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라캉)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김남주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이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를 읽었다. 작은 마을 슬리피 할로우(잠자는 계곡)에 젊은 교사 이카보드가 온다. 그는 성실한 청년이다. 수업도 성실하게 하고 노래도 잘하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는 마을의 매력 있는 처녀 카트리나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통뼈’ 브롬이 있다. 이카보드는 여우 꼬리로 장식된 털모자를 쓰고 무리를 이끌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브롬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며 교회 성가대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카트리나의 집에 수시로 드나든다.

 이 마을엔 슬리피 할로우라는 이름답게 온갖  기담, 유령, 귀신 이야기들이 전해져 왔다. 특히 목이 잘린 기사 혹은 ‘말을 달리는 헤세 기병’ 얘기는 어디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목이 잘린 기사’는 독일에서 온 기병이었는데, 남북 전쟁 통에 목을 읽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따금 무덤에서 일어나 자신의 목을 찾기 위해 말을 타고 바람처럼 내달린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카트리나의 아버지 발터스 반 테셀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 이카보드도 초대를 받아 한 벌 뿐인 양복을 다려 입고 집 주인의 늙은 말을 빌려 타고 간다. 파티가 열리는 동안 이카보드는 능수능란한 춤 솜씨와 말솜씨로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파티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각자 부산하게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카보드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늙은 말 위에 앉아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했다. 온갖 유령과 악마에 관련된 이야기가 떠올라 이카보드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온갖 유령 이야기가 탄생한 다리가 멀찍이서 보였다. 브롬이 목이 잘린 기사를 만나 달리기 시합을 했다는 곳이었다. 아, 그때 어둠 속에서 머리가 없는 기사가 말을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 쥐고 있었다. 

 오! 이카보드는 혼비백산 늙은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차 앞으로 내달렸다. 목 없는 기사도 재빨리 뒤따라왔다. 속도가 좀 늦추어지면 목 없는 기사도 속도를 늦추고 빨리 내달리면 그도 같이 속도를 높였다.

 다리 가까이에 왔을 때 목이 잘린 기사가 자신의 머리를 이카보드에게 던졌다. 그의 머리가 이카보드의 머리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카보드는 진흙 속에 곤두박질쳤다. 늙은 말과 유령은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이카보드를 찾아 나섰다. 그의 모자가 물웅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옆으로 난 길에서는 호박 한 덩이가 산산조각이 난 채 발견되었다. 이카보드가 탔던 늙은 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카보드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뒤 이카보드는 마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지식인이었던 이카보드는 어떻게 하여 한순간에 슬리피 할로우에서 허망하게 몰락하게 되었을까! ‘몸’으로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은 다들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카보드의 ‘지식’이 그의 몰락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에게 홀연히 나타난 목이 잘린 기사, 그는 이카보드가 말을 빨리 달리면 같이 빨리 달려 뒤따라오고 조금 속도를 늦추면 함께 속도를 늦추었다. 그렇다면 그는 목이 잘린 기사가 아니라 이카보드의 검은 그림자가 아니었던가! 아니면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이었던지. 

 그가 머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호박이 아니었던가! 아마 브롬이 장난을 쳤을 것이다. 이카보드가 지레 목이 잘린 기사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차렸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한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삼팔선을 한반도 중앙에 그어놓으니 그 선은 한반도 곳곳에 뿌리를 내리뻗는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휘여진 등에도 있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급기야 ‘나라가 온통/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그대 가슴에도 있다.’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삼팔선’은 너무나 깊고 깊다. 북한과의 문제가 고착상태에 빠져 있다. 북한과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진전시킨 문재인 정부가 지지를 많이 잃고 있다. 

 경제 불황이 일상의 삶에서 피부에 와 닿는 서민들의 지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왜 많은 사람들이 남북관계의 물꼬를 ‘퍼주기’로 생각할까? 이러다가 북한과 적대적인 세력에게 다시 권력이 넘어갈까 걱정이다. 우리가 북한과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희망을 갖기 힘들 것이다.  

 개성공단을 재개하여 남북경협을 넓혀가고 경의선을 복구하여 유럽까지 철도를 이어가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밝을까?

 왜 우리는 ‘최저시급’을 넘어 남북경협까지 상상력을 넓혀가지 못할까? 삼팔선은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데. 그 생각을 넘어 다른 상상을 하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가!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한순간에 몰락했던 비극의 이카보드. 이카보드는 지금 이 땅에서 무수히 희극으로 재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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