사회적 인격을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와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 정홍래/욱일호취(旭日豪鷲)/비단에 색/118.2×60.9cm/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해암호취도’의 뿌리가 되는 작품이다. 정홍래가 그린 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은 이상적 가치의 상징이라고 여겨도 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이 작품의 연원을 굳이 찾으라면, 김홍도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화원 정홍래의 [욱일호취도]에 있다.
정홍래는 숙종 연간에 활동했던 궁중화원이었다.
[욱일호취도]는 거친 바다에 바위가 있고, 그 위에 매나 독수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침 해의 유무이고, 다소 큰 비단 화폭에 꼼꼼한 필선과 채색을 한 [욱일호취도]와 작은 화지에 수묵과 엷은 색으로 칠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해암호취도]의 독수리의 자세와 시선은 특이하다.
보통 이런 소재의 작품에서 앉아있는 독수리나 매의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독수리는 아래를 내려 보고 있다.
만약 먹이를 노리고 있다면 물고기나 작은 바다 새를 그려야 한다. 또한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도 보이지 않는다.
혹 바다를 향해 날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날개를 펴거나 퍼덕거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도대체 왜 독수리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다를 보고 있는 것일까?

독수리의 시선은 그림에서 아주 중요한 철학이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독수리의 시선이 닿는 하늘이 이상적인 가치를 뜻한다면, 바다는 곧 현실적 공간이자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은 이상적이고 관념성이 강하다. 그래서 겸재의 영향을 받은 정홍래의 매그림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에 반해 김홍도가 살았던 시기는 호락논쟁, 격물치지라는 철학적 논쟁을 통해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 문화가 수용되고 있었다.
청나라 문화의 수용은 현실적인 정치, 경제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김홍도는 이상적인 가치를 현실적인 가치를 바꾸고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김홍도의 능력이 발휘된 풍속화나 도석화(道釋畵)와 같은 작품은 대부분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김홍도가 관여한 궁중채색화는 백성들의 욕망과 구현을 담은 속화(俗畫)의 바탕이 되고 대중화하기에 이른다.

▲ 김홍도 필/을묘년 화첩/1795년/수묵담채/23.2*27.2/개인소장.
위-총석정, 을묘년중추사 증 김경림, 단원이란 글자가 있다.
아래-송하유록, 이상세계를 뜻하지만 현실적인 내용으로는 불로장생을 해석하기도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이 작품은 여러 작품을 묶은 화첩 중의 하나이다. 화첩은 뜯겨져 나가고 그 중 발견된 3점에 포함되어 있다.
화첩에 포함된 다른 작품에 ‘을묘중추사 증 김경림, 단원(乙卯仲秋寫 贈 金景林 檀園)’ 이란 글자가 있는데, 이를 토대로 1795년 8월에 그려 김경림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경림은 역관 출신으로 당시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소금장수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다.
김경림에 관한 내용은 비판적이다. 돈을 물 쓰듯이 화려한 생활을 하고 정경유착과 같은 비리를 저질렀다고 간접적으로 비난한 글이 남아있다.

이 작품은 비록 세상 풍파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못난 모습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바위를 닮아야 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독수리의 용맹함과 같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김홍도는 돈으로 위세를 떨치던 김경림에게 이 작품을 팔았다. 당시 김경림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좋지 않았다. 김홍도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칫 김경림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돈이 된다면 부패한 사람에게도 그림을 그려준다는 비판을 받아 명성에 떡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려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사회적 관계나 수양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학문적 바탕과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호락논쟁을 통해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를 수용했던 것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한다.

이런 그림을 그린 김홍도는 인격적으로 완벽한 성인이거나 사회적 비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감 재직 시 탄핵을 받아 쫓겨 다니기도 했고, 거만했으며, 사찰에 큰돈을 기부하고 요행을 바란 심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홍도는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끊임없이 성찰과 자기수양을 이어나갔다.
당시 어렵고 복잡한 현실 속에 살면서도 이상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김홍도의 삶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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